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 법문 : 보살계본사기 해설 (3)

2009-06-06     심재열

원효대사 법문 : 보살계본사기 해설 菩薩戒本私記 解說 (3)

󰊳 해제(解題) (계속)

㉱ 속제(俗諦)ㆍ진제(眞諦 ) 불이(不二)의 뜻

원효대사는 「범망」에 비유한 이 경 이름에 세가지 뜻이 들어 있음을 찾아내어 밝히는 가운데 그 둘째로, 속제(俗제)의 차별법 곧 현상계의 상대법과 본체계의 절대법이 서로 원융(圓融)하여 차별이 있는 그대로 그 근본진리가 하나이고 둘이 아닌〔俗諦  : 眞諦  不二〕뜻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둘째, 세속의 차별법에 비유하는 뜻이 이 범망에 있으니, 세상의 상대법은 이 법과 저 법이 같지 않고 저 법이 이 법과 같지 않아서 구구하게 서로 다르므로 만 가지 차별을 이루는 것이다.
이 뜻을 범천의 저 인다라망에 견주어 말하자면 이 그물코의 눈이 저 그물코의 눈이 아니고 저 그물코의 눈이 이 그물코의 눈이 아닌 뜻에 해당된다.

그러나 또한 진공의 한 맛〔一味〕의 뜻으로서 절대의 진리(眞?)를 삼는 점에서 보면, 상대세계의 차별이 비록 없지는 않지만 참다운 본체적 진리 가운데 현상계의 차별법은 포섭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둘이 아닌 바이다.
그러므로 이 상대세계의 속제법(俗諦法) 그 하나하나가 그대로 일여(一如)의 본체적 진리 아님이 없나니 이 뜻은 곧 그물이 모든 그물코의 눈을 다 껴잡아 포섭하고 있음에 해당한다.
따라서 낱낱의 그물코 하나하나가 모두 다 그물 아님이 아니란 뜻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킨 것이니, 그러므로 그물로써 비유하여 이 경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

이상은 이 경제(經題)에 대승불교 구경의 진리인 중도(中道)의 원리가 들어 있음을 색출해 낸 논술이다
그 가운데 「속제법」은 현상계의 상대법을 말하며,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변화하여 마지 않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생멸법임을 말한다. 또한 모든 현상적 존재는 천차만별로 구구하여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차별법이라 한다.
지구상에 40억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지만 똑같이 닮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바다 가운데 수백억ㆍ수천억의 동일류의 불고기가 서식하지만 세밀한 관찰을 할때엔 꼭같은 물고기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날로 사용하는 지폐나 동전도 그렇고 심지어는 우리의 육신인 경우에는 찰나찰나 신진대사를 거듭하고 세포의 바뀜이 쉴 사이 없이 진행되고 있어서 몇 천만 몇 억만 분의 일 초 사이에도 엄청난 다른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된다.

그런데 상대성의 원리에 의거해 보는 경우에도 상대적인 원리가 있으면 절대적인 원리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두가지 진리가 있음을 알수 있다. 하나는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은 「속제법」이고 차별법이며 다른 진제법(眞諦法)인 본체계의 절대진리다. 본체계의 절대진리는 현상의 원리가 아니고 존재의 원리가 아니므로, 상대성을 여읜 불변의 영역이고 현상계의 근본 바탕이 된다.
따라서 속제법이 비록 차별이 없지 않지만 속제법 그대로 진제법에 소섭된 바이며, 속제와 진제는 둘이 아닌 중도의 동일의 차원에서 속 즉 진현상, 즉 본체의 원융한 일미(一味)의 것으로 된다.
범망이 이와 같은 현상계의 차별적인 상대성의 원리과 본체계의 일미적인 절대의 원리를 융합통일한 중도의 진리를 잘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 「경제」로 하였음을 원효대사는 변증하였던 것이다.

