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삼각산 봉국사

고사의 향기

2009-06-05     관리자

비갠 뒤 더욱 온천지를 촉촉이 물들이는 유월의 사향(寺香). 신록에 흠뻑 취해있는 초 여름의 이 곳 가람은 한껏 그 자태의 푸르름을 자랑한다. 정릉(貞陵)을 지나 돌담의 운치가 머무는 곳, 바로 그 곳에 봉국사가 한적한 여유로움으로 다가선다. 삼각산(三角山) 줄기를 탄 자락 끝에 봉국사(奉國寺)는 태조(太祖)비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인 정릉 바로 옆에 자리한 호국사찰이었던 가람이다.

봉국사가 자리하는 삼각산은 경성(京城)의 진산(鎭山)으로서 화산(華山)이라고도 하였고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으로 이름하였다. 분수령(分水嶺)에서 잇달은 봉우리와 겹겹한 산봉의 높고 낮음은 빙빙 둘러 서남쪽에 이르러 도봉산(道峯山)이 되고, 또 삼각산이 되었으며 옛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 온조가 남쪽으로 나와 한산(漢山)에 이르러 살 만한 땅을 찾은 것이 바로 이 산이기도 하다.

고려 오순(吳洵)은 “공중에 높이 솟은 세 송이의 푸른 연꽃, 아득한 구름 안개 몇 만 겹인고. 전 년에 누대(樓臺)에 올랐던 곳 추억(追憶)하니 날 저믄 절간에 종 소리 두어 번 울리네”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 송이의 기이한 봉우리 멀리 하늘에 닿았는데 아득한 대기(大氣)에 구름 연기 쌓였네. 쳐다보니 날카로운 모습, 장검(長劒)이 꽂혔는데, 가로 보니 어슷비슷 푸른 연꽃 솟았네. 언젠가 두어해 동안 절간에서 글 읽을 제, 2년간 한강 가에 머무렀네. 누가 있어 산천이 무정타고 말하던가. 이제 와서 서로 보니 피차에 처량하네.”
“소년 시절에 책을 끼고 절간에 머무를 제, 돌다리에 뿌려지는 샘물 소리 고요히 들었네. 멀리 보이는 서쪽 벼랑에 밝은 빛 반짝반짝, 두어 마디 종소리 저녁 햇빛 향해 치네. 세 봉우리 깍아 내민 것 아득한 태고적이리. 신선의 손바닥이 하늘 가르치는 모습 천하에도 드물리. 소년 시절에 벌써부터 이 산의 참 모습알았거니 사람들 하는 말이 등 뒤엔 옥환(玉環) 살쪘다고 하네”라고 각각 고려 시인 이존오(李存吾)와 이색(李穡)도 삼각산의 서정을 노래 하였다.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초창된 봉국사는 새로 출범한 조선국의 무궁한 발전을 다지기 위하여 당시 왕사였던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하였다.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가 민심의 동요를 막고 국운 번창을 위해 대사로 하여금 삼각산 정기가 흘러 모인 이 곳에 절을 짓게 하여 항시 기도를 하도록 하고 그 이름도 봉국사(奉國寺)라 한 것이다.

봉국사라 이름한 이 후 약사여래를 봉안한 까닭에 약사사(藥師寺)라 알려져 있기도 한데 이는 태조 이성계에게 출가한 딸이 있어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를 하였는데 훗 날 이 비구니 스님께서 건강을 잃은 아버지를 위해 봉국사에 약사여래를 모시고 기도하였다 한다. 그 효험으로 태조의 병이 완쾌되었으며, 이런 소문이 퍼지자 곳곳에서 약사여래께 기도 드리려는 많은 신도들이 모여 약사절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 후 세조(世祖) 14년(1469년)에 중창, 그리고 특기할 만한 사적이 없이 내려오다가 고종(高宗) 19년(1882년) 임오군란 때 난군의 방화로 전소 되었다가 이듬 해에 다시 한계(漢溪), 덕운(德雲) 두 스님의 원력으로 중건되었고, 광무(光武) 2년(1898년)에 명부전(冥府殿)을, 1913년 칠성각(七星閣),1939년 염불암을 차례로 지어 가람의 모습을 한층 더 갖추게 되었다.

미아리에서 북악터널로 가는 중간 지점에 양 옆으로 벽돌담을 두고 서 있는 일주문은 먼저 도시 생활에 찌든 우리들에게 그윽한 향취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우거진 숲을 양쪽으로 해서 걷다보면 천왕문이 다가오고 그 위에 일음루(一音樓)라 이름한 종루가 절다운 풍모를 엿보게 한다. 일주문과 종루, 대웅전 복원 등은 1977년에서 86년까지 주지로 계셨던 현근(玄根)스님의 불사로 당시 대처승이 살고 있었고, 또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여 온갖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무학대사의 초창 당시의 범위보다 더 많은 불사를 해 장안의 대찰로, 시민들의 휴식처, 신도들의 마음의 안식처로 공헌한 보기 드문 불사였다.

열 한동의 건물이 약사여래를 모신 만월보전(滿月寶殿)을 중심으로 해 가파른 지형을 살려 적절히 그윽한 맛을 자아내고 있는 봉국사에는 지금도 불사의 현장이 여러 곳에 펼쳐져 있다.
“끝없는 일이 불사이지만 우선 만월보전 앞 뜰에 석탑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 도중에 느낀 것이지만 이 곳 봉국사는 많은 부처님을 모셔 놓고 기도하는 것이 더더욱 불법을 확장 포교하는 일이 되리라 생각되어 우선 천불전(千佛殿)을 조성하였습니다.”

경내 오른 편에는 87년부터 이곳 소임을 맡고 계신 주지 지근(智根)스님 대원력의 모습인 천불전이 위치한다. 88년 가을부터 착공한 이 불사는 금년 윤 오월에 완공식을 가질 예정이다. 어려운 살림에도 천불 조성을 위한 스님의 원력은 한 분의 부처님에서부터 마지막 천 분의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말 할 수 없는 지극 정성이 깃들여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뿌듯함을 느끼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천불전 불사가 완전히 끝나면 명부전, 독성각의 단청과 기와를 복원하려 합니다. 그리고 대처승들이 가정 집으로 사용했던 건물들을 다시금 요사채로 짓고, 좀 더 경내에서 떨어진 건물은 선실(禪室)로 만들려고 합니다. 결재 때 멀리 못 가시는 스님들께 선방을 제공하여 도심에서도 정진할 수 있는 도량을 마련해 드리려 합니다. 소심껏 힘 닿는데 까지 용맹 정진할 것입니다. 여러 불자님의 많은 동참을 기대 합니다.”

부처님 일을 한다는 스님의 말씀은 힘이 있었다. 옛날 호국사찰로서의 봉국사가 이제는 어린이 불자, 청·장년 불자들이 모두 모여 불법을 연마하는 도량으로 편히 쉬어가는 기쁨을 제공하는 곳으로 변모했다.
곳곳에 대자연의 풍요로움이 가득 차 있는 초록의 봉국사는 분주히 움직이는 스님들의 모습에서 약진을, 불법이 곳곳에 스며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숨소리를 더욱 선명히 느끼게 한다.




봉국사는 성북구 정릉3동 637번지로 전화번호는 919-0211이다.
시내버스는 2번, 331번, 522번, 8번, 154번을 이용하고, 지하철은 4호선 성신여대 입구에서 하차하여 다시 위 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