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나의 수신(修身)방편

부처님 그늘에 살며 /묘법(猫法)의 화가 박서보

2007-05-22     관리자

  어쩌다 그림 그리는 재주를 갖고 태어나 그 재주로 수신(修身)하며 살아간다는 묘법의 화가 박서보 (61세)씨는 1960년대 말 수덕사 견성암에서 일엽 스님을 만난다.  자신이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셨던지 일엽 스님은 이런 저런 말씀을 들려 주셨다.  그러면서 "당신이 좋은 예술가가 되려면 부처님앞에 정성을 들이고 불공을 드리라"고하셨다.

  "스님, 부처상은 우상이 아닙니까, 왜 부처상을 만들어 놓고 부르고 그 앞에서 예배합니까."  꽤나 호전적인 청년이었던 박서보 씨는 스님 앞에서 대뜸 그렇게 말했다.

  "부처님을 부르기 싫으면 당신의 이름이라도 '박서보 박서보 박서보 .......'하고 반복해 부르라.  그것도 싫으면 당신이 좋아하는 예쁜조약돌이라도 가져다 놓고 거기에다 당신을 집중하라.   그러나 당신은 몇 번하다가 다른 생각을 하게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자꾸 반복하라.  그리고 마침내 부처와 만나게 될것이다."

  "그렇다면 스님은 부처님을 만나셨습니까" 하자 스님은 "나는 지금이라도 만나고 싶으면 금방만난다"고했다."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는 자신의 말에 "만나고 보니 그것이 바로 나더라."  

  그순간 '꽝' 하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그때의 충격은 그 자신의 머리속에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까지 생각해 온 '나' 는 과연 무엇인가'

  그이후 박서보 씨는 자신의 인생을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그림에 있어서도 수없는 반복을 계속했다.  선을 긋고 지우고  또 긋고 지우고 ….  그러나 그것이 선을 좀 더 잘 긋기 위한 것은아니다.  결국 그것은 반복구조를 통해서 자신을 비워가는 과정일 뿐이었다.  이렇게 반복에 반복을 계속하다보면 궁극에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게 반복에 반복을 계속하고있다.  그 반복의 동작은 결국자신의 신체적인 리듬과 하나가 되어 반복구조를 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자신의 행위의 흔적일뿐 작품의 이미지(image)가 없다.  그리고 단 하나도 완성된작품은없다.  그가 그린 그림은 다만 완성을 위한 과장일뿐이다.

  소위 화가라는 말을 제일듣기 삻어하는 박서보씨. 

  그는 "그림을 그리되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다" 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이고 다닌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는 목적이 있을 수 없으며, 다만 그 행위자체가 목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수신(修身)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릴 뿐이다.  왜냐하면 그가 가장 잘 할 수있는것이 그림이기때문에.   사람들은 '왜 지루하게 똑같은 것을 자꾸 반복하느냐.'  는 말들을 하지만 '안다는 것과 아는것이 자신이 되는 것' 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는 '나' 라는 그릇을 비워야하며, 깨끗이 비워진 그 공(空)의 상태가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자신화시키고 또 객관화시키는 방법으로 그림 그리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저의 그림은 탈(脫)이미지, 탈주관, 탈논리, 탈표현, 나아가 탈아(脫我)를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나를비우고 나서 돌을 만나면 돌이되고 나무를 만나면 나무가되고 꽃을만나면 꽃이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물아일체(物我一體), 물심일여(物心一如)에 이르는 동양 미학(美學) 의 본령이 아닐까 합니다.  만번 십만 번 독경을 통해 마침내 해탈에 이르는 선(禪)의 경지와 일치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인지  그가 그려내는 묘법(猫法)시리즈는 지극히 동양적이며 불교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생각이 그대로 투영된 까닭이리라.  우리나라 현대미술운동에 있어서 자타가 공인하는 선두주자의 한사람인 그는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현대회화를 앞장서 왔을 뿐만 아니라 그 회화를 국제적인 전망위에서 정립시킨 장본인이다.

  1956연 '반국전(反國殿) 선언' 으로 고등학교 미술교사의 자리에서 조차 쫓겨난 그였지만, 과감한 기법을 작품에 끌어들인 그는 흔히 추상운동의 선구자라고들 일컫는다.  고정적인 틀과 천편일률적인 것을 배제,단순한 아름다움을 찾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옛날 조정에서 중국의 화가 한 사람을 초청하여 병풍 하나 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찟고 또 그리고 찟고하기를 거듭하더니 마침내는 한일[一]자 하나를 긋고는 기가빠져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왕이 자다보니 그 병풍에서 물흐르는 소리가 졸졸 흐르더라는 것입니다.  옛선비들이 사군자를 그리되 그것을 잘 그려보겠다든가 화가가 되고자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닙니다.  수없는 반복구조속에서 자신을 잊고 비움으로써 자신을 맑히는 것이지요."

  옛 선비들이 수양을 위해 난(蘭)을 쳤듯이 그는 수신(修身)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 을 비워 궁극적으로 맑게 걸러낸 진정한 자신을 만나가고 있는 박서보씨.

  그는 유년시절 새벽예불과 백일기도 천일기도 삼천배, 만배, 그리고 뉘를 일일 이 골라 내고 공양미를 불전에 올릴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안성의 석남사 청룡사와 칠장사 일주문을 오르내렸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믿음대로 세계사에 남을 아들이 되었다.

  1950년 홍익대 미대에 입학, 자신이 어쩌다 미대에 들어가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그것은 지금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김은호 화백의 '미인도' 를 보고 장난삼아 모사했을 때 "똑같이 그렸다."  며 칭찬을 받았던것 이외에는 데생조차도 제대로 공부해보지 못했기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1963년  '파리 비엔날' 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는 작가 5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 그 후 숱한 국제전에 작품을 내고 세계 미술계가 자신의 작품을 보내달라고 연이어 청해올정도가 되었다.  한번 마음먹은 일이면 반드시 해야하고 할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는 그 이기에, 그리고 고정된 틀을 가장 싫어하는 그 이기에 반국전선언을 하며 추상미술을 시작하기도 하고,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홍익대에서쫓겨나기도했다.

  홍익대에서 쫓겨난 3년간 그는 서양화법만 따를 수 없다는 자각과 함께 동양의 지혜를 서양화에 접목시킨다는 절실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양의 고전에 파묻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께달은 것은 그동안 자신이 자신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그림을 그리되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뇌고 다니는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지금도 수신 (修身)의 한 방편으로 삼고 있다.

  그림 그리는 것으로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맑혀가고 있는것이다.

● 1954년 홍익대학 미술학부 서양화과졸업 .

● 세계 청년화가 파리대회 합동전 1위상(1961년)과 제2회중앙문화대상, 제11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상) 국민훈장 석류장, 그리고 제1회 예총예술문화대상을 받기도 한 박서보 씨는 20여회에 걸친 개인전과 그 수를 헤아릴수없이 많은 단체전을 국내외에서 거졌으며, 얼마전에는 영국 리버풀 테이트 미술관에서 '자연과함께' 라는 주제로 한국 현대미술에 도사린 전통정신을 내보이는 전시회를 통해 그의 작품성이 지극히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동시에 세계적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묘법(猫法) 시리즈를 계속 창출해내고 있는 그는 한국 현대추상미술의 대부 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