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간주의적인 치료법

권말기획 / 불교와 상담 4

2009-06-10     관리자

 흐름을 알아야

 회는 급격하게 변화를 거듭하고 우리도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동양권은 서양보다 변화가 덜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심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서양에서는 겪지 않아도 되었던 문제가 동양에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일예로 얼마전 일본의 잡지에서 나온 보고는 주목할 만하다. 일본학자와 독일학자의 공동연구의 결과였는데, 독일은 서양을 대표하고 일본은 동양문화권을 대표하는 식으로 하여, 급격하게 핵가족화되어 가는 현실에서 부모 자식관계를 비교, 조사 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만일 당신이 고도에 유배된다고 할 때 누구하고 가장 같이 가고 싶습니까?' 라는 질문이었다. 여기서 일본 아이들은 대답의 대상에 부모가 들어간 경우가 하나도 없었다. 이에 반해 독일은 4%의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있는 것을 택하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동양은 옛부터 부모에 대한 경로 · 효친사상이 지극하고, 반대로 서양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건조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 조사해 보니 반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1년에 떨어져 있는 부모를 평균 몇번이나 찾아가나? 하는 질문이다. 일본인의 평균치는 4번으로 내용은 명절때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독일은 1년에 25번 부모를 찾는다.

 이러한 이외의 결과에 조사한 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난감해 하다 이러한 결석을 내렸다.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점점 해당되는 범위가 커지는 것같아 요약해 보면,

 동양에서 평균 4번 부모를 찾는 경우는 주로 명절 때로, 평소에는 살림이 어렵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사서 들고가야 할 것같은 부담이 었어 들고 갈 것이 없으면 고민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4번 갈 것도 3번으로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서양은 무엇을 굳이 들고 가지 않는다. 따라서 부담이 없는 것이다.

 또한 서양인들이 부모를 자주 찾는 이유는, 서양 아이들은 부모를 가장 가까운 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남이지만 남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남이라고 생각한다. 가까운 남 즉 가장 친한 친구이다. 부모 앞에서는 허물없이 얘기할 수 있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얘기할 수도 있다. 그곳을 찾으면 마음이 푹 놓이기에 자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을 비롯한 동양은 그렇지 않다. 대화가 없다. 어른께 큰절하고 나면 너희는 너희들끼리 가서 이야기해라 하고 내쫓는다. 그리고 한방에 있어 봤자 이야기할 거리도 없다. 특수한 틀에 맞춰진 인간관계에 속박되어 연결은 되어 있으나 명분상 뿐이지 실질적으로  못한 것이다.

 이는 농경사회라는 대가족중심의 생활속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동양의 관습과 현대 산업사회의 도래과정에서 오는 갈등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전통과 현실이 부드럽게 이어지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중심의 따스함과 산업사회라는 흐름 어떠한 것도 무시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최근에는 서양에서 오히려 동양의 가족중심의 인간문화를 생산적인 측면에 수용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앞으로 이 양자를 어떻게 결합하고 발전시켜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 민속촌에 살고있는 대가족사진
 1차적이고 원초적인 집단, 가족

 농경사회 속에서 형성된 대가족사회는 인간들의 1차적이고 원초적인 집단이었다. 가족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심이 풀려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는 우열(優劣)이 없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이기고 싶다는 경쟁의식도,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나 질투가 없는, 마음이 풀려서 하등의 장애가 없는 것이 가족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향의 가족을 떠나 타향살이를 해야 할 때 집을 떠나기가 몹시 싫은 것을 경험하게 된다. 왜, 가정을 떠나서는 24시간 긴장 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출을 한 소년이 무허가 하숙집에서 잘 때는 야뇨증처럼 반드시 오줌을 싼다고 한다. 이를 퇴행현상이라고 한다. 어릴 때 부모에게 관심을 끌려는 아이들이 야뇨증 증세를 보이듯이 그 버릇이 나타나는 것이다. 긴장된 바깥세상에나와 옛날처럼 긴장을 풀고 쫓기지 않는 장소를 그리워 하는 마음이 야뇨증으로 표출된 것이다. 오랫동안 타행살이를 하다가 고향에 돌아가 가족을 만났을 때의 흥분은 집을 떠나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러한 집단을 우리는 '원초적인 집단' 또는 '1차집단'이라고 한다.

