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외가] 두두(頭頭) 진시(盡是) 오가물(吾家物)

2009-06-09     경봉 스님

여기 겁(怯) 밖의 세계가 있다. 이곳이 생명의 벌판, 생명의 꽃은 만발한다. 생명의 노래 -이것이 겁외가이다. 한국 불교 전통(傳統)을 관류(貫流)하는 산맥(山脈), 그 중 웅봉(雄峰)이신 경봉(鏡峰) 노화상(老和尙)은 오늘도 광명의 법천(法泉)을 끊임없이 흘러내신다. 이번에 노화상(老和尙)은 자비법어(慈悲法語) 수편을 본지(本誌)에 주셨다. 회우(會友)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며 수회로 나누어 게재한다. -編輯部-

두두(頭頭) 진시(盡是) 오가물(吾家物)

천진자(天眞者)

푸른 대 누른 꽃이 별다른 경계가 아니요.
흰 구름 흐르는 물에 天眞을 들어내네.
이 모두 우리의 수용하는 물건이니
마음대로 집어 쓰는데 걸림이 없네.
(翠竹黃花非外境 白雲流水天眞 頭頭盡是吾家物 信手?來不是?)

광명이 생명이며 道다
불교를 신앙하자면 부처님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아미타불 감로왕여래 미륵 부처님 등 불가설 불가설(不可說 不可說)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이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에까지 계시는데 이 사바세계의 교주는 석가여래님이시다.
그런데 진리적으로 볼 때에는 마음이 청정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인데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에 불과하고 청정한 마음 그 자리가 곧 부처다.
우리가 알아야할 불법은 팔만사천의 법문이 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법문이 우리들 진리의 눈을 열게 하고 있는데 단적으로 이 법이 무엇인가 말한다면 그것은 마음의 광명 스러움이 법인 것이다. 이 말을 추상적으로 받아드리면 안된다. 실제로 마음의 광명 스러움이 불법인 것이다.
비구, 비구니, 등 스님들을 「僧」이라고 하는데 마음이 맑고 청정하고 광명스러워서 어디 든지 걸림 없는 것을 「승」이라 하기도 하고 「道」라고 하기도 한다. 도는 우리가 알려고 하는 그 자리이자 우리의 생명이다. 우리가 도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곧 자기의 생명을 구하려 하는 것이다.
불, 법, 승, 삼보(三寶)를 진리적으로 표현하고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단적으로 격외(格外)로 보자면 벼가 부처요, 보리가 법이요, 콩이 승이다. 이 말은 좀 어려운 말이다. 이 말에는 해석을 붙이지 않는다. 이 도리는 도를 깨달을 때 알 수 있는 것이다.

참 자기(自己)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에게 돌려 줄 수 있는 것은 자연히 네가 아니지만 졸려 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네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제가환자(諸可還者) 자연비여 불여환자 비여이수(自然非汝不汝還者 非汝而誰)하셨다.
우리가 집이나 옷, 패물, 등을 남에게 줄 수 있다. 또 몸과 오장육부를 남에게 줄 수 있겠지만 남에게 줄 수 없는 물건이 하나 있으니 이것이 네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말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이 말씀을 하여 주셨는데 이 말씀이야말로 귀를 뚫고 말해 주듯 일러 준말이다.
이 자리를 찾아야 한다. 이 자리, 참으로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자기에게 있는 이 자리를 찾아야 한다.
눈썹과 눈거풀이 가장 친하고
콧구명과 입술이 그 중 가깝네.
아주 친하면서 어찌 서로 보지 못하나
이 모두 한 몸 이로세.
오늘은 일곱 내일은 여덟.
이렇게 알았다 하면
옛 사람의 뜻을 저버리는 것일세.
미모안최상친(眉毛眼最相親) 비공순피작근린(鼻孔脣皮作近隣) 지근인하불상견(至近因何不相見) 도연일체시전신(都緣一體是全身) 금일칠래일팔(今日七來日八) 여시인득법(如是認得去) 매몰고인심(埋沒古人心)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데 거리낌이 없고
소리, 향기, 맛, 촉감 등은 늘 삼미(三味)로다.
마치 새가 공중을 나는 것과 같아서
취(取)함과 버림, 사랑과 미움이 모두 떠났테.
이렇게 본래 무심(無心)한 경지에 이르면 비로소 「관자재보살」이라네.

