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신행수기

2009-06-06     관리자
감사합니다. 아직은 미흡한 제가 이 많은 대중 앞에서 신앙발표를 한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앞서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서게 하심은 저를 한 걸음 더 성장시키기 위한 부처님과 많은 분들의 경책이라 생각하고 저의 지난날의 신앙생활을 진실과 반성의 눈으로 뒤돌아 보고자 합니다.
지금 저는 2남2녀를 둔 애들의 엄마이며 아내이고 며느리이자 직장인이며 학생의 신분으로서 풍족하지는 않지만 남편을 위시하여 가족 모두가 각자의 직분과 역할에 충실하고 화목함을 이 순간 감사하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누구보다도 부처님의 자비스런 은혜속에서 지금까지 살아 왔다고 생각합니다. 시댁은 물론이요. 저의 친정은 대대로 내려오는 불자의 가정이었습니다. 지금은 열반에 드셨지만 묵담 큰 스님이 집안에 계셨고, 저희 할머니의 손에는 언제나 염주가 구르고, 아침 저녁으로 자장가처럼 들리는 할머니의 염불 독경 소리에 저희들은 잠이 들고 잠에서 깨어났고, 또 할머니의 손을 잡고 절에가면 풍경소리 범종소리 목탁소리가 좋기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부처님의 인자하신 모습은 늘 보아도 포근하기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저의 어린시절은 불자의 가정에 태어난 어린이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어린 시절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그때의 저는 불자로서의 정서와 불심이 배워서 얻었던게 아니라 훈습되어 오늘의 저로 성장시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불광에 입문하게 된 것은 78년 직장동료 묘심보살의 권유에 의해서입니다. 그 때는 종로 대각사에서 목요일 저녁 직장일과가 끝난 시간에 법회를 했기 때문에 법회날은 묘심보살과 함께 열심히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한가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어서 전법하는 묘심보살을 괴롭혔습니다. 바로 마하반야바라밀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할머니로부터 논리적 교리가 생략된 불자가정의 종교적 정서로서 훈습된 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은 자연스럽게 염송이 되었으나 생소한 마하반야바라밀은 웬지 약간의 거부감 마저 생겼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전법을 시도하는 묘심보살의 정성에 이끌려 열심히 법회에 참석하여 마하반야바라밀에 대한 교리적 이해와 바라밀 신앙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법등모임도 참석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성남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법회 끝나고 집에가면 10-11시인 밤 늦은 시간이어서 사실 법등모임은 불가능한 실정이었습니다.
그렇게 4년째 되던 82년 불광법당이 잠실 이 자리에 이전하고 법회날이 목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부처님이 바라밀수행을 하게하기 위한 은혜로운 배려라고 생각하고 법회날은 물론 직장에서 퇴근후 귀가길에 자주 법당을 들어 예배를 드렸고, 석촌법등에 적을두고 열심히 법등모임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83년 4월 저희집에 도둑이 들어 털리고 나니 그집에는 도저히 살고싶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제 심정으로는, 다른 때 같으면 무엇을 원망도 했을텐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지금까지는 부처님께서 저에게로 다가와 계셨지만 이제는 제가 부처님의 곁으로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불광사가 있는 잠실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저는 서서히 불광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새로운 면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타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법등조직을 통해 실천하는 신앙공동체생활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나 개인을 위한 수행정진이 아니면 고작해야 집안식구들을 위한 것일 뿐, 나와 더불어 내 이웃과 국가, 사회를 위하고 마침내는 이 사회에 불국정토를 건설하기 위한 신앙은 아니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엄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값있는 보물을 얻은 것보다 기뻤고, 비로소 인생의 삶의 의미와 목표를 발견한 기쁨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운 그 가운데 이러한 가르침이 없지는 않았을텐데, 불광 법등수행을 통해서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후 저는 어려웠던 법문에 귀가 하나 둘씩 열리기 시작했고, 그때 깨달음에 대한 확신은 지금 저의 인생관으로서, 신앙으로서 굳어져가고 있습니다.