원효대사는 「범망」에 비유한 이 경 이름에 세가지 뜻이 들어 있음을 찾아내어 밝히는 가운데 그 둘째로, 속제(俗제)의 차별법 곧 현상계의 상대법과 본체계의 절대법이 서로 원융(圓融)하여 차별이 있는 그대로 그 근본진리가 하나이고 둘이 아닌〔俗諦  : 眞諦  不二〕뜻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둘째, 세속의 차별법에 비유하는 뜻이 이 범망에 있으니, 세상의 상대법은 이 법과 저 법이 같지 않고 저 법이 이 법과 같지 않아서 구구하게 서로 다르므로 만 가지 차별을 이루는 것이다. 이 뜻을 범천의 저 인다라망에 견주어 말하자면 이 그물코의 눈이 저 그물코의 눈이 아니고 저 그물코의 눈이 이 그물코의 눈이 아닌 뜻에 해당된다. 그러나 또한 진공의 한 맛〔一味〕의 뜻으로서 절대의 진리(眞諦)를 삼는 점에서 보면, 상대세계의 차별이 비록 없지는 않지만 참다운 본체적 진리 가운데 현상계의 차별법은 포섭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둘이 아닌 바이다.

그러므로 이 상대세계의 속제법(俗諦法) 그 하나하나가 그대로 일여(一如)의 본체적 진리 아님이 없나니 이 뜻은 곧 그물이 모든 그물코의 눈을 다 껴잡아 포섭하고 있음에 해당한다. 따라서 낱낱의 그물코 하나하나가 모두 다 그물 아님이 아니란 뜻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킨 것이니, 그러므로 그물로써 비유하여 이 경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 이상은 이 경제(經題)에 대승불교 구경의 진리인 중도(中道)의 원리가 들어 있음을 색출해 낸 논술이다 그 가운데 「속제법」은 현상계의 상대법을 말하며,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변화하여 마지 않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생멸법임을 말한다. 또한 모든 현상적 존재는 천차만별로 구구하여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차별법이라 한다. 지구상에 40억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지만 똑같이 닮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바다 가운데 수백억ㆍ수천억의 동일류의 불고기가 서식하지만 세밀한 관찰을 할때엔 꼭같은 물고기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날로 사용하는 지폐나 동전도 그렇고 심지어는 우리의 육신인 경우에는 찰나찰나 신진대사를 거듭하고 세포의 바뀜이 쉴 사이 없이 진행되고 있어서 몇 천만 몇 억만 분의 일 초 사이에도 엄청난 다른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된다.

그런데 상대성의 원리에 의거해 보는 경우에도 상대적인 원리가 있으면 절대적인 원리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두가지 진리가 있음을 알수 있다. 하나는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은 「속제법」이고 차별법이며 다른 진제법(眞諦法)인 본체계의 절대진리다. 본체계의 절대진리는 현상의 원리가 아니고 존재의 원리가 아니므로, 상대성을 여읜 불변의 영역이고 현상계의 근본 바탕이 된다. 따라서 속제법이 비록 차별이 없지 않지만 속제법 그대로 진제법에 소섭된 바이며, 속제와 진제는 둘이 아닌 중도의 동일의 차원에서 속 즉 진현상, 즉 본체의 원융한 일미(一味)의 것으로 된다. 범망이 이와 같은 현상계의 차별적인 상대성의 원리과 본체계의 일미적인 절대의 원리를 융합통일한 중도의 진리를 잘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 「경제」로 하였음을 원효대사는 변증하였던 것이다.

㉲ 止ㆍ觀 二門으로 成佛
끝으로 원효대사는 「범망」의 비유에 선정과 지혜를 성취하는 지ㆍ관(止觀)의 뜻이 들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세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이 한량없고 그 진리에 들어가는 문이 많지만 지(止)와 관(觀)두 문에 지나기 않나니 이로써 모든 법을 융섭하기 때문이다.
일여(一如)한 법계에 바탕하는 것〔본체계에 마음이 계합하는 것〕을 「지」라 이름하고, 비록 법을 증득(證得)하여 일여 아님이 없는 경계에 이르렀지만 거짓으로 있는 차별법을 관조(觀照)하여 현상계가 그대로 존재하는 도리가 없지 않음을 통찰(洞察)하는 것을 관(觀)이라 이름 한다.』

