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살해한 자의 환생 (하)

윤회의 실증

2009-06-04     관리자

7. 재판의 기록과 전생 발언과의 비교

재판에서 실제의 하미는, [나는 모하티하미에게 매를 맞고 나서 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신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할수 없이 칼질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애초부터 살인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라고 사건 발생 당시의 상황과 그 때의 살의 유무에 대해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항변은 재판에서 인정되지 못하고 말았으며, 결국 고의의 살인이라고 판정되어 사형이 선고된 것이다.

이 경우의 하미의 주장과 비교해서 재미있는 일은 위저라트네의 전생 발언이다. 위저라트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나는 메니케가 나와 함께 집에 오기를 거절하였을 때 이미 죽어 버릴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살인할 의도 밑에 실지의 범행을 한것이다.] [모하티하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죽인 것이 그 집 식모에게 발각되어서 그것이 뜻대로 되지 못했다.] [살인을 저지른 뒤에 모하티하미에게 매 맞고 쓰러진 것이다. ]

이러한 세 가지의 전생 발언은 앞에서 인용한 (칼를 갈았다)는 발언과 마찬가지로 재판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재판 기록에 의해서 그것이 사실이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는 실제로 불가능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전생 발언이야말로 앞에서 소개한 재판에서의 하미의 주장보다도 한층 더 우리에게 설득력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 살인한 뒤에 모하티하미에게 매 맞고 쓰러졌다]든가, [ 죽일 의도를 가지고 살인한 것이다]라는 두가지의 전생 발언은 재판에서의 하미의 주장과는 정 반대인 것이다.[죄를 모하티하미에게 뒤집어 씌우러 하였었다]는 발언에 대하여는 약간 덧붙여서 말해 들 일이 있다.

이발언 중에 나오는 [메니케네 집의 식모]에 관하여서인데, 이 식모는 실제 재판 때에는 소환 받은 일이 없었는데 [재판 기록에 나와 있지 않으니까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재판이 진행되던 때에는 이미 하미는 죄를 모하티하미에게 전가시킬 생각을 포기하고 말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마도 피고로 서기 전까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식모에게 발각되었던 것을 생각해내고는 이 생각을 포기한 모양이다.

재판리록에서 밝혀진 바에 의해서 위저라트네의 전생 발언에 착오인 것으로 나타난 것은 [매니케의 오른쪽 가슴을 찔렀다]고 하는 발언이다. 검시 보고에 의하면 메니케는 왼쪽 옆구리 밑 부분에 몇군데 상처를 입었고, 특히 세 군데의 칼 자국은 등 뒤로부터 흉벽을 뚫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찔린 쪽은 왼쪽 가슴이었다. 이 기억의 착오는 아마도, 자기 자신의 현재의 몸 오른 쪽 가슴에 나타난 업보의 자국을 전생의 살인 행위와 결부시킨데 따른 것이 아닌가 짐작되고 있다.

8. 시동생이 살인범임을 알 수 없었던 이유

이제 독자 제위에게 세일론 사람들의 살인에 대한 사고방식에 관해서 설명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세일론에서는 살인을 비록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한 것을, [있을 수잇는 일]이란 식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그래서 그 범인이 꼭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그 벌은 내생에 반드시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 곳의 믿음이다. 철저한 업보 사상인 것이다. 휠씬 뒷 날의 이야기이지만 위저라트네 자신도 나에게.[ 결혼한 처가 나와 함께 집에 가는 것을 거부하게 될 때나 역시 그대로 두지는 않을 것이다]는 말을 하여 은근히 하미의 살인 행위에 대하여 긍정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이므로, 자기들의 마을 밖에서의 살인 사건 같은 것은 별로 화제에 올리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이 벌어진 시기에는 이 지방 또는 티럴라트네의 부인의 고향에는 신문이 없었으므로, 이 부인인 후르탈이 시동생의 살인 사건을 모르는 상태로 시집오게 되었다는 것을 있음직한 일인 것이다.

9. 아버지는 전생 발언을 억제하였다

틸러라트네는 위저라트네의 전생 발언을 억제하려고 애썼다. 한 때에는 아들을 먼 곳으로 보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메니케네 유족으로부터 혹시 보복같은 것이 있을까를 두려워하여서 그랬다고 한다. 마트레이야 스님의 조사에 응하게 된 것도 오직 스님에 대한 대접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편인데 어떻게 아들에게 일부러 자기 아우의 살인사건등을 이야기해 준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위저라트네의 전생 발언 가운데에는 정부의 [극비 정보 ]라는 사형의 집행방법 까지도 자세히 들어 있는 것이다.

10. 몸에 나타나 있는 업보

이쯤 해서 우리는 이 소년의 업보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1961년 나와 만났을 때에 14살인  이 소년의 오른 쪽 가슴 윗 부분에는 세골밑에 직경 2인치 가량의 오목한 흉터가 있었다. 이 부분의 피부는 죽은 피부처럼 보였으며, 근육도 그곳은 아주 불완전한 상태로 보였다. 오른쪽 팔 길이 그전체가 몸 전체에 비해서 분명히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왼팔보다 몇 인치가량 짧았고 굵기도 반 인치쯤 가늘었다.  오른쪽 손은 모두 한데 붙어 있어서 그 끝쯤에 손가락처럼 보이는 짧은 것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오른손의 손가락은 왼손의 손가락의 제 1관절 끝부분 정도의 길이박에 되지 않는 것이다. 엄지손가락만이 손바닥으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여느 손가락은 모두 붙어 있었다.

