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종교시대의 불교

에세이 동불서불(東佛西佛)

2009-06-08     관리자
불교의 무게와 서구화
책속에 묻혀 지내다 보면 가끔 현실 감각이 둔해질 때가 있다.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마치 타임머신처럼 멋대로 고대여행을 즐기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멋있는 사람이 있던 때, 신나는 시대를 동경하는 것은 인지상정일런지도 모른다. 나는 신라라는 시대를 퍽 좋아한다. 가장 어려웠던 시대 분위기를 역동적(力動的) 역사로 바꾸었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실현시켰기 때문이다. 그 사상의 핵심에 불교가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그것과 비교해 보면 오늘의 시대는 너무도 많은 이데올로기와 혼돈으로 점철되고 있지 않나하는 느낌이 든다. 그때는 아마 공(空) 한 마디면 교육이 되는 시대였기도 하다. 불교가 오늘날 그와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반드시 시대의 흐름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끝갈데를 알 수 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고마운 가르침을 자꾸 멀리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세미나에 나가보면 불교의 위상(位相)이 적절하게 느껴진다. 아직은 불교를 끼워주기는 한다. 그러나 늘 무슨무슨 교와 함께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때마다 늘 속이 편치 않다. 불교의 무게가 자꾸 평가절하하는 듯한 허전함을 지울 길이 없다. 싫던좋던 이제 우리는 다종교(多宗敎)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에게는 제자리가 있어야 한다. 쓸모없는 노인처럼 허탙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자기 할 일을 제대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직업이 불교 선생이니까 그렇겠지만 대학생들의 종교 선호(選好)를 따져 볼 때가 많다. 그런데 젊은이들의 종교 선택이 의외로 단순하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왜 믿느냐는 나의 질문에 대한 극단의 관념이거나, 아니면 어리벙벙한 관습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냥 어렸을 때부터 다녔으니까 분위기가 그럴 듯해서 친구의 권유로 등등이 각자 종교선택의 솔직한 동기이다. 뭔가 그 진실에 자신을 매몰시킨다는 자세가 아니라, 마치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듯 하는 것이다. 충동구매라는 용어가 있는 모양인데, 종교선택에도 그런 것이 많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요즈음의 세태(世態)가 온통 그런 방향으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종교의 선택도 점차 서구화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진실한 인간모습의 회복
그렇다면 불교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원론적(原論的)으로 말한다면 불교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한다. 스님들은 이 사회의 수범적(垂範的)존재가 되어야하며, 불교인 모두는 이 사회의 그늘진 곳을 지키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얼마전 일본 잡지에 실린 수필 한 토막. 어느 가난한 아주머니가 평생을 저축하여 알프스여행을 갔단다. 기대처럼 신기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말로만 듣던 구라파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팔리기도 하였단다. 잘 살지 못하니까 큰 선물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자식들 손자들 선물로 알프스경치가 들어있는 손수건 몇 장을 골랐다.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장사꾼에게 물었다 혹시 실밥이 터지지 않았을까요? 물론 장사군의 대답은 그럴리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 아주머니는 다시 물었다. 빨면 색깔이 바래지 않겠느냐고. 그때 이 손수건을 파는 행상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아주머니 이 물건은 스위스 제품입니다. 그러면서 이 아주머니는 그이 대답을 듣고 한없이 부끄러웠노라고 술회하고 있었다.
그 수필을 읽으면서 나는 나대로 한없이 부끄러웠다. 내 시야에는 ‘진짜 참기름’이라는 글자가 띄었기 때문이다. 어떤 혐의를 받았을 때, 나는 불교를 믿습니다라는 것이 대답이 되는 시대가 될 수는 없을까? 불교를 믿는다는 것이 보증 수표처럼 통용되는 그런 사회가 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할까?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세속적으로 말하면 손해보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영악스럽게 이재(利財)를 밝히고, 질세라 자기 선전을 하는 태도가 아니다. 어리숙하기도 하고, 대범하기도 하고, 그냥 덤덤한 듯이 보이는 삶이어야 한다. 그런데 남들처럼 같이 뛰고, 같이 긁어 모은데서야 불교적 양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이 무엇을 가르치려고 이 세상에 오셨는가? 또 무엇이 숱한 불교인들의 신행귀감이 되었던가? 그것은 다름 아닌 진실한 인간 모습의 회복이었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무상(無常)속에 무상하게 사라져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조차 장난감으로 여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불교적 예지여야 한다. 그때 비로소 꿈같은 삶의 유희들을 객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불교의 고집을…
불교의 현대화를 외치는 목소리들이 높아져 간다. 의시과 복장도 뜯어고치고, 현대를 계도(啓導)하기 위해서 과감한 포교계획을 수립해야한다는 여론도 있다. 물론 옳은 말이다. 현대라는 이름으로 특징지울 수 있는 여러 양상들에 맞추어 불교를 새롭게 해석해야겠다는 논의는 비단 오늘의 문제일 수만은 없다. 불교는 언제나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여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대화라는 개념을 세속화와 혼동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불교는 제 모습을 고집스럽게 지켜야 한다. 그래서 시대속에 있으면서도 시대를 초월 할 수 있어야 한다. 큰 집 짓고, 버스 사고, 연말이면 양노원 가는 것으로 자기자리를 지켰다는 착상은 안일하기 그지없다. 이 시대의 인간들과 그 고뇌를 향한 따스한 손길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목소리가 시대감각을 갖는다는 것은 현대화의 한 범주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패턴이나 의식구조가 편의위주로 변한다는 것은 현대화에 포함시킬 수 없는 일이다. 요컨대 불교의 육성, 불교의 분위기, 불교의 고집을 지닐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절에서의 일상(日常)을 생각해 본다. 그 일거수 일투족은 온통 우리의 전통을 온존(溫存)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자신의 과거를 잊고 사는 실향민이다. 대규모의 아파트단지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인스턴트 문화가 정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원의 예절에는 은근한 한국적 풍취(風趣)가 배여 나온다. 아마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민속촌같은 데에서 아티휘셜하게 보존되어야할 그런 분위기가 살아있지 않은가. 일본이나 인도의 성지에서 늘 느끼는 허전함은 그와같은 전통적 인간에의 향수이다. 수도자가 없는 도량(道場), 신심(信心)이 없는 대지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저 연민과 서글픔으로 뒤섞인 안타까움이 남을 뿐이다.
아마 생명력있는 수도(修道)의 도량으로 한국은 이제 지구촌의 마지막 장소가 될런지도 모른다. 그 고마움을 모르는 것은 마치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전통이라는 무게는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 것처럼 단시일 내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피와 땀으로 대지를 갈 듯이 그렇게 소중하게 일구어 놓은 유산들이 이제 문명이라는 이기(利器)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가고 있다. 쏟은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노릇이고, 병든 정신문화를 치유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한민족이라는 분모(分母)속에 잠재되어 있는 불교의 빛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보람찬 행로(行路)가 아닐까. 그것은 또한 현대의 불교화를 위한 우리의 초석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