견문각지무장애(繭門覺知無障碍) 성향미촉상삼미(聲香味觸常三味) 여조공중??비(如鳥空中??飛) 무취무사무증애(無取無捨無憎愛) 약회응처본무심(若會應處本無心) 시득명위관자재(始得名爲觀自在)

도(道)를 구하는 자

예전에 「운문문?(雲門文?)」선사가 있었다. ?주 진 존숙(陳尊宿)이라는 고매한 선사를 찾아갔다. 도를 묻기 위해서다. 목주는 운문이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갔다. 운문이 문을 두드리니 방에서 선사가 소리쳤다.
『누구나?』
『예, 문언이 올시다.』
『무엇하러 왔느냐?』
『자기 일을 밝히지 못해서 스님의 지시를 받으러 왔습니다.』
목주는 문을 열고 운문에게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는 도로 문을 걸어 잠갔다. 이것이 참 재미 있는 일이다. 자기의 일을 밝히러 왔다니까 운문에게 전부를 드러내 보여 준 것이다.
조금 있다가 운문이 또 문을 두드리니
『누구나?』
『문언이 올시다.』
『무엇하러 왔느냐?』
『자기 일을 밝히지 못해서 스님의 지시를 받으러 왔습니다.』
이렇게 묻고 답하기를 하루 종일 하였다. 그 이튿날도 아침부터 목주에게 가서 문을 두들기니 누구냐? 문언이 올시다… 로 시작해서 어제와 똑같은 문답을 하루 종일 반복하였다. 무엇 때문에 자꾸 되풀이 하였겠는가? 능히 묻고 답하는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문언이 묻는 말을 몰라서 자꾸만 같은 말을 되풀이 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가 누구에게나 분명히 있건만 실로 깜깜하게 어두우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목주가 하루 종일 그렇게 문답을 되풀이하는 것도 운문에게 능히 답을 할 수 있는 그 자리를 밝혀주기 위한 자비에서다. 사흘째 되던 날도 전날과 똑같은 문답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목주가 문득 문을 왈칵 열고 나와서 운문의 멱살을 꽉 움켜 잡고는
『일러라. 어서 일러 봐!』
이 소식을 한번 말해 봐라. 이 말이다. 운문이 머뭇거리니,
『예이 도락찬(??讚)같은 놈아!』
하고 왈칵 밀어 버렸다. 말하자마자 바로 알아야지 어름어름하면 귀신 굴에 들어간다.
운문이 요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하니 왈칵 밀어 버리면서 도락찬 같은 놈이라 하였는데 이 도락찬이라는 말은 진시왕이 만리장성을 쌓을 당시 돌을 운반하는 수레를 만들 때 쓰던 송곳을 말한 것이다. 그 큰 송곳이 이제 녹이 나서 아무짝에도 못쓰게 되었다. 사흘 동안이나 가쳐 주어도 모르는 운문이 마치 쓸모 없는 도락찬과 같다는 말이다. 목주가 운문을 밀어버리고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운문은 다시 한쪽 발을 문안으로 들여 놓았다. 순간 문은 힘껏 닫혔다. 문이 콱 닫히는 바람에 다리뼈가 부러졌다. 그 순간 운문은 도를 깨달았다.

죽음을 무릅쓰고 수행하는 운수객(雲水客)이여,
굳게 본래 마음 깨닫기를 구하는도다.
뱀의 발을 그러자니 피곤할 뿐 아니라
청산 녹수 깊음 마저 저버리네.
저사요행운수객(抵死要行雲水客) 강연구오본구심(鋼然求梧本求心) 위사화족노근골(爲蛇畵足勞筋骨 ?부청산녹수심(?負靑山綠水深)
할(喝) 一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