여지껏 법등 임원부촉을 받으라는 권유를 사양해오다가 그 이듬해 잠실3단지 반야보살 부촉을 받았고, 1년후 잠실본동 법등을 창등하여 반야보살 임무를 맡으며 합창단에 들어가 합창도 했습니다. 노래는 맑음을, 만인에게 기쁨과 밝음을,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도정진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교육도 받고, 50일기도, 호법기도, 백중기도를 3년간 새벽예불과 함께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저희를 고통과 무명속에서 헤어나 떳떳한 불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깨우침을 주신 은혜로운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사를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83년 저희집 남편이 현역장교로 재직하다가 전역하고 방황 할 때 우리 부부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전역시에는 직장을 잡아 나왔지만 겨우 6개월을 견디고 박차고 나와 그때부터 사업이니 취직이니 전전하기를 만6년, 금년(89) 2월까지였습니다. 아직 일할수 있는 젊은 나이에 그것도 가장으로서 자기일이 없다는 것은 얼마만큼 큰 고통인지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직장을 그만둔지 3일만에 애들이 아빠 왜 회사 안나가세요? 하며 의문을 갖고 묻기를 한달이 가고 두달이 지나자 아빠의 모습으로부터 드리워진 애들의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깔리는 것이었습니다. 뒤늦게 애들과 대화중 알게된 사실이지만 큰 아이가 중2때 이유없이 성적이 떨어졌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은 인생을 포기한다느니, 희망도 능력도 없다는등 한숨과 비관으로 지나치게 신경을 쓴 나머지 건성피부염이 온몸을 완전히 덮어 버렸습니다. 온몸은 불치병 환자처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몰골이 된 것입니다. 약을 바르면 오히려 부작용이 나서 가려워 견디질 못하고 심하게 번져 갔습니다. 온몸은 불덩이처럼 열 또한 심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남편은 옛날과 다르게 조그마한 일에도 신경질을 부리고, 법회를 가지말라는 등 너 혼자 알아서 하라는 등 집안은 잠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고 남편에 대한 아내로서 또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조용히 반성해 보았습니다. 혹 내가 남편을 가벼이 생각하지는 않는가, 미워하고 원망하고 공격적이지는 않은가. 이러한 나의 태도 때문에 남편은 저렇게 신경질적으로 매사에 비관하고 절망적인 자세가 되버리지는 않았나 싶었습니다.
역시 저는 불광에서 가르침과는 달리 잘못된 점이 많았습니다. “부모님과 남편과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처럼 공경하여라, 모든 사람은 부처님 성품을 본래 다 갖추고 있다”라는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욕심에 사로잡혀 인색하고 미워하고 분노와 공격적인 마음으로 원망하며 심지어는 무관심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많은 법문을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실생활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합리화 시키고 자기 중심적인 욕심에 관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상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생의 행복과 성공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불행과 불완전은 실로는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살아온 것은 사실입니다.
작년 겨울철 50일 기도 중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차가운 내 두손으로 남편의 등을 열을 식히듯 문질러 가면서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했습니다. “이 손이 자비로운 부처님 손길처럼 약손이 되어 지이다” 하면서 계속해서 며칠을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며 전신을 문질러 주었습니다. 물론 피부과 약도 썼지만 3일째 되던 날엔 상처가 서서히 살아지기 시작하더니 며칠이 지나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말끔이 씻겨지고 없었습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저는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를 몇 번이고 되내이면서 흐르는 눈물을 어찌 할줄 몰랐습니다.
이 어찌 부처님 무량한 공덕 생명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저희들은 머리로만 들어 이해해 했던 법문을 고난을 통하여 현실에서 새롭게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거듭 부처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이 생명 다하도록 부처님 가르침 따라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며 다짐했습니다.
그 후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을 긴 방황의 헤매임 속에서도 헤어나게 해주셨습니다. 금년 2월부터 남편은 국영기업체에 취직이 되어 다시 일터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돈을 벌게 해 주십시오 보다는 일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가 더 절심했던 우리집 식구들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치 긴 장마가 끝나고 밝은 태양이 열린 듯 했습니다.
