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밝히는 등불들] 우리시대 민족시인 고은

또다시 벌거숭이가 되어

2007-05-15     사기순

고은 선생,

그의 삶은 그의 문학보다 명성보다 아름답다.
경기도 안성 대림동산 장미골. 선생을 뵈러 가는 길목에서 기자는 내내 아련한 그리움을 품고 있었다. 바다, 늘 생동하는 열정을 안고 있으면서도 잔잔한, 잔잔하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영원한 바다.

"1950년대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문학의 가장 빛나는 부분을 대표하는 존재 가운데 하나로서 시종일관 부동의 자리를 지켜왔다"는 문학계의 선생에 대한 평가는 합당하다. 그러나 부족하다. 지난 여름 선생의 22년 동안의 번뇌와 열정을 담아 펴낸 구도소설 [화엄경]을 읽어 가면서 536면 장장마다 얼마나 커다란 법열을 느끼고 그것에 충만했던가.

[화엄경] [입법계품], 선재동자의 구도역정을 새로운 빛과 향기로써 높게 형상화시킨 선생의 정신이, 편편마다 우러나는 민중에 대한 선생의 사랑이, 불자로서, 아름다운 모국어의 세례를 받은 독자로서 기자에게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선생 특유의 화려하고 발랄한 선적(禪的) 필치로 거침없이 더듬어 간 소설 [화엄경]은 '나와 함께 가자' '...'로 매듭져 있다.

불제자 고은의 '함께 성불하여지이다. 고통바다 어서 건네지이다'라는 발원은 100여권이 넘는 경이적인 분량의 작품집을 탄생시킨 생명력이자 이 땅 민족문학의 새 지평을 연 민족시인으로서 갖는 내적인 버팀목인 듯싶다. "이미 모든 직책들을 벗어 던졌어요. 강연이다 뭐다 오라는 데는 많지만 그것도 줄이려고 합니다. 벌거숭이가 돼서 살아볼 생각이에요."

벌거숭이, 그렇다. 선생은 이순의 나이로 여태까지 이뤄놓은 문학적 업적과 여러 감투(?)들을 벗어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려 하는 것이다. 욕망과 어리석음의 너울들을 훨훨 벗어 던진 벌거숭이만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는 [치문(緇門)]에 끄달려 기자는 넌지시 선생의 출가에 대해 그리고 출가를 통한 불교문학적 성취에 대해 여쭤 보았다.

"내 개인의 운명이라기 보다 우리의 험난한 역사가 빚은 출가였다고 보는게 더 옳겠지요. 나는 수도없이 많은 죽음을 보았어요. 그 죽음들 속에서 아파하면서 이 아픔을 끝내는 일이 죽음이라고까지 생각하고 늘 죽음만을 꿈꿔왔고 자살 미수도 몇 번이나 했지요. 불교를 만나고 나서야 나의 극한적인 절망이 극복되기 시작했지요."

1933년 군산에서 태어난 선생은 병약한 체질과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내성적인 성격에 군산중학을 수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공부 잫하??그림 잘 그리는 소년이었다. 17세때 6.25가 발발하였다. 그때부터 처참한 살륙의 현장을 목격하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는다. 자살에의 충동은 너무나도 많은 죽음 앞에서 익힌 존재의 허무였다. 바다에 빠져, 혹은 귀에 청산가리를 부어서 수차례 자살을 시도하지만 미수에 그친다.

전후에 군산북중학교에서 국어 교사겸 미술 교사를 하다가 19세 때 출가하였다. 서양철학뿐만 아니라 동양사상에도 해박한 선승 혜초의 강렬함에 이끌려서였다. 선생은 혜초 스님에게 외전을 배우고 당시 퇴경 권상노 선생과 비준하던 숨어사는 대강백 명봉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서부터 화엄경까지를 배웠다. 교와 선과 서양철학을 두루 섭렵한 선생은 몇년의 행각을 거친다.

그뒤 1953년 통영의 미래사에서 재출가하여 효봉 큰스님의 상좌로서 일초 스님이 된 선생은 선농일체(禪農一切)의 엄격한 가풍 속에서 철저하게 수행한다.

"지극히 자애롭고 지극히 엄중한 커다란 스승 효봉 스님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내 일생의 행복이었어요."

궂은 일을 도맡아 하기위해 애썼던 지난 날의 일들이 지금껏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그 당시에 선생을 엉엉 울고 또 울게한 일이 있었다. "우리 스님이 중국 영가 스님의 출가상법으로 내사주를 장난삼아 보더니 날 보고 중이 될 팔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대신 '약국을 크게 벌여 중생의 병을 고치겠다'고 위로해 주시더군요."

