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만 찍어온 동욱 스님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꽃을 드니 미소짓다

2009-06-08     사기순

지리산 자락을 안고 도는 섬진강의 아름다움은 화개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룬다. 은빛 구슬을 놓은 듯한 물줄기며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엔 곳곳마다 연상미가 넘쳐난다. 그래서 예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쌍계사의 주변 경관을 노래하고 그 빛을 탐닉했나보다.

쌍계 석문을 지나면서 기자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 영원을 포착할 만한 소개거리가 즐비한데 왜 동욱 스님은 십수년 동안 연꽃만을 찍어 왔을까? 어떤 사진기는 ‘사진은 말’이라고 했단다. 스님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부처님께서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니 가섭 존자만이 부처님의 뜻을 알고 홀로 미소 지었다. 이 염화미소의 정법안장은 불교에선 선종의 맨 첫 출발 종지의 표현이라 한다.

이 생각 저 생각이 겹쳐져 하나의 생각으로 엮어졌을 때 문득 문득 놀라곤 한다. 부처님의 마음이 면면히 이어져 가섭 이후 28대 달마 조사가 동쪽으로 와서 선종을 열었고 육조혜능 조사에 이르러선 선이 만개하게 된다. 혜능 조사의 정상이 쌍계사 금당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과 연꽃만을 고집스레(?) 찍어온 스님의 행각이 겹쳐지는 것은 웬일이까? 기자의 호들갑일런지도 모르겠다. 모든 일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예삿일이 아닌 다생겁래의 인연소치라며 놀라워하는….

가벼운 흥분과 기대감이 있었기에 스님과의 만남은 마치 하나의 경이로운 사건처럼 다가왔다.

눈빛이 서늘한 스님은 그의 작품을 많이도 닮았다. 스님의 숨결이 작품에 담겨지기도 했을 거고 숭고한 작품을 생각하다보니 그 빛이 도로 스님에게 훈습되었을 법도 하다. 사진작가라는 소리를 끝내 덧붙이기 싫어하는 스님의 사진 찍는 예기는 이렇다.

“75년도 가을 졸업 시험을 치르고 난 뒤였지요. 그 때 사형이신 보광 스님(현재 동국대 교수)께서 미리 졸업선물로 카메라를 사주셨어요. 당시 강사 스님의 한 달 보시금이 삼만원정도였는데 십육만오천원짜리 카메라를 선뜻 선물해주셨으니 제게 너무나 과분한 일이었죠.”

사형으로부터 선물 받은 그 비싼 카메라가 스님으로 하여금 십수년 동안 연꽃 속에 나툰 부처님의 미소를 찾아 헤매게 한 중요한 텃밭이었다. 부처님 그늘 속에서 생긴 소중한 카메라로 뭔가 보답을 해야 하는데… 불현듯 스쳐 지나는 영상이 있었다. 엄동설한의 한 겨울, 청암사 수도암에서 뵈었던 부처님 미소, 그 미소에 이끌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정진하다가 어깨 부분의 동상을 얻은 일, 지금껏 남아 있는 짜릿한 아픔은 오히려 수행력의 든든한 바탕이 되고 있다.

“중노릇 착실히 해서 ‘나와 남이 함께 성불하여 지이다’하는 발원밖에 사실 딴 생각이 전혀 일지 않아요. 이런 생활 속의 큰 힘은 뭐니뭐니해도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라 할 수 있지요.”

처음엔 부처님을 카메라에 포착했다. 어찌 보면 전체적으로 너무나도 근엄한 부처님이었기에 과감하게 생략할 것은 생략하고 부분만 그것도 자비한 부처님의 미소만 드러내려 애셨다. 그런데 아쉬움은 남았다. 꼬마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을 뵙고 환희심 내기란 쉽지 않은 것 같았다. 꼭 부처님의 형상으로 나둬야만 되는 것은 아닐 게다. 마음을 밝히는 게 불교가 아닌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기뻐할 수 있는 주제가 무엇일까. 목적은 분명하다. 마음 맑히기. 청정신심 되살리기.

“수많은 경전 속에서 청정한 진리성을 열어놓은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지요. 게다가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화중군자입니다.”

우리의 불교문화 속에 연꽃이 핵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연꽃사진을 찍으려니 참고할 자료가 없었다. 예술이 모방에서 시작된다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연꽃사진은 없었다. 신문 한 장을 펼치더라도 연꽃이란 말 한마디는 들어 있다는 사실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때의 당혹감은 스님으로 하여금 10여 년이 넘게 연꽃 사진을 추구하게 한 또 다른 원동력이기도 하다.

“처음 2-3년간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찍었습니다. 3-4년 되니까 겨우 연꽃의 생태도 알게 되고… 무슨 일이든 10년 정도는 오로지 해야 결실이 보이는 듯합니다.”

어떤 불자가 다달이 보내주는 일본의 사진잡지를 보면서 테크닉을 익혔듯 경전속의 부처님 말씀을 독송하면서 연꽃의 아름다움을 미리 미리 마음속에 그려 놓았다. 그 마음의 영상을 포착하기 위해 작열하는 태양 아래의 연발에서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더위도 먹었고 욕을 먹기도 했다. 도둑으로 오인하고 부리나케 달려 온 주인이 잿빛 옷자락을 보고 무색해하던 게 몇 차례던가. 인욕정진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변화하는 영상의 어떤 순간을 완전하게 포착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순간 속에 영원하고 숭고한 부처님의 미소를 담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마음속에 늘 부처님의 미소를 화두처럼 간직하고 있으니 항상 준비대세인 셈이지요. 좋은 꽃을 만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무작정 기다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제야 만났구나 싶어 카메라를 들이대면 꽃송이에 비치던 햇살은 눈 깜박할 사이에 달라지고 그 거룩한 미소는 슬프고 초라한 눈물을 짓기도 한다. 꾸준한 인내심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려 얻은 연꽃사진은 실로 고뇌속에 얻은 보석이었다. 천차만별의 연꽃들이 온통 우주를 덮으면서 자비한 부처님의 미소로 영상화되었을 때의 환희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십 수년 동안 탄생시킨 공양물은 올 해 부처님 오신 날 불교 대구 교육원 초대로 부처님께 올려졌다. 스님의 뜻에 의한 팔지 않는 전시회였기에 즐거웠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맑히고 신심을 되살렸을 것이다.

스님의 사진에 대한 한마디 “저는 작품을 전시하면서 단 한 점의 작품도 트리망한 것이 없습니다. 내 마음의 영상 그대로 카메라에 찍힌 그대로를 보여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갖가지 기교와 위선이 난무한 시대에도 수행력만큼은 맑은 마음많큼은 포장할 수 없다는 스님의 지론이 사진 찍기에도 작용한 것이리라.

한 잔의 녹차를 권하는 수행승과 수행승의 평소 이력을 그대로 드러낸 연꽃 사진이 신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기자는 꿈꾸듯 영상 속에 잠긴다. 꽃이 미소지니 온 우주가 환하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화합…. 일불승(一佛乘)의 힘찬 소리가 다향 속에 실려 오니 부처님의 미소가 송이송이 연꽃 되어 연회장 세계를 여는 듯하다. <불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