제게는 한국전기통신공사의 한 사원으로서 교육을 담당하는 교관의 임무가 주어졌고, 작년에는 당당하게 서열 1번으로 승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직장에 어느 고마운 분의 주선으로 한국불교대학(야간)에 들어가 늦게나마 대학생활과 체계적인 불법공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저의 생활은 새벽엔 불광사에 나가 예불에 동참하며 “이 불자 자비행이 직장인의 불자로서 모범된 조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혜의 용기를 주시옵소서‘라고 항상 발원했습니다.
퇴근 후 저녁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가고 수업이 끝나면 그때부터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임무에 충실해야 하기에 마음은 달리는 버스 속에서도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회하고 또 참회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법문을 들어서 알고 법등 수행을 통해서 실천하고 고난을 겪으면서 새롭게 자각하여 많은 것을 알았다고 했지만, 정작 저를 낳아주신 조상공경을 잊고 있었습니다.
저는 친정으로 아들이 없는 종가집 종손으로서 아들 역할과 집안에 애경사까지 다 맡고 있는 저로서는 그런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73년 3월, 82세로 운명하신 그 날까지 그리도 기다리시던 아들을 끝내는 보지 못하고 한이 맺혀 말문을 닫으신지 만 하루만에 운명하신 저희 할머니, 운명하시기 전 제손을 꼭잡고 무슨 말씀인가 하실듯하다 끝내는 말씀을 못하시고 눈물만 주루룩 흘리시더니 그만 고개를 돌리고 우시며 마지막 하시고자 했던 할머니의 그 말씀을 15년이 지난 후에야 알 것 같았습니다.
참회하고 또 참회하면서 3년전 백중기도 입제날 아버님의 위패를 모시고 7일동안 눈물로 참회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명색이 불자라고 자처하면서, 그동안 우란분재일이 몇 번이나 지났는데 아버지를 위한 기도 한번, 천도제 한번 올려드릴 생각 못하고 이제야··· 이 불효 어찌 용서 받기를 바라겠습니까. 7일 천도기도 회향하는 백중 날 스님들의 영가 축원이 시작되자 저희 아버님께서 훨훨 날아 가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고, 마음 마음 하지만 내어쓰지 못하고 행동에 옮기지 못한다면 어찌 금수와 다를 바 있겠습니까. 거듭 참회와 감사를 느낍니다.
금년에 저희 가족은 7년만에 집을 떠나 남편의 근무처인 여수에 가서 휴가를 보내고 왔습니다. 그동안 집안 형편상 그럴 수 밖에 없었지만 불편 한마디 없는 어린 것들이 착하고 대견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당했을 때 가족 모두가 말없이 협조해 주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집안에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 하시며 저를 직장에 나가 일할수 있도록 해주신 친정어머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저는 아무일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자대비 세존이시여 이제 저는 부처님의 끝없는 은혜광명 속에서 지성으로 감사드리고 환희용약 하면서 서원을 드리옵니다.
저는 반야법문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생명의 바닥에 영원히 빛나는 부처님의 끝없는 은혜를 잠시도 잊지 않겠습니다. 온 누리 온 중생 위해 끊임없이 넘치는 부처님 자비은덕을 끝없이 존경하고 찬탄 하겠습니다.
걸림없는 반야광명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시고, 미혹의 구름이 덮혀올 때 믿음의 큰 바람이 일게 하시며, 고난과 장애를 보게될때 바라밀 무장애의 위력이 빛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저의 이 생애가 보살의 생애로서 일체중생과 역사와 국토를 빛냄으로써 마침내 부처님의 크신은덕 갚아지이다.“
밝고, 맑고 희망찬 마음, 저의 수행정진을 바탕으로 온천지에 가득찬 이 환희심. 밝은 마음을 저의 주위 온누리에 널리 내어쓰는 불광 불자가 되어 삼보은혜에 보은 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감사합니다.
                                    -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