그때 당시 선생에겐 말할 수 없이 서운했겠지만 효봉 큰스님은 혜인이 있는 분이셨다. '약국을 크게 벌여 중생의 병을 고쳐줄 팔자' 라는 것도 이미 밝게 보신 것이다. 선생은 그후 환속하여 문학을 통해서 고달픈 영혼들을 편히 쉬게 하고 실천운동을 통해서 빗나가는 이 민족의 역사를 바로 잡아 민중의 고달픈 삶을 위무해 주는 데 전력투구한 삶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선생의 등단 역시 불가(佛家)에 있을 때 이뤄졌다. 국민학교 3학년때 [한하운시초]에서 받은 감동으로 말미암아 화가가 될 꿈을 버리고 문학으로 접어든 선생은 25세 때 조지훈 선생의 천거로 현대시 제1집에, 서정주 선생의 추천으로 그해 현대문학 11월호에 세 편의 시를 발표한다. 서정주 선생으로부터 최상의 칭찬을 받으면서 등단하게 된 선생은 이내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때 이미 불가에서는 일급포교사로서 젊은이들을 불문에 귀의시키고 있었으며 선(禪)과 추상미술을 연계시켜 미술선생들을 모아 강연하기도 하고 불교신문의 초대주필로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 그 무렵부터 기이한 행각으로 김관식, 천상병과 함께 문단의 삼대기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시업(詩業)에 몰두하면서도 수행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선생은 4.19를 해인사에 맞는다. 4.19가 일어나자 절에서도 큰 바람이 인다. "4월 혁명의 뜨거운 현실은 깊은 산중에까지 밀려 왔지요. 그때 민족현실과 사회현실에 뜨겁게 눈 뜬 것 같습니다."

가사 장삼을 찢기우면서 거의 혼자 대처승들의 해인사폭규를 사수한 선생은 엄격한 산중회의에서 27세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큰절 해인사의 주지대리로 추대된다. 그해에 선생의 첫번째 시집 [彼岸感城]이 출판된다. 이무렵 '가짜 고은'이 출몰하는 등 선생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퍼져 간다.

그뒤 5.16 쿠데타를 겪으면서 갖은 갈등을 일으키다가 선생은 '62년 한국일보에 환속선언을 하고 재가불자로 돌아오게 된다. 출가 중심의 불교도 중요하지만 사회전체를 아우르는 보살세계를 지향해야겠다는 의지가 뜨겁게 솟구친 것이었다.
그러다 70년대의 한 노동자의 분신은 선생에게 화두를 깨친 것 같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내게 크나큰 사건이었습니다. 내 심장에 뜨거운 피를 공급해 주고 내 문학의 내용과 삶에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당시에는 효봉 큰스님보다도 전태일이가 나를 움직이는 요체가 되었지요."

청계천 봉제공장의 한 젊은이의 분신을 보며 정치, 사회적 현실에 눈뜨기 시작한 선생은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깨뜨리기 위해 앞장선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회를 창립하여 초대대표간사로 활약하고 가두시위를 하다가 체포되기도 한다. 선생의 시 역사 민족의 역사적 아픔을 끌어 안고 고통받는 민중의 한을 씻김질하기 위해 큰 목소리로 노래한다.

1974년 시 [부활]로 제1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75년 대통령긴급조치 9호선포로 가택구금, 1979년 새로운 재야운동의 구심점이 되는 국민연합 결성에 참여 구속, 감옥에서 구타로 청각 상실, 1980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감방에 강제 연행된 뒤 7월 하순 육군교도소에서 종신형 선고, 1985년 민주 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취임, 민족문학작가회의 결성, 1988년 제 3회 만해문학상 수상, 1989년 한국민족예술인 총연합회 공동의장 등의 파란만장한 행적과 [만인보] [백두산] [고은전집] 등 시집, 장편소설, 에세이, 평전, 번역의 다방면에 걸친 작품생산을 보더라도 선생은 가히 우리 시대와 진정한 민족문학의 앞길을 밝히는 등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선생의 사상과 문학의 모태이자 궁극적 회향처는 불교였다.

지난해 펴낸 장편소설 [화엄경] 이 단적으로 말해 주듯이. "10년 동안의 수행납자 생활과 20년 동안의 민주화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일련의 행동들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종합적인 성취의 단계지요."

20년이 걸려 화엄경을 쓴 선생은 앞으로 10년 정도의 계획을 세워 불교세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할 것이다. 불교는 선생의 본질적 고향이요 영원한 이상이기에 불교문학에의 원력은 아주 옹골차고 뜻높다.

기독교가 단테의 신곡을 갖고 있는 데 비해 문학의 엄청난 원광(原鑛)인 불교가 제대로 된 불교문학을 갖지 못한 현실이 선생을 한없이 부추기는 것이다. 좀더 예술적으로 완벽하고 보다 깊고 넓게 진리의 세계를 승화시키기 위해 선생은 뜨거운 발원을 하고 왕성한 창작욕구를 남김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예순의 나이에 또다시 벌거숭이가 되어 겸허한 마음으로 다가서는 선생의 진지함은 이미 구도자 이상의 것으로 보인다. 될수록 외출은 자제하고 글쓰고 공부하고 끝없는 생명의 원동력인 부처님의 대자비에 귀의하는 것으로 빈틈없이 생활하는 선생의 모습에서 '바다' 바로 해인삼매를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