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만나 재생하다

신앙수기

2009-06-05     관리자
󰋫인생은 괴로운 것인가

무더운 여름의 한낮이었다.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주례는 그이와 나를 세워놓고 유 영우 군과 한 순남 양은 어떤 고통이 있어도 참고 견디며 일생을 같이 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이는 『예』하고 대답했다. 나도 같이 대답했다.
바로 그 대답이 무엇이었을까? 사람이란 거의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의 존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마음과 육체를 동원시키지만 그래도 부족해서 둘이 힘을 합하라고 주례는 다짐을 했던가?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계속해서 경험하지 않은 다른 일들로부터 곤욕을 겪는다.
예기치 않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피곤과, 괴로움, 외로움, 고통을 느끼다 보니 어디에 의지하고 싶고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길 바라게 된다. 그러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 괴로운 입장을 몰라주고 저 사람이 저렇게 미련하고 냉정한가 하고 원망하고 미워지기도 한다.
서로 자기의 입장이 대단하고 자기 고통만이 큰 것으로 느낀다. 남의 입장을 이해할 겨를은 커녕 내 고통 몰라주는 것이 야속하며 어리석은 생각으로 내가 나를 괴롭히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내게도 이러한 증상이 있었다. 더더구나 아빠와 나는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교육도 달리 받았으며 가풍이 다른 시집과 친정을 번갈아가며 이해해야 했고 성격이 다르고 서로 하는 일과가 다른 두 사람이 한뜻으로 생활해야 함은 누구에게나 있음이지만 결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빠는 자기대로의 뜻을 관철하려 했고 나는 나대로의 고통이 따랐다. 서로의 마음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고 반항이 싹텄으며 아빠가 싫어졌고 사는 것이 짜증스러워 졌다. 행복과 고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십여 년이 흘렀다.
나의 좁은 소견머리에는 호흡을 할 때마다 번뇌 망상이 드나 들고 스스로 함정을 팠다.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眼耳鼻舌身意)에 걸리는 것마다 고통의 투성이었으며 성이 나면 혀가 말려 들어 가려 하고 심장이 말라 붙을 것 같았다.
그러한 성이 쌓이고 쌓여 육신으로 발산하는 시기까지 도달하였으며, 정신불안, 신체질환의 증세에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을 보면 열등의식, 증오, 미움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급한 대로 부지런히 한방학과ㆍ양외과 등등으로 들락거리며 치료를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렇게 아프다 보니 식구들의 아침을 굶겨 보내기가 부지기수였다.
아빠도 견딜 수 없었던지
『여보! 마음을 넓게 먹어요. 신앙을 하나 갖지 그래. 절이고 교회고 당신 좋은 데로 선택해서 나가 보구려.』
하셨다.
하지만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절이고 교회고 다니는 사람도 별 수 없더라」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빠는 그러한 내게 계속 권했다.

󰋫 관세음 보살을 만나다

그러던 초여름 어느날, 절어나 한번 가봐야지 하고 이웃에 사는 불교신도를 따라 나섰다. 절에는 가는 날이 적어서 나에게는 부담이 없었다. 처음으로 절 문에 들어선 나는 서투른 합장과 부처님, 관세음 보살님, 하니 멋쩍었다. 울긋불긋 그려진 그림이며 모두가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자세히 알아봐야지 하고 직접 스님을 찾아가서,
『관세음 보살님을 왜그렇게 오래 부르십니까?』
고 여쭈어 보았다.
스님은 웃으시면서,
『관세음 보살님을 지성으로 부르면, 여러 모양으로 중생 앞에 나타나서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다.
「나도 해봐야지」결심하고 그 후부터 염불을 실천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3일 동안 하루에 만번씩 염불을 시작했다. 찾아 오는 사람도 있고 전화도 와서 어쩔까 했지만, 대문을 잠그고 전화없는 방에 가서 편하게 앉은 자세로, 왼손에 염주를 들고 오른 손으로 세면서 관세음 보살님을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잡념이 생기고 등뼈가 쑤시며 발이 저리고 저리다 못해 감각이 없었다. 그래도 그 자리를 뜨지 않고 적은 소리로, 큰 소리로 계속 불렀다.
3일이 된 날은 9천번 쯤 하니 몸이 풀리고, 누웠는지 꽃방석에 앉았는지 황홀경에 들었다. 그 자리에서 뜨기가 싫었으며 계속 관세음보살님만 부르고 싶어졌다. 소원도 싫었다. 고통도 없었다. 그대로가 좋았다. 며칠 쉬어서 또 3일, 그러다 보니 상서로운 꿈도 꾸어졌다.
하도 신기하여 스님께 찾아가서 신나게 얘기했더니 삿된 마음을 눌러 주시며 부처님법을 일러 주셨다.
너무도 부끄러워 돌아서면서,
「관세음보살님, 제게도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다.
그 후로 버스에서나 밥할 때나 계속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면서, 나의 비밀, 답답증, 푸념, 고통을 말씀드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꾸자꾸 부르며 털어 놓았다. 아무리 아무리 부르며 모든 말 다했어도 관세음보살님과 부처님은 화내지 않으시고 귀찮아 하지 앟으시고 미워하지 않으셨다.
그러던 어느날 지금 불광의 야외법회엘 참가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불광법회에 다니면서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그때마다 나를 위해서만 법문하시는 것 같았고 내가 답답해 하는 부분을 알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 마음 속에 뭉쳐 있던 응어리가 하나씩 풀려갔다.
스님께 여쭤서 집에서 사경기도를 했고 지금도 계속 기도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답답하고 외롭고 슬프던 그 마음은 사라지고 부처님의 공덕으로 나의 마음은 환희심이 차게 되었으며 부처님이 나를 위해 성불하신 것 같았다.
열심히 법문을 들으러 다니며 인연이 닿는대로 자주 법회에 나갔다.

