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없는 평등사상

특별강연/보조스님의 핵심사상

2009-06-05     관리자

그 다음에 셋째번으로는 우리가 '인류 인류'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인류라고 하는 말을 쓸 때 거기에도 어리석음의 집단적인 성경이 있습니다. 아까 내 종교, 내 고장, 나라, 내 민족 속에서도 집단적인 어리석음이 발견되듯이 인류라고 하는 말을 쓸 때도 거기에 역시 어리석음의 집단적 성격이 검출되고 있습니다.

인류가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생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가리켜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에는 우리들이 너무 부꾸러운 짓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사람 때문에 멸종이 된 식물.동물이 부지기수입니다. 지금 세계환경회의가 열리고 있는 브라질, 거기에는  아마존이라는 강이 있습니다.

남미를 간통하고 있는 큰 강인데 강 주변에는 수억만 년을 견디어 온 그 영역을 알 수 없는 오래된 원시림이 있습니다. 그 숲속에는 원주민들이 무수히 살고 있습니다. 그곳 원주민의 역사는 몇 십만 년입니다. 그런데 그 원주민의 90% 이상이 금세기에 멸종을 당했습니다. 학자들은 그 원인을 유럽에서 들어온 질병 때문에 멸종에 가까울 정도로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 질병이 무슨 질병일까요?

아무튼 이와 같은 것은 아주 좋은 예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농촌에서 하는 일을 보면은 통일벼라고 하는 벼가 나온 뒤로는 다른 재래식 벼는 모두 멸종을 했습니다. 배추, 상추 이런 야채들도 새로운 종자가 나옴으로써 옛날 것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멸종을 했습니다.

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단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인류 중에도 어뗜 특수한 인종이 우수하다하여 가령 백인이 우수하다 하여 백인만이 살아남고 흑인이나 동양사람 황인들은 멸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그 사고 방식을 용서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사고 방식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인도사상이고 불교사상입니다. 인도사람들은 사람이 소가 되고 소가 사람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윤회설의 한 표현방식인데 그 윤회설이 뭘 의미하냐 하면 결국 사람과 소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한말 시인 가운데 한용운 대사의 나룻배라고 하는 시가 있습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그 아이디어는 이렇습니다. 승객들이 나를 무수히 짓밟고 물을 건너 저 언덕에 도착하면 돌아보지 않고 멀리멀리 훌훌 떠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그때 나룻배의 역할, 그것이 나의 역할입니다. 나로 말미아아 사람을 헤치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잘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입니다. 인류로 말미암아 다른 생물들이 잘 되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과학자들이 리오 히의를 개최하는 이유는 다른 생명들이 다 잘되야 지구가 건강하다는 증거고 지구가 건강해야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과학적오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지금 현재 거부하는 사고 방식이 우리 인간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 앞에 누가 말을 해야 됩니까. 믿음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경전을 내세우면서 불교인들이 말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전부 다 부시 대통령을 규탄하는 데모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인들도 규탄을 하든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지적해주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번째로 어리석음의 집단적인 성격의 뿌리박고 있는 것중 하나가 문화적인 어리석음입니다. 인간의 문화적인 성격, 그 속에 또 어리석음의 집단적 성격이 검출이 됩니다. 오늘날 지구 문화는 모두 문자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자가 지구에 등장한 것은 많아 봤자 4천년 내외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에 비해 우리 인류의 발전은 수십만 년이라고들 얘기합니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도 사람은 사람의 구실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목구비가 있었고 도리가 있었고 감성과 이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문자 발명 이전이나 이후나 똑같은 인간입니다. 이 말은 문자 발명 이전에도 인간은 어떤 형태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문자가 없었던 시절이기 때문에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 문화일 것이며 따라서 이름을 무문자문화(無文字文化)라 명명합니다. 이 무문자문화는 역사로 봐서 몇십만 년입니다. 몇 십만 년 전부터 쌓아오고 쌓아온 지혜와 경험과 문화들이 문자문화가 나타나자 아마존 강 유역의 원주민들이 멸족하듯이 없어졌습니다.

문자문화 앞에 무문자문화가 멸종의 위기에 직면했을 무렵, 지금 현재 우리들이 성인이라고 추앙하는 분들 즉, 중국의 공자, 인도의 석가 부처님, 희랍의 소크라테스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들 상호간에는 횡적 연관관계가 없었음에도 하나의 그 가르침의 공통된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자들은 무문자시대의 장점들과 문자시대의 장점을 둘 다 알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문자시대의 단점을 미리 파악하고 여기에 무문자 시대의 그 정신을, 빛을, 하나의 진리을, 그 문화적유산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우리 주변의 문화를 보면은 특히 오래된 문화, 불교문화 기독교문화 회교문화 유고문화 노자 장자 이런 도교문화를 가만히 보면은 분명히 무문자문화의 갈래하고 문자문화의 갈래가 함께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사람들이 문자문화를 통해서 무문자문화의 유산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이비가 많이 생깁니다. 무문자문화를 가지고 마치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걸 경험한 것 처럼 얘기합니다. 모르고 있는 걸 가지고 아는 것처럼 착각하는 그런 사이비 현상이 벌어집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서양의 종교, 기독교의 어거스틴 같은 사람을 봐도 문자와 성령 (정신)을 가지고 전작품을 이끌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고 우리 불교에서 선종과 교종, 교종은 경전을 중시하고 선종은 불립문자를 내세우지 않는 그런 것도 결국 두 갈래가 우리한테 함께 흘러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조 스님의 사상속에 선과 교가 있고 이런 양 갈래를 두루 잘 섭렵한 보조국사는 소크라테스나 공자나 노자나 이런 사람들이 두 가지 사항을 잘 섭렵하고 있듯이 그런 역사적인 사명을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조국사가 돈오점수설을 주장하고 있을 적에도 '돈오'라는 말은 깨닫는다는 말이라 결국 그 사람의 어리석음의 집단적 성격, 이것에 종지부를 찍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이의 직관적 성격의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차별' 입니다.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 나만 살아야 하고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좋다. 이런식의 사고방식 이기적인 사고방식, 이러한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깨우쳐주는 것이 보조국사의 '깨달음의 사상'입니다. '돈오사상'입니다.