  아직 우리 주변에는 이런 1차적인 집단이 남아 있지만, 미국이나 일본, 독일 같은 경우는 거의 사라져 가고 없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어떤 한국인 가정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들 냉장고가 따로 있고 어머니 냉장고 따로 있어 서로의 냉장고 문을 함부로 열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삭막한 집단 속에서 어떻게 사나 하겠지만 그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미국 사람들은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는 가족, 1차적 집단에서 살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사교모임을 얼마나 원하는지 모른다. 

 마음을 풀어놓고 쉬기를 원하지만 휴식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 기껏해봐야 골프를 치거나 레크레이션을 즐기는 것인데, 그것을 통해서는 정말 남모르게 풀어놓고 쉬고 싶다는 마음 한구석의 긴장된 부분을 해소시켜 주지 못한다. 진정한 휴식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내놓은 방법이 요사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M.T이다. Membership Training 또는 Sensitive Training (감수성 훈련)이 라고 한다.

 그러나 서양인들이 의도한 M.T 와 우리 대학생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M.T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 학생들을 보면 'M.T 간다'는 것을 대성리나 어디 가서 남녀학생들이 모여 기타치고 술마시면서 저녁 내내 피곤하게 놀고 돌아 오는 것으로 잘못알고 있는 것같다. 이는 M.T 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것이다.

 미국인들의 M.T를 보자. 그네들은 마음에 온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생산인들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마음의 휴식을, 자양분을 공급해 주기 위하여 회사에서 일부러 훈련을 시킨다. 진정한 휴식을 할 공간인 1차집단이 없기 때문에 일정기간 동안 대가족집단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집에 들어와 가족간에는 내가 벼슬을 했건 돈이 많건 지식이 많건 소용이 없듯이, 그렇게 서로 따지지 않고 바라지 않는 관계가 성립하는 잡단을 만들고자 의도한 것이 M.T였던 것이다.

 여러 사람이 한 공간 안에 빙 둘러 앉는다. 방은 어두컴컴하게 해놓고 정 가운데에서 촛불을 켠다. 촛불을 켜는 것은 잊혀진 고향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것이다. 거기서 지도자의 말에 따라 서로서로 손을 잡는다. 손을 잡는 것은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피부와 피부 사이의 감촉을 통해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것이라 한다. 인간의 체온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온 탓이다. 촛불 하나 밝혀놓은 어둠속에서 침묵하며 체온을 교류하고는 서로가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털어놓는다. 이것이 감수성 훈련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훈련이 서서히 유행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고 있기도 한다. 감수성 훈련의 유행이 뜻하는 것은, 우리나라도 '1차적 집단' 즉 과거 대가족사회에서 가질 수 있었던 마음을 100%풀수 있는 집단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가족의 바탕은 농경사회

 대가족사회일 때는 마음이 탁 풀려버린다. 앞서 인간주위적인 치료법에서처럼 상담자와 비상담자가 따로 없다. 모두가 다 상담자인 동시에 비상담자인 것이다. 누구를 일부러 찾아가 카운셀링 받을 필요가 없다. 할아버지가 내 거울이고 부모가 내 거울이고 형제가 내거울이기에 상담할 필요없이 어느새 마음의 치료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이렇듯 인간적인 사회가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서는 안되지 않느냐고 하여 지금 대가족 사회를 재생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사회를 산업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되돌려 놓자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농경사회에서는 대가족을 이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족은 아버지를 대들보로 하여 모두가 다 생산하는 집단이었다. 그때는 노동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기 때문에 많은 손이 필요했다. 따라서 모두 한곳에 모여서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여건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 등이 대대로 그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동네의 기후도, 지질상태도 잘 알기때문에 무엇을 심으면 무엇이 잘되는지도 잘 안다. 그렇게 익숙한 토지에서 가족들이 자급자족하는 생산형태를 이루었으니 대가족이 필요했고, 그것의 모순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는 그럴 수가 없다. 직장을 따라서 서울에서 살다가 광주로도 가야 하고, 머나먼 타국 리비아로 가는 수도 있다. 이동이 심하기때문에 단촐할 필요가 있다. 대가족일 때는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현대의 산업사회는 싫다. 농경사회로 돌아가자. 그러면 목가적이고 모든 것이 대가족적인 안정속에서 살수 있으니 얼마나 편하겠는가? 공기도 좋고 교통사고도 없고'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그렇게 되면 자식들 교육에 문제가 있다. 또한 지금은 의학이 발달되었지만 1920년대만 해도 평균수명이 33살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어린애를 낳아도 많이 죽었는데(게다가 남아의 사망율이 여아보다 높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산업사회의 덕택이다. 산업의 발달로 인한 혜택을 무시할 수 없으며 그 모든 것을 다 무시하고 공기좋고 목가적인 농경사회로 되돌아 갈 때의 국제적인 위치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는 이왕이면 산업사회로서 고도로 발전해야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가족사회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예전과 같이 대가족적인 따듯한 가정을 건설할 수 없을까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무조건 옛날 것이 좋으니 그대로 여기에 옮겨놓자는 주장은 현실적인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것일 수 없다.