󰋫 고마워라 우리 아빠여

그런데 절에 가기를 권유하시던 아빠가 자주 나가니까 나가는 것을 싫어했다. 이제는 내가 아빠를 설득시켜야 했다. 절에 가서 있었던 일이며 자비하신 스님의 이야기를 조금도 숨김없이 소상하게 말씀드렸다. 법회 때는 열심히 배우리라고 결심하며 한 말씀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또 이 좋은 말씀들을 우리 아빠에게도 전해야만 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래서 나는 듣든지 안 듣든지 계속 전했다. 그러나 아빠는 처음에는 그저 내가 말하면 풍선 마냥 톡톡 튀기만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불쾌하지 않도록 계속 부처님의 말씀을 전했다. 전과 달리 행동도 부드러워진 내가 계속 좋은 소리만 하니 아빠도 마음이 편했던지 마음이 돌아섰다. 내가 법회에 나가는 것을 환영했고, 자신도 법문 배우기를 희망했다. 맘 놓고 집에서도 기도할 수 있게 됐으며 낮이고 저녁이고 걸림 없이 절에 갈 수 있었다. 이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할까.
하루는 시아버님과 시어머님이 오셨다. 내가 집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아빠를 불러다가 저러다가 만신이 되는게 아니냐고 심히 걱정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아빠는 부모님을 설득시키고 있었다. 나는 휴-우하고 긴 숨을 쉬면서 혼자서 슬며시 웃었다. 짜증에서 풀려난 생활이었다.

󰋫 디스크도 사라지다

그러던 어느날 심하게 허리가 아파서 병원엘 갔다. 병원에서는 만성척추디스크라는 병명이 나왔다. 선생님은 수술을 하라고 하셨다.
나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믿으며,
『수술하지 않고, 낳게 하겠습니다.』
하였더니,
『그 병은 여간해서는 낳을 수 없으며 잘 먹고 편하게 있으면 덜하고 심하게 운동하면 악화되며, 수술을 해도 완치는 없지만 좀 덜할 뿐이다.』
고 하셨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나오면서, 부처님께옵서 「육신은 허망한 것이라」고 하셨음에도 왜 그렇게 눈물이 흐르는지 걷잡을 수 없었다. 울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울며 울며 종로 2가에서 창경원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나의 부주의로 병을 만들어 다른 이에게까지 고통을 준다고 생각하니 모두에게 죄스럽고 부끄러웠다. 부모님들과 자식, 이웃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까지 신세진 일들만 생각났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미욱했던 자신이 가여워서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마음을 고쳐먹고 오직 부처님께 의지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열심히 부처님께 기도하며 호소했다.
『부처님! 이 어리석고 미련한 女子를 불쌍히 여기시고 가엽게 여기시어 제 몸의 신병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나는 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부처님과 조상님께 깊이 참회하고 열심히 감사 기도를 계속했다. 병은 마음에서 떨어 버리고 오직 자비하신 부처님 은덕만을 생각하며 염불했다. 그리고 평소와 같이 열심히 법회에 다니고 게으르지 않고 기도하였다.
모두가 본래의 것이다. 세상에 나올 때도 본래 그대로에 나왔고 떠날 때도 본래 그대로 두고 가는 것이 아닌가. 왜 모두 내 것으로 만들려고 했으며, 그토록 애를 태워야 했던가? 저 대지위에 훨훨 넘쳐 흐르는 한강의 줄기가 온 인류의 생명의 줄기였으며 철따라 변해가는 삼라만상이 온 인류의 호흡이며 마음이 정토라는 뜻을 그제야 알것 같았다. 어느 구석구석도 미워할 곳이 없고 어느 한 부분만 예뻐할 수도 없다.
아프다는 생각은 점점 멀어만 갔다.
한 남편의 아내로서 삼 남매의 어머니로서 주어진 이대로가 신비하고 소중하다.
이러한 마음으로 병을 앚은 채 생활하였다. 그러다 보니 병도 잊혀진 채 4년이 지났다.
나는 지금 훨훨 날아 갈 것 같은 기쁨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정말 얻을 것을 얻게 해 주시고 우리를 이렇게 키워 주시는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많은 스님들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절하면서….
(서울 성북구 정릉3동ㆍ주부ㆍ불광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