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 일깨운 원각사지(圓覺寺趾)

2009-06-13     관리자

 

삼척 동자에서 팔십 할아버지까지 파고다공원이 어떤 곳인지는 잘 알면서 「파고다」가 무슨 뜻이냐?물으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파고다(Pagoda)란 미얀마지방에서 탑파(불탑)를 부르던 말이다. 그런데 그 원래는 뜻을 서양사람들이 자기네 편리한 대로 바꾸어 「동양의 불탑」을 뜻하는 말로 사용해 왔다. 서울 종로2가 38번지 일대를 파고다공원으로 이름 붙인 것도 다 그런 연유가 있다.

맨처음 이곳에 공원을 만들자고 건의하고 또 그 뜻을 이루고 이름까지 붙인 사람은 브라운이라는 영국이이였다.

그는 구한말 재무행정을 담당했던 탁자부에서 초빈한 사람으로 총세무사(總稅務司)의 직함까지 가졌었다. 브라운에 의해 1897년에 조성된 이 공원은 1889년에 이룩된 인천의 자유공원에 뒤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생긴 공원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공원자리에는 애초 흥복사(興福寺)라는 고려시대 사찰이었다. 그러나 그 좋은 이름과는 달리 일찍 폐사되어 그 넓은 터는 잡초로 우거진 채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조선조에 이르러 세조가 그곳에다 다시 원각사(圓覺寺)를 창건(1464)하였다. 본당인 대광명전(大光名殿)대장경을 보관하는 해장전(海藏殿), 승려들이 기거하는 승당(僧堂), 법종을 안치한 법뇌각(法雷閣) 등을 짓고 동쪽에는 연못, 서쪽에는 커다란 꽃밭을 꾸며 철철이 새로운 꽃들이 시새워 피게 했다.

다시 유림(儒林)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조가 서울 한복판에다 이토록 화려하고 웅장한 사찰을 창건하게 된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세조는 원인모를 괴질, 피부병을 얻어 괴로워했다. 그 괴질은 조카인 단종과 많은 충신을 죽인 죄업 때문에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죄업을 참회하고자 전국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참회기도를 하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오대산 상원사 입구 골짜기에서 시신(侍臣)을 물리치고 혼자 목욕을 하던 중, 때마침 귀엽게 생긴 어린 동자가 물가에서 놀고 있었다. 괴질로 가렵고 진물린 등을 동자에게 문질러 달라고 명하였다. 대왕은 등 문지르는 동자에게 「너는 누구에게도 상감의 등을 문지렀다고 말하지 말라.」하고 말하자 「상감마마께서는 문수동자를 친견했다고 말하지마십시오.」라고 대꾸했다. 뒤돌아보니 동자는 간 곳이 없고 괴질은 씻은듯이 나아버렸다. 세조는 환희심에 어쩔줄 몰랐고, 또 부처님의 은혜에 꼭 감으리라 마음깊이 다짐했다.

환궁하자 곧 「사대문 안에다 절을 지어도 무방하며, 따라서 승려들도 출입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는 포교령을 전국에 내렸다.

이에 과격한 상소로 반대하는 유사(儒士)들은 가차없이 삼수갑산 ․ 진도 ․ 제주도 등지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원각사를 신축하도록 명하고 또 완공되는 날까지 왕은 하루도 빠짐없이 천수경을 매일 1번씩 암송했다. 13층의 석탑이 완공되기까지는 무려 20년의 세월이 걸렸고 이 거대한 사찰의 완공을 모든 백성들이 기뻐했다. 선량한 백성들로서는 부처님을 가까이 받들어 모실 수 있는 성스런 곳이 마련됐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반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루어진 원각사이건만 40년 후인 연산군 10년 (1504)에는 폐사되고 말았다. 유생들의 끈질긴 배불운동과 또 연산군의 적극적인 철폐에 그 까닭이 있었다. 그 거대한 원각사 법종도 폐기된 채였다가 숭례문(현 남대문)으로, 숭례문에서 다시 보신각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야의 종소리가 되어 기구한 운명을 호소하는 듯 전국 방방곡곡에 덩-덩-울어댄다. 지금은 대용품에 그 자리마저 넘겨 주었지만…….

13층 석탑과 원각사 사적비만 덩그렇게 남아있는 잡초 우거진 폐사지에 뭇 사람들의 휴식과 유락을 위한 공원을 세우자고 제의한, 기독교사상이 뼈에 박힌 서양인 브라운씨의 발상은 당연하다고 보겠다. 허지만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응당 원각사를 옛날과 같이 복원하여 국민들의 정신적 귀의처가 되었어야만 했다. 또 불탑(佛塔)이 있는 공원이니까 파고다공원이어야 한다는 그의 제안을 생각없이 받아들인 것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이름이다. 우리에게는 원각공원이나 탑골공원이라 부르는 편이 훨씬 더 친밀감있는 이름이며, 또 그렇게 불리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이곳이야말로 민족혼이 어린 원각사지이며, 우리겨레에게 둘도 없는 3.1운동의 진원지(震源地)인 성지이기에 외래어를 사용 지금까지는 그 이름을 불러오고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수치이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말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