 그러나 현재는 과도기적 상황이기에 인정적이던 1차적 집단이 무너져감에 따라 각종 마음의 병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 나고 있다. 그래서 M.T나 감수성훈련과같은 것이 유행하는데, 굳이 그런 식의 방법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갖고 있는 최소한의 대가족적인 생활바탕을 모양만 달리 해서 현대에 되살릴 수 있다면 그러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생명은 변화에 있다.

  현대사회에 1차집단의 인정을 받아들이자고 했는데, 집을 지을 때도 터와 재료뿐만이 아니라 집을 짓는 원리가 있어야 하듯이, 현대생활의 원리 하나를 들어 보자.

 제일 먼저 우리는 '현재 지금 여기의 나'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예를들면 우리는 전통을 부르짖으며 옛 것이란 지나간 것으로서 여기에는 두가지가 있다. 즉 이미 지나간 것으로서 오늘의 내 생활에 뜻이 있는 과거가 있고, 오늘의 내 생활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과거가 있다.

 여기서 현재의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과거는 죽은 과거이고, 지금의 나에게 뜻이 있는 것은 살아있는 과거이다. 지나간 것이라 하여 모두 의미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과거에도 의미있는 과거와 죽은 과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미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령 내가 훌륭하게 살아야겠다고 계획하고 꼭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의 장래와, 항상 불안하고 근심스런 마음으로 맞이하는 미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려는 사람의 마음이 불안하면, 그때 그 사람의 미래는 불안한 것이다. 이에 반해 어떠한 일이 닥쳐도 용기를 갖고 의지를 굳히는 사람의 장래는 밝다. 시간이 즐거운 것이다.

 살아있는 과거와 희망찬 미래만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 그때의 '나'를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라는 말속의 생명은 바로 이러한 생명을 말한다.

 그러면 어떠한 것을 생명이라 하는가? 변하는 것을 이른다. 즉 시간이 있는 것이다. 썩지도 상하지도 않는 것에는 시간이 없다. 변해야 시간이 있는 것이고 변해야 살아있는 것이다. 변하는 것은 과거 · 현재 · 미래가 유동하는 것이다. 늙은 사람보고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하면 좋아한다. 그러나 좋아할 것 없다. 그 말은 죽은 동상과 같다는 뜻이다. 세월이 흐르며 늙는 것은 당연한데 예전 그대로라니 생명이 없다는 말 아닌가.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동양은 역사가 없다'고 말했다. 그의 눈에 비친 동양은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서양은 시대구분을 해가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가늠하는데 동양은 예나 지금이나 별다른 변화가 없이 보였던 것이다. 변화가 없음은 역사가 없음이요, 시간이 없다는 말이며 결국 생명이 없다는 뜻이다.

 죽은 과거가 오늘의 나이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헤겔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지금의 내가 아니며 따라서 불안하고 결국 진정한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佛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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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불교 카운셀링의 기초이론에 대한 김병옥 박사님의 강의 내용을 편집부에서 녹음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