그러니까 '돈오'를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 앞에서 제가 지적했던 네 가지의 어리석은 사상, 가지가지의 그 어리석음이 집단적인 성격과 결별해야 됩니다. 또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격과 결별을 하게 되면 결국 마치 한용운 대사가 말했듯이 '나는 나룻배요, 당신은 승객'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게 되고 그럴 때 모든 사람이 잘되고 모든 사람이 잘될 때 그것이 곧, 내가 잘되는 이러한 사상, 이것이 곧 깨달음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결국 이중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곧 그 어리석음의 집단적 성격을 배제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긍정적으로는 여러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하고 함께 살려고 노력하는 보현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보조국사에 대한 논문을 쓸 때, 항상 강조하는 것이 보조국사가 '돈오점수 돈오점수'하고 말씀하셨는데 그 '점수'라는 말은 깨달음의 내용으로서의 보현행을 하는 것, 이것이 그분의 말년의 작품의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원돈성불론]에 분명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깨달음을 강조하고 그리고 깨달음에 당해 바로 보현행원이란 말이 거기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사시는 것도 그랬습니다. 깨달음 다음에 모든 사람 속에 뛰어 들어가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 보조 스님의 사상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은 보조사상의 하나의 핵샘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얘기의 결론으로서 [화엄경]에 나오는 [보현행원품]이 보현행원품 중생수순 장에 어떻게 불교인들이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대목을 읽음으로써 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이 보현행원품은, 이곳이 법주 스님께서 번역하신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란 이른바 중생이라고 하지요. 알로 태어난 중생, 그 다음에 태로 태어난 중생, 습기로 태어난 중생, 화해서 조화로 생겨난 중생, 혹은 지수화풍을 의지하여 살기도 하고 혹은 허공에나 초목에 의지하여 살기도 하는 저 가지가지의 생물들, 가지가지 몸뚱이를 가지고 있고, 가지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고 가지가지의 모양과 가지가지의 수명과 하루살다 죽는 놈, 하루살이, 이틀 살다 죽는 놈, 일 년 살다 죽는 놈 십 년 백 년 살다 죽는 놈, 천 년 사는 놈, 가지가지 수명과 또 가지가지 종족과 가지가지 이름,

가지가지 심성과 가지가지 직념과 가지가지 욕망과 가지가지 행동과 가지가지 거동과 가지가지 의복과 가지가지 음식으로 가지가지 마을이나 성읍이나 궁전에 거주하면서 모든 천룡팔부와 인비인등, 발 없는 것, 두 발 가진거, 네 발 가진 것, 여러가지 여러 발 가진 것들이며, 형상 있는 것, 형상 없는 것, 생각 있는 거, 생각 없는 것, 생각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 없는 것도 아니고

이러한 여러 가지 중생들을 네가 다 따라 다니면서 받들고, 가지가지로 받아서 섬기며 가지가지로 공양하기를 마치 부모님 공경하듯이 하고 슷이나 아라한이나 내지 부처님 공경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이 받들되, 구체적으로는 병든 생명체에게는 어진 이원이 되어 도와주고 어디를 갈지 모르고 갈길을 잃고 있는 중생에게는 바른 길을 가르쳐주고 어두운 밤중에는 광명이 되어서 밝혀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재물을, 보배를 얻게 해서 가난을 면케하고 위와 같이 부처님의 정신을 실천하는 불제자들은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저는 이러한 [보현행원품]의 수순중생장이 브라질 리오에 있는 환경정상회담의 메세지로 불교인의 이름으로 한국불교인의 이름으로 보내져야 하고 또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하나의 권유장이랄까, 경고장이랄까, 편지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로서 조금이라도 이 세상이 불교국가가 되고 안 되고는 문제가 아닙니다. 부처님 정신이 시행이 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 뜻입니다. 이 부처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들의 힘을 합하고 그렇게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글은 지난 6월 14일 박성배 교수께서 불광사를 방문 [보조 스님의 핵샘사상]이란 주제로 강연하신 녹음테이프를 편집부에서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박성배 :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인도철학과 교수 역임. 대학생불교연합회 초대 조교수. 한때 출가하여 성철스님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후 도미하여 원효사상을 연구, 박사 학위를 받음. 현재 뉴욕주립대학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