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교리강좌] 6.연기(緣起)의 법칙

2009-06-05     해주스님

중생의 괴로움(衆生苦)를 소멸하기 위한 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가 설해지고, 그 실천의 원칙은 중도(中道)로 표현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한 중도의 이론적 근거는 연기(緣起)의 법칙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신 깨달음의 내용도 바로 연기법이었으니 붇다가 붇다로 불리우게 된 것이 이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연기의 원리 위에 불교의 사상과 실천의 전 체계가 구축되어 갔던 것이다.

연기(緣起)의 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간에 이 법은 상주(常住)요 법주(法住)요 법계(法界)이다.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하여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들에게 설하나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즉 무명(無明)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다.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게 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즉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의 멸(滅)이 있게 된다. ⌜雜阿含 券12⌟

연기의 이법(理法)과 그 이법을 불안한 인간존재(苦蘊)에 적용하여 그 발생과 소멸의 고장을 검토한 십이연기를 석존의 오도(悟道) 내용으로 삼고 있는 말씀이다.
연기란 ‘연하여 결합해서 일어난다’라는 의미인 pratity-samutpada의 역어이다. 모든 존재는 어느 것이나 그럴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긴 것, 즉 말미암아 생긴 것이니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此有故彼有 此滅故彼滅)’라는 연기의 이 법은 모든 존재의 발생과 소멸에 적용할 수 있는 까닭에 보통 연기의 기본공식이라 일컫고 있다.
이것은 마치 두 개의 갈대단이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 서 있을 수가 있으며 그 중 어느 하나를 떼어낸다면

다른 한쪽도 넘어질 수 밖에 없는 것과 같다고, 갈대단에 비유 설명되어지고 있다. 연기란 이것이 있은 연후에 저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잇는 곳에 저것이 있는 것이다. 저것과 이것이 함께 있음을 뜻한다. 이것과 저것이 공존(共存)하는 공존성이다. 따라서 연기에서 공존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일체의 존재는 모두 이 연기의 법칙에 의해 성립된다고 한 것은 석존 출가의 과제였던 중생고(衆生苦) 생사고(生死苦)가 연기에 의한 것이며, 괴로움에서의 해탈 또는 연기에 의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고(苦)는 연생(緣生)임을 누누이 역설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한 때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시고도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아직 정각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정념에 의해 이렇게 생각했다. ‘참으로 이 세상은 괴로움에 빠져 있다. 태어나고 늙고 쇠해지고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 무엇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있는 것일까.’
비구들이여, 그 때 나에게 바른 사유와 지혜에 의하여 해결이 생겨났었다. ‘생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노사가 있다. 생에 말미암아, 노사가 있다’고 ⌜雜阿含 券12⌟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연기를 순역(順逆)으로 생각하셨음을 계속해서 설하고 계신다. 거기서도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등 십이지 연기의 성립을 보이고 있다. 무명에 의해 차례로 노사 등 모든 고온(苦蘊)이 생김을 관하셨으며, 따라서 무명이 멸하여 명(明)을 얻음으로 인해 생사의 모든 괴로움이 탈각됨을 관하셨다고 하신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에게 있어서는 이 고온, 즉 인간의 유한성에 고통 받는 자기 존재야말로 출가의 과제였으므로 연기의 이 법을 유정의 연기로 설하신 것이며, 그것을 십이지로 보이고 계신 것이다.