지(止)는, 번뇌를 그치고 마음을 집중하여 차별의 상대세계를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밝지 못한 사고를 그치는 것을 뜻하며, 시간ㆍ공간의 이전ㆍ생사ㆍ열반의 이전 곧 일체의 상대세계를 초월한 본체계의 절대 영역에 계합하는 것을 뜻한다. 이에 대해 관(觀)은, 현상계의 모두가 실제로 보면 일여 아님이 없지만, 그러나 가유적(假有的)으로 있는 현상계의 차별법ㆍ인연인과의 법에 대해서 아울러 통달하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선정(禪定)을 닦는데 있어서, 번뇌를 그치고 망상을 쉬는 것을 지ㆍ적ㆍ정ㆍ묵(止ㆍ寂ㆍ定ㆍ黙)이라 하고 정신이 깨어 밝은 것을 관ㆍ조ㆍ성ㆍ혜(觀ㆍ照ㆍ惺ㆍ慧)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원효대사는 한걸음 나아가 이상에 소개한 바와 같이 마음의 근본 성품에 계합하는 것을 「지」라 했고, 현상계의 차별지를 쌍으로 완성하는 것을 「관」이라 했음에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원효대사는 또 여러 가지 법문이 있게 된 까닭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차별적인 관법에 의해 도에 들어 가고 또 어떤 사람은 통관(通觀==중도관 총관)을 말미암아서 도에 들어가기도 하나니……차별적인 관문을 통해서 들어가야 할 사람에게 그 근기에 맞추어 주기 위한 많은 법문이 있지만 마침내 그 진리의 바다에 들어가서는 둘이 없는 것이다. 마치 한 성에 四대문이 있어 어느 문으로 들어가느냐 하는데는 차이가 있지만 성안에 들어 가서는 둘이 아닌 것과 같이 이 뜻도 그와 같은 바이다.』

이 범망경의 제목을 해설하는데 있어서「지ㆍ관」二문에 배대(配對)하여 해설한 선지식은 오직 원효대사 한 분뿐이다.
이 경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행을 갖춘 계경(戒經)이라는 점에서「지관 二문」의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강조한 것은 제가(諸家)의 주석을 크게 뛰어 넘는 해박한 경학적(經學的) 혜안에 바탕한 것이라 하겠다.
요컨대 중도의 지관을 동시에 닦는 상근기는 마치「범망」의 전체와 낱낱의「그물 코」를 일시에 보는 것에 비유되며, 여러 경우의 차별적인 지관법을 닦는 중근기 이하의 닦음은 하나의 그물코를 관하는 것을 통해서 마침내는 그물 전체의 실상을 깨우치는 것에 비유될 것인데, 결국은 지ㆍ관의 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이치를 밝힌 것이라 하겠다.

㉳ 심지(心地)는 불(佛)과 중생(衆生)의 바탕
「해제」서두에서 이 경의 바른 이름은<범망경보살심지품>이라고 했는데, 「범망」에 대한 원효 대사의 해석은 이상 소개한 것으로 하고 경과 보살에 대한 설명은 일반적인 예에 맡기어 생략하기로 한다.
원효대사는 심지(心地)에 대해서「마음을 낸다」「머문다」는 뜻으로「마음의 땅〔心地〕」이라 했으며, 十지보살 이전의 四十심과 十지 이상의 十심을 수행하는 보살이 보리의 열매를 완성해가는 땅이고 보살도의 규범인 三취정계(聚淨戒)가 의자하여 머무르고 생겨나는 땅이라 했다.
그러므로 결국 이「마음의 땅」은 대승보살이 보리를 크게 일으킨 본원심지(本源心地)의 땅이며 성불작조(成佛昨組)의 땅임을 밝힌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마음이 중생의 마음과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효대사는,
『능히 내는 것은 중생심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보살지 위에 오르지 못한 범부의 수행인이나 六도에 윤회하는 일체 중생이나 이 마음을 떠나서 수행하고 윤회하는 것이 아니다. 알고 보면 모두다 이 본원심지 그 안에 있는 놀음일 뿐이니,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있을 수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고 한 경ㆍ논의 말씀을 원효대사는 여기서 세가지 원리로 나누어 우리에게 친밀하게 밝혀 주셨다.
사기(私記)는 주석(註釋)의 다른 말로써 원전에 대한 추자적(?字的)인 해석보다는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어류와 내용에 대해 자기의 견해를 피력한 주해서(註解書)란 뜻이 된다 하겠다.
이상으로 미흡하나마「해제」의 항목을 마친 것으로 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