[불교인의 산아조절론] (2)인간승리를 위한 서장

2009-06-13     광덕 스님

 Ⅲ. 인간구조(人間構造) 

 󰋪 이래서 인간은 운다--부처님의 처방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생명 여건의 보전 내지 실현을 위하여 끊임없이 도전하고 승리와 패배와 상처를 수입하며 또 자조(自嘲)와 자학 퇴타로 좌절한다.
 이러한 생명 발동의 형식은 유물 화석의 시대나 전제 폭군의 시대나 기아포외(飢餓怖畏)의 시절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현상 인간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은 펴지신다.
 그것은 인간이 허가(虛假)인 유무현상(有無現象)에 속지 말고 참된 자아(自我), 진면목(眞面目)을 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자기의 참 면목이 현상과 감각을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 이전의 실재이며, 무량 공덕이 자족하고 공덕 원만의 세계는 본래부터 완성되어 있음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이것이 영원한 존재이다. 부처님은 이것을 눈앞에 들여대며 「이것을 보라.」하신다.
 현상에 눈이 고착(固着)된 범부들은 여전히 보지 못한다.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시 여러 방편으로 설하신다.
 필자는 여기서 감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보탬이 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미혹된 현상을 다시 구분하여 관찰함으로써 미혹속의 불행을 미혹으로나마 경감할 것을 시도할 뿐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범부 현실이 유물화(唯物化)로 가속화(加速化)하고 부도덕(不道德)이 아닌 무도덕(無道德)으로 치달리며 퇴폐와 방종을 미화하는 방황과 혼란의 물결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서다.

 󰋪 이 땅은 인간 천국 

 실로 진리안목(眞理眼目)이 본 바의 인간 실상은 장엄한 대광명의 중핵(中核)인 것이다. 지혜와 자비의 모든 위덕은 그로부터 유래한다. 그는 권위와 가치의 설정자다. 영원과 무한과 자재는 그의 것이다. 그의 의욕 하는 것이 창조(創造)다. 그런데 오늘날의 범부 군상을 보라. 주체는 상대와의 관계 속에 매몰되고 있지 않는가. 
 이 땅은 인간의 세계, 인간의 천국이다. 인간은 이 땅에서 그가 타고난 덕성도 능력도 계발하고 역사에의 기여도 보람도 느끼고 그리고 대개는 미련을 남기고 이 땅을 하직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 사이에 덕성의 함양과 능력을 계발 하느라고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그것은 사회에서, 혹은 교회에서, 또는 학교 및 가정 등 여러 환경 여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교육의 효과는 위대하다. 그것이 깊은 인간에의 신앙과 긍정에서 출발하고 뜨거운 애정으로 뒷받침 될 때 그 효과는 더욱 위대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지 못할 때는 많은 문제가 있다.
 학교 교육은 한때 심한 비판의 대상이 된 때도 있었다. 학교가 단순한 지식의 전수장(傳授場)으로 바뀌고 사도(師道)는 지식의 소매상으로 됐을 때의 이야기다. 어쨌든 교육은 오늘날 인간의 눈을 열어 주는 시설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 문명의 공로 그 모두를 교육에 받쳐도 아깝지는 않다. 그런데 교육이 인간 내부에 숨은 인간의 품격과 능력을 끌어내고 도야하는 것이라 하지만 거기에도 어쩔 수 없이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까다로운 이론은 그만 두자. 오늘날의 인간 풍조(風潮)는 교육이 기대한 바와는 사뭇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교육 중에도 기능의 전달 훈습은 이것이 좀 늦어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인격도야 인간형성은 보다 빠를수록 효과적이다. 대개 인간형성이니 덕성함양이란 것은 이론이나 지식에서 오느니보다 정신적이며 감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년교육, 가정교육이 중시되고 심지어 태교론(胎敎論)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인간으로 출발이후의 일이다. 태아는 인간으로 탄생이전이라 하지만 역시 생명이 육체를 얻어 이 땅 출현에 이미 착수한 자인 것이다.

 󰋪 천인(天人)을 맞이하자.

 우리는 한 사회나 한 조직의 발전을 위하여 그 사회조직의 요원을 얻으려 할 때는 인물고사나 그 밖의 방법으로 직종에 적합한 우수한 인물을 선발한다. 그리고 선발된 요원을 다시 교육 훈련을 거듭하여 자체 조직의 강화와 발전을 기도한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사회에도 보다 우수한 인간을 선택하여 태어나게 할 수는 없을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수 사원을 선택한 회사가 다른 회사를 압도하고 발전할 일단의 희망을 거둔 것처럼 우리 인간사회에도 보다 바람직한 인간사회를 이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오늘날의 유전학(遺傳學)은 그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수한 유전인자의 결합으로 우수한 품종을 얻으며 다시 인공수정(人工受精)의 방법으로 공식상 결론의 실현을 기도한다. 이것을 인간에게도 적용하자는 것이다. 이 방법이 물론 불가능은 아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는 것과 바람직한 인간적인 것이냐에 대해서는 운니지차(雲泥之差)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밝히겠다.)
 유전학과 우생학(優生學)이 물질적 생물적 방법이며 지엽적 방법이라면 이보다 근본적이며 인간적인 방법이 있다.