세간의 괴로움을 발생시키며 성립시키고 있는 이러한 조건들이 사성제에서의 집(集)에 해당하니 고와 집도 연생이다. 따라서 고의 조건을 제거하기 위한 조처인 팔정도와 그로 인해 고가 소멸됨도, 또한 연기임을 바로 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기에 세간은 무명에서 연기하여 연기해 있기 때문에 없다고 말해서는 아니된다. 그렇다고 결정적으로 있다고 할 수도 없으니 무명에서 연기한 것은 무명의 멸과 함께 없어지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기한 것은 유(有)와 무(無)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 입장이라고 한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중도의 이론적 근거는 연기의 법칙이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연기의 존재론을 무상(無常)이라는 표현으로 제기함으로써 거기서 고(苦), 무아(無我)의 결론으로 유도하고도 있다. ‘무상한 것은 고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석존은 다시 한번 출가시의 과제인 괴로움과 연기를 관계지운 것이다.
일체의 존재는 그럴만한 조건이 있음으로 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 조건이 없어지게 될 때 그 존재는 소멸하게 되므로 항상함이 없다. 무상하다. 영원하지 않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괴로운 것은 나(我)가 아니다. 나의 것이 아니다. ‘나’란 영원하고(常一生) 자재로워야 하기(主宰性) 때문이다. 그런데 일체제법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므로 나의 실체라고 하지 못한다. 연기의 법칙위에 무상의 원리가 세워지고 무아의 도리가 그것을 근거로 하여 주장되었다. 이 셋-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삼법인(三法印)이라 일컬어지며 불교의 현실 판단에 해당된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현실은 있는 그대로 바로 파악할 것을 강조하고 계신다. 만약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관하면 정견에 이른다고 한다. 무상한 것이 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일, 무아인 것이 무아로서 인식되는 일이 바른 지혜이며 그것이 명(明)이다. 명은 가려진 것이 제거됨으로써 존재가 그 진상을 드러내는 일이다. 명이 없음은 무명이라 하니 무명이 있게 되면 고온의 발생이 생겨난다. 역으로 명이 있는 곳에 정견 등 팔정도의 바른 실천이 이루어지고 괴로움의 소멸이 있게 된다.

그러한 무상한 존재 속에 상주하는 법칙성 즉 연기법은 석존이 깨닫기 전에도 존재했었던 것으로, 단지 깨닫고 못깨닫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연기의 깨달음이야말로 인간의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의 법칙은 십이연기로 대표되는데 십이지 중 가장 중심되는 것은 물론 무명이다. 무명이 인간고뇌의 지(知)적 원인이라면, 그 정(情)· 의(意)적 원인으로는 갈애(渴愛)를 들 수 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른 욕망이 갈애이다. 그리하여 무명과 갈애를 2지연기, 거기에 노사까지 3지연기라 하기도 한다. 부파불교에서는 이 무명을 과거인(過去人), 갈애를 현재인으로 보고 생노사를 미래과(未來果)로 보아 삼세인과로 설명하고도 있다.

이처럼 연기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리 해석되며 교리가 발달됨에 의해 새로운 연기설로 발전하게 된다. 업감연기(業感緣起), 뢰야연기(賴耶緣起), 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如來藏緣起), 법계연기(法系緣起)등이 그것이다
업감연기란 삼세양중인과로 설명되는 십이지를 크게 번뇌(感)과 업(業)과 그로 말미암은 고(苦)에 배대시키고, 제법이 생겨나는 원인을 유정의 업력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일단 조작된 업력은 그 과보를 초래할 때까지 어디에 보존되는가 업의 소의처(所依處)가 문제된다. 그리하여 뢰야연기설로 발전하게 된, 육식(육식)이외에 아뢰야식의 존재를 인정하고 모든 업력은 종자로서 아뢰야식중에 보존되어 잇다가 인연을 만나면 다시 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일체현상은 중생 각자의 아뢰야식으로부터 변현된 영상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만법유식(萬法有識) 심외무경(心外無境)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기의 식소변(識所變)이 아닌, 다른 이의 식에서 전변된 제법에 대해서는 유식의 의미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보변적 유심체를 설정하게 된다. 중생심의 본체는 진여이며 이 진여가 연을 따라서(隨緣) 현상계의 일체제법을 현상한다는 것이니 이른바 진여연기이다. 그러나 진여가 차별만상을 현상하는데는 매개자가 필요하니 무명의 존재이다. 따라서 평등진여로 환귀하자면 역시 무명을 거쳐야 하는데 그 무명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하여 일심(一心)중의 만덕 자체가 무명의 연을 빌지 않고 그대로 연기한다는 법계 연기설로 발전하게 된다. 법계 전체가 능연기가 되고 소연기가 되어서 현상계가 모두 실체의 전 활현으로 중중무진하게 연기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의 설명방식은 변천되어 왔으나 연기의 원래 의미는 변함이 없다고 하겠으니, 연기의 진리를 보지 못하면 번뇌의 생사고에 끄달리지만 연기를 깨달으면 일진법계(一眞法界)의 부처님 세계에서 자유로이 노닐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