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한 곳에서 알아가라

禪의 古典 / 人天寶鑑

2009-06-04     관리자

    ꊱ 불혜천(佛慧泉)선사

  서왕(舒王)이 불혜천선사에게 물었다. 』선가에서 말하는 세존께서 꽃을 들어 보였는데 가섭이 미소하였다는 것은 어떤 경전에서 나온 겁니까?』 『장경에는 없습니다.』 『제가 한림에서 경전을 열람하자니 마침 대범왕문불결의경(大梵王問佛決疑經) 3권을 보았습니다. 그 경을 읽다보니 경속에 상세하게 세존염화가 적혀 있었습니다.』 「범왕이 하루는 영산회상에 이르러서 금색 파라화(波羅華)를 부처님께 공양하고 몸을 던져 법상을 삼고서 부처님께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시게 하였다. 세존은 자리에 오르자 꽃을 잡아 대중에게 보이니 인천 백만 대중이 아무도 아는 바가 없는데 홀로 가섭(迦葉)만이 파안 미소했다. 세존이 이르시기를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을 마하가섭에게 부치누나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에 천선사도 그의 넓은 학문에 감탄하였다.

    ꊲ 진국부인(秦國夫人)

  진국부인 계(計)씨는 호가 법진(法眞)인데 혼자되어 정결하게 지냈다. 번거로움을 피하고 지내면서 음식을 채소요, 옷인 즉 간소했다. 법을 배워도 선법에 있어서는 아직 참례하지 못했다. 한번은 경산(徑山) 대혜(大慧) 선사가 겸(謙)선사를 그에게 보냈다. 그의 아들 위공(魏公)과 준공(浚公)이 겸선사에게 부탁하기를 조사의 도로써 자기 어머니를 인도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마침 법진이 하루는 겸선사에게 물었다. 『경산화상께서는 평소에 어떻게 사람을 인도하십니까?』 『화상께서는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개에 불성이 없다」하는 공안을 참구케 하십니다. 이것은 다못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짐작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들을 (看話) 뿐입니다. 개에 불성이 있는가? 또는 없는가? 조주가 이르기를 「없다」하였는데 다만 이와 같이 공부케 하십니다.』 법진이 드디어 믿음을 내어 「개에 불성이 없다」는 공안을 가지고 밤낮으로 참구하였다. 앉아서 깊은 밤이 되었는데 홀연히 계합한 바가 있어서 연이어 게송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을 대혜선사에게 바쳤는데 그 끝에 이르기를 『종일 경문을 보니 옛 친구를 만난 거와 같네. 말하지 말지라. 세간에 걸림이 많다고. 한번 들면 온천지가 새로운 것을...』

    ꊳ 혜가(慧可)선사

  신광(神光)은 자주(磁州)사람이다. 널리 많은 학문에 달통한 선비였다. 이락(伊洛)에 살면서 많은 경전과 서적을 읽었는데 모든 도의 깊은 도리를 깨치고 답론했다. 그리고 매양 탄식하기를 『공자나 노자의 교는 예법과 법술과 풍규(風規) 뿐이며 경론으로는 아직 묘한 이치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 근래 듣자니 달마대사가 소림(小林)에 머물고 계시다고 한다. 지극한 도를 이룬 분이 멀지 않은 데 계시니 내 마땅히 찾아 가 뵈리라.』 신광은 곧 그곳으로 가서 조석으로 참승하였다. 신광은 스스로 생각하였다. 『옛 도를 구하는 사람은 뼈를 부수고 골수를 내며 몸을 도려서 반쪽의 게송을 구하였다. 옛날 사람은 그와 같았는데 나는 또한 어떤 사람이냐?』하고 그해 12월 9일 밤 크게 눈이 내렸는데 신광은 눈을 맞으며 뜰에 서있었다. 날이 밝아 눈이 무릎 위를 차올랐다. 이에 대사는 그를 가엾이 보고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눈 속에 서 있으니 무엇을 구하는 것이냐?』 이말 아래 신광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바라옵건대 오직 자비로써 감로문을 열으시어 널리 모든 중생들을 건져 주옵소서.』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묘한 도는 많은 겁을 두고 힘써 구하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행하며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행하며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아야 하나니 어찌 너와 같은 덕이 적고 지혜가 적으로 경만한 마음을 가지고서 참된 큰 도를 보려고 하느냐?』 신광은 이 가르침을 듣고 슬그머니 날카로운 칼을 빼어 스스로의 왼쪽 팔을 끊었다. 그리고 대사 앞에 내놓았다. 대사는 그가 법의 그릇임을 알고 말씀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최초의 도를 구할 때 법을 위하여 몸을 버렸느니 네가 이제 팔을 내 앞에서 끊었다. 가이 법을 구할 만 하니라.』 하고 그 이름을 바꾸어 혜가(慧可)라 하였다.
  신광이 말씀드렸다.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을 듣고자 하나이다.』 『모든 부처님의 법인은 사람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니라.』 『저의 마음이 아직 편안치 않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스승이시여,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주소서.』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 그대를 위하여 편안히 하여주리라.』 『마음을 찾아보아도 마침내 얻을 수 없습니다.』 『그대를 위하여 마음을 편안케 해 마쳤느니라.』 신광은 곧 깨달았다.