Ⅳ. 영 인(靈人) 

 󰋪「영(靈)」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단순한 물질의 복합인 육체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앞서 말한 바다. 그것이 실로는 불성(佛性)이며 영성(靈性)뿐이지만 착각과 전도로 자기 상실을 거듭하는 가운데 마침내 육체아(肉體我)와 의식아(意識我)로 분별된다. 그래서 의식아의 심층에 영성이 깃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그럴까?
 실로는 인간은 육체니, 의식이니, 영(靈)으로 분별될 인간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낭연독조(郎然獨照) 절대의 신성(神性)을 스스로 구유(具有)하는 유일자(唯一者)며 전일자(全一者)다. 그러나 범부로서는 물질적이며 감각적인 현상만을 인식할 뿐이기 때문에 일단 범부의 눈에 따라 설명하게 되는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다.

 인간이란 영성(靈性)과 육체의 단계적 결합체라는 입장에서 볼 때, 이 땅에 탄생하는 생명이란 세표분열과 그 결합에서 이루어진 육체만은 아니다. 자기 개성 구현에 필요한 물질을 흡수하고 자기를 충족하고 다시 분열하면서 자기를 형성해 가는 창조적 주체가 없을 수 없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육체의 통일성과 개성은 성숙될 수 없으리라. 이것을 총관하는 주체를 우리는 우선 영(靈) 이라 하여 둔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것은 유전인자의 작용이 아닌가 할 것이다. 그렇다. 그 사이에 유전인자의 개재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유전인자를 선택한 자는 유전인자가 아닌 것은 명백하다. 이 유전 인자를 선택하는 자가 영(靈)이니 혼(魂)이니 하는 영성의 기우질(寄寓質)이다.
 이 영(靈)이 육체에 기탁하며 자기를 형성하면서부터 생명은 이땅의 인구로 출발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태다. 태아가 성장하여 인간으로 탄생한다하나 기실은 수태가 이미 인생의 출발이며 인생 작업이다.

 󰋪 인간은 인간복(人間服)을 입은 「영(靈)」이다. --개성차(個性差)의 문제(問題)--

 인간 육체에 기탁하는 영이 본연 영성이 아니며 미혹으로 인한 변태영(變態靈)임을 알 때 본연영성(本然靈性) (佛性)을 미혹한 정도에 따라 영의 성능도 차별이 있게 됨을 알게될 것이다. 이점이 영의 성능이 평등하지 않는 이유다.
 이러한 불평등한 영이 각기 육체라는 옷을 걸치고 이 세계를 활보한다. 다시 말하면 우주 여행을 할 때 우주복을 입고 우주 조건에 적응하듯이 영은 육체라는 인간복을 입고 이 세계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복을 입은 영인(靈人)이다.
 이렇게 하여 이 땅에 태어난 인간에 대하여 우리의 사회는 가지가지 교육이니 훈련을 시켜 그의 성능을 계발하고 또는 적성을 함양하여 타와의 적응 조절 능력을 향상시킨다.
 이러한 교육은 과연 위력적이다. 그렇지만 그 효과가 미치는 한계가 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이미 태어난 인간을 교육 훈련시킨다 하더라도 보다 고급령(高級靈)을 이 땅에 초청--탄생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하는 이론이 나온다.
 과연 그렇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본성과 실상공능(實相功能)이 평등하다. 하지만 이것은 기본적 본성공덕의 문제이지 현상 인간 재능이 평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재능이 천차만별이다. 교육 훈련이라는 것은 그 기초적 재능위에 첨가되는 것이므로 인간의 기초 재능의 차이는 이미 출발 전에 결정적이다. 교육에 의한 교정이나 향상이란 물론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심히 곤란하다. 이 기초 재능의 불평등을 무시한 형식적 만민평등론이란 마치 맹인의 폭거나 다름없다. 그는 인간 내면의 차등은 보지 못하면서 평등 대패로 마구 밀어대기 때문이다.
 육체 옷을 입기는 모두가 같다. 그러나 그 내면 상은 실로 천차만별--실로 덕성으로 말하면 악귀와 보살, 능력은 목우(木偶)와 신(神)의 차가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 저속(低俗)한 영(靈)의 수생(受生)을 봉쇄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의 성화(聖化)를 위하여서라도 마땅히 고급영의 탄생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최소한 저급 타락종성(墮落種性)의 잡령(雜靈)의 츨현은 봉쇄하여야 하겠다는 결론이 나온다.
 오늘날 우리 인간계가 퇴폐 혼란 분쟁의 물결이 멈출 날이 없는 것은 교육이나 사회제도의 책임만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이 땅에 저속한 타락종성의 영이 대량 인간 복을 입고 침입하여 횡행천지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이 땅에 고급 성령을 수생케 하겠으며 내지 저급영의 침입을 봉쇄할 것인가.
 우리는 원래 형상과 감각이나 기기(機器)에 의한 측정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만 믿어왔고 또한 그것이 과학하는 태도라고 훈련되어 왔으므로 지금 졸지에 현상을 넘어선 영(靈)을 말할 때 먼저 거부(拒否)가 앞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독자 중에는 아마도 이런 분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 영아(靈我)가 실지 존재하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설명이 된다거나 이해가 안된다거나에 아랑곳 없이 현실은 엄연한 현실인데야 어쩌겠는가.
 우리는 현상에 사로잡혀 물질변의 포로가 되어 있다. 당초에 말한 바이지만 우리의 인식이란 실상(實相)은 인식 못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 속에 넣어 인식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한 인식의 틀 밖의 것이다.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시공(時空)의 인식 틀에 넣어 해석한다 하더라도 시공 이전의 실상에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