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밝히는 등불들] 연극 연출가 손진책

보현행원으로 이루어낼 불국(佛國)의 모습

2007-05-21     황찬익

보현행원으로 이루어낼 불국(佛國)의 모습

 

지난 4월2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이날 공연 연출을 맡은 손진책 씨는 그 나름의 엄숙한 ‘보현행’을 오백명에 이르는 합창단원의 거룩하고 장엄한 촛불행진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여린 조명빛이 서서히 무대를 열면 전통의 국악기가 가지런히 놓인 사이사이로 한복차림의 오십여 관현악단원들이 이제부터 시작될 대장엄, 대행원의 일성(一聲)을 고요한 선율에 실어 어두운 객석으로 띄워 보낸다. 언제부터 준비하고 있었는지 그곳에는 연두빛 치마 저고리의 청신녀들이 손마다 촛불을 들고 물이 흐르는 듯한 걸음을 옮기며 ‘나무 삼계대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하고 보현행원의 서곡을 퍼뜨려 나간다. 무대 뒤편에서도 웅장한 청신남들의 목소리가 먼먼 고개를 넘어 이 대장엄의 장소에 이제 이르른 듯한 위엄있는 행렬로 입장한다. 합창단 전원이 무대에 들어 서면 한층 밝고 고운 조명이 환희심에 겨워 노래하는 무대 전체를 넉넉하게 비쳐준다. 이때부터 1시간 40분 동안, 객석의 선남자 선여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화장세계, 부처님의 자비가 충만한 음율 속으로 동화되어 들어가는 자신을 느낀다. 아니 자신마저도 잊어버린다.

이 대공연에 임한 연출자의 소감은 근 두어달을 빠짐없이 연습에 임해준 합창단원들에 대한 칭찬으로 돌려졌다.

“음악회이니만큼 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무래도 주가 되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은 그 소리의 시각화 작업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무엇인가 보여준다는 것은 그만큼 돈이 드는 작업입니다. 충분히 제작여건이 갖추어지진 않았습니다. 음향판도 없이 공연을 했으니까요, 그런 점이 힘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무를 맡은 국수호씨나 내가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광사 신도 여러분과 500명에 이르는 합창단의 열의 때문이었습니다. 각자 생업이 있을텐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나와서 성심껏 연습하는데 우리도 대단히 감동을 받았고 우리가 더 열심히 해서 보완하고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은 서로의 불심이 잘 조화되어서 공연이 만족한 결과로 나타났고 성공적인 공연이라 칭찬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들 음악회라 하면 정적이고 정형화된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만 받아들인다. 손진책 씨는 그걸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공연에 임했다고 말한다. 합창단의 노래 뿐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증폭시켜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서 합창단의 동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연등을 이용한다거나 무용을 도입했다고 한다.

이러한 의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거의 작품마다에 무르녹아 있는 우리 민족 전통극에로의 추구 정신과 더불어 이번 공연의 내용성을 고려했던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실천적 불교정신을 노래하는 이 공연에서는 당연히 무대조차 동적이고 변화가 다양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는 마음의 움직임이 곧 실천이라는 생각이다. 객석에서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 몰두하여 노래와 가사의 전달과 함께, 보여지는 동작과 변화로도 보현행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태껏 연출한 작품이 몇 편이나 되느냐는 질문에 실풋 웃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말하는 손진책 씨의 웃음 속엔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연륜이 보인다. 처음 연극에 입문한 서라벌예대 연극과 시절 그는 그 시대 예술가 지망생이면 누구나 그랬듯이 설익은 서구화 바람에 물들어 셰익스피어와 아서밀러에 미치고 서구의 사실주의 극과 교조적인 고전극에 자신의 틀을 정해 연극을 시작한다. 하지만 곧 고쳐 생각한 것이 「세일즈맨의 죽음」을 미국사람보다 잘 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셰익스피어를 영국사람들보다 잘 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은 그 머리 속에서 점차 확대되어 가기만 했다.

이 때가 70년대 초반이었다. 3-4년 간을 전국을 돌며 보고 배운 우리가락, 우리 춤에 대한 지식은 81년부터 시작된 MBC 마당놀이나 이후 그의 작품에서 적절하고 훌륭하게 활용되었다. 집계해본 그의 연출 횟수는 70여편, 이극들은 거의 모두가 가무가주가 되는 우리 전통극이었다.