    ꊴ영명수(永明壽)선사

  영명수선사는 단양(丹陽)사람이다. 아버지는 왕(王)씨. 선사는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한번은 어려서 부모와 뜻이 어긋났을 때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타일러도 듣지 않더니 이윽고 높은 탑에 올라가서 땅으로 뛰어내렸다. 34세가 되어 용책사(龍冊寺)로 나아가 출가하였다. 그리고 하루에 오직 한 끼를 먹었으며 낮에는 대중 일에 이바지하고 밤인즉 참선을 배웠다. 천태산 천주봉(天柱峯)에 가서 석 달을 참선할 때는 까치가 옷소매에 둥치를 쳤다고 한다. 소국사(韶國師)를 뵈오니 단번에 그릇됨을 인정하시고 비밀한 뜻을 전수하셨다. 그리고 선사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원래로 나와 인연이 있다. 뒷날 크게 불사를 일으키리라.』하였다. 그 뒤 자성자(資聖寺)에 머물고 다음 충의왕(忠懿王)의 청으로 영은사(靈隱寺)에 머물러 그 1세가 되었다. 곧 이어 영명(永明) 도량으로 갔는데 그때에 회중이 2천이나 되었고 모두가 으뜸가는 수행자들이었다. 출가코자 하는 사람은 선사가 왕에게 청하여 도첩(度牒)을 받고 머리를 깍게 했다.
  어느 날 한 중이 물었다. 『어떤 것이 영명(永明)의 뜻입니까?』
『영명의 뜻을 알고자 할진대 서호(西湖)에 한호수라. 해가 나니 광명이 빛나고 바람이 부니 물결이 인다.』
『학인은 오랫동안 영명에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영명의 가풍을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는 곳에서 알아가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어떻게 하면 알겠습니까?』
『소(牛)의 태(胎)에서 코끼리가 나고, 푸른 바다에서 먼지가 인다.』 하였다.
  개보(開寶) 7년 화정봉(華頂峯)에 들어가 송을 짓기를 『목마르면 반웅큼 물을 마시고 시장하면 한 입의 솔을 먹는다. 가슴 속에 한 물건도 가이 없으니 백은봉에 높이 누었노라.』 하였다. 마침내 화엄경을 읽다가 『만약 모든 보살들이 대원을 발하지 않으면 이것이 보살의 마사(摩事)다.』한데 이르러 크게 느끼고 이윽고 대승비지원문(大乘悲智願文)을 지었다. 그리고 국청사(國淸寺)에 이르러 참법(懺法)을 닦는데 밤중에 이르러 수법 중에 보현보살 상 앞에 공양한 연꽃이 홀연히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 일이 있는 수부터 일생동안 꽃을 올려 공양하였다. 또한 관음보살이 감로수를 입에 부어주었는데 그로부터 대변재를 얻고 종경록(宗鏡錄) 100원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