전통극의 형식은 가무(歌舞)가 함께 이루어지는 종합예술의 색채를 띠지만 그 속에 흐르는 내용적 측면이자 정신을 그는 '마당정신'이라 말한다. 여기서의 마당은 멍석 깔아 놓고 북치는 마당이 아니다. 시간적으로는 지금, 공간적으로는 여기 이 자리, 정신 적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마당정신'이다.

그는 이렇게 끊임없이 공부하고 자기의 일에 매진함으로써 나름대로 우리 연극계의 한줄기 맥을 형성하기에 이르른다. 그것은 또한 앞서 말한 동료들과의 관계 속에선 하나의 학풍으로 우리 예술계에 뿌리내리고 있기도 하다.

우리 것의 특수성. 이 우리 것의 특수성. 이 우리 것의 특수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여러 민족 여러 나라마다의 문화예술 양식 중에서 한국적인 것이 마음에 들어 그 것만 골라 선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숙명적으로 예술가에게 이 땅의 모든 걸 이해하고 사랑하게 하는 것. 그 것이 '우리'라는 특수성이 아닐까!

작고하신 어머님을 '대단한 불자'였다고 소개하는 손진책 씨는 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자신도 불자라 자신있게 얘기한다. 그래서 자신이 이번의 「보현 행원송」을 맡은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스런 일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의 '우리 것'에 대한 끝 없는 탐닉은 처음부터 불교나 이번의 공연에 맞닥뜨려질 운명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활불교'그는, 불교는 생활 속에서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행활동이어야 된다고 말한다. 뚜렷한 의식을 통한 것은 아니지만 또, 일정하게 다니는 절이 있는 건 아니지만 누가 물어도 그는 자신을 불자라 대답한다. 그럴 수 있는 근거는 그가 보여주는 생활의 모습 곧, 연극을 통해 표현되고 나타난 한국적이고 만족적인 것들을 고수하고 발전시키려는 그의 몸짓 자체가 불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에 연루한다. 그의 이러한 생활불교의 성향이 「보현행원송」에 발현된 것은 거의 말대로 지극히 당연스런 일이 었다.

공연에 참가했던 김성녀 씨는 그의 아내다. 76년 '한네의 승천'에서 만나 결혼하여 이후로도 두사람 모두 연극계의 중심 무대에서 내려서지 않고 있다. 김성녀 씨는 남편의 성격을 ‘완벽한 사람’이란 한마디로 대답하였다. 생활에서는 피차가 완벽하지 못하지만 작품에 임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한다. 부부가 한 공연에서 남편은 연출자로 부인은 출연자로 나서는 이 즐거운 사건은 이 공연에서는 더 이상 낯선 것이 될 수 없었다. 많은 작품 속에서 그래왔기도 했지만 이 공연의 의미는 당연히 두사람이 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할 행사였기 때문이다.

공연은 두 사람 뿐 아닌 출연진과 객석의 원대한 합일(合一)을 이루었다. 대 단원으로 치닫을수록 열기를 더해 진정 세종문화회관 전체는 한 덩어리 혼연일체의 찬탄과 행원을 노래하고 있었다. 아득한 신라시대 또는 그보다 가까이 고려시대에 있어 전 국가적 행사가 이렇게 융성한 불교의 모습으로 기록 되었다던가. 환희심에 겨워 열광하는 관객들 너머로 손진책 씨의 눈에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진여 일체의 진실된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취재·정리 황찬익

 

연출가 손진책

1947년 경북 영주에서 출생.
             서라벌 예대 연극과 졸업.
1967 극단 「신하」연출부 입단.
1973 극단 「민예극장」창단 동인,
1980 영국 세익스피어 극단 연수.

사단법인 한국무용연구회 이사. 사단법인 한국연극협회 감사. 현재 극단 「미추」대표.

연출작품:
「판네의 승천」, 「비리더기」 , 「바리더기」「광대의 꿈」「돈키호테」등 70여 편.

그가 지금까지 연출해온 70여 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애정이 간다는 '오장군의 발톰' 한 장면. 제 25회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연출상, 희곡상을 석권한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