11. 미결수로서의 생활

이야기가 뒤로 뒤돌아가지만, [하미는 메니케를 죽인 뒤에 발랑고다거리로 연행되어 갔다]고 위저라트네가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 곳에서 재판에 회부될 때까지 2년동안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발랑고다는 우갈칼토타(위저라트네 소년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큰 거리이다. 여기에는 당시에 미결수 감방이 있었던 모양이다.이것은 확인되지 못한 정보이지만, 아마도 이소년의 발언은 정확한 것 같다. 그러나 2년 동안 기다렸었다는것은 분명한 착오이다. 왜냐하면 사건의 발생은 1927년 10월 14일의 일이었고, 재판은 다음 해 6월 12일에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착오는 미결수로서 대기하던 기간이 몹시 지루하였을 것을 감안하면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된다.

오랜시간을 기다렸던 재판이건만 그 재판의 결과는 피고인에게 있어서 완전히 절망적이었다. 위저라트네도 전생 발언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12. 사형 선고를 받고 그 집행을 받을 때까지의 한달동안  하미는 감방에서 어떻게 지냈었던가? 그때의 광경을 그려보기로 하자. 

염주를 손에 들고 승복을 입은 열 명정도의 스님들이 열심히 독경하고 있다. 향 내음과 그 연기가 주위에 자옥하다. 독경은이미 몇 시간이나 계속된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은 절이 아니다. 콘크리트벽과 철창으로 둘러싸인 장소, 그리고 철창속에서 합장한 채로 독경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죄수- 이곳은 사형수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이다. 하미의 사형 집행 직전에 형 틸러라트네는 부처님전에 참회하는 법회를 이 곳에서 열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 형님,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죽을 수밖에 없는 걸요. 저는 오히려 형님이 걱정이예요, 꼭 돌아올께요.]이러한 광경은 위저라트네가 4살 때에 마트레이야 스님에게 말한 사형 집행 직적의 회상이다. 위저라트네는 이 법회에 동참한 열 명 스님의 이름과 그중의 어른되시는 분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한다

13. 사형이 집행되던 날

위저라트네의 전생 발언에서 밝혀진 사형 집행일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교도소 들로 하미는 끌려 나왔다. 손은 등 뒤에 묶여 있고, 주위에는 집행인과 교도소의 책임자 몇명이 함께 있다. 하미를 위한 최후의 독경이 어느 한 스님에 의해서 아까부터 계속되어 오고 있었다. 이미 각오하고 있는 하미는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집행관 한 사람이 하미의 등을 밀었고 하미는 묵묵히 형틀에 올라갔다. 이어서 목에는 줄이 걸려졌고, 다른 한 사람의 집행관은 얼굴을 검은 보자기로 씌웠다. 독경이 계속되는 가운데 사형수가 앉아있는 마루가 주저 앉고 하미의 몸이 공중에 매어 달렸다. 이 때에 하미는 형에 관해 걱정하였고, 자기자신은 불타고 있는 구덩이 속으로 빠져드는 것으로 느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형집행의 과정은 사실과 같으므로 진실한 것으로 믿어지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 생각했었다고 하는 것은 당사자의 말을 믿을밖에 딴 방법이 없다. 그러나 불구덩이에 빠지는 것으로 느꼈다고 하는 것은 죄인이 지옥에 떨어진다는 불교적 신앙의 표현임이 틀림없다.

위저라트네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형될 때 내 나이는 스물 세살 또는 네살 이었고, 형님은 서른 살쯤 되었었다.] [두 살 되던 때에 지금의 아버지가 전생의 형님인 것을 알게 되었는데 , 그때까지는 사형 집행 뒤의 일을 아무 것도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 사실의 진부는 어떠한가?

하미는 1904년 생이고 사형 당시에 24세였으니 정확한 것이다. 그리고 [ 사형 집행 뒤의 일]이라고 한 것은 이사람의 [중간적 전생]을 뜻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자기가 현생에 지금의 몸으로 태어날 때까지 그 중간 과정에서 새로 태어났었다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사람 아닌 단 생명체로 탄생한다는 말은 불교인들 사이에서도 별로 기이하게 들리는 말이 아닌 듯하다. 우리 서양 사람들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확인할 방도가 없으니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지 모르겠다.

14. 전생에 매고 있던 허리띠

또 하나의 다른 초상적 증거를 하나 보고하겠다. 그것은 이 소년이6~7세 되었을 대의 일이다. 사촌 한 사람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사람의 바지에 매어 있는 허리띠를 보더니, [저 허리띠는 내 것인데]하더란다. 그래서 이 사촌이, [ 이것은 내가 어렸을 적에 아주 오래전에 우리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인데 어떻게 네 것일 수 있니?] 하고 위저라트네의 말을 부정 하였다.

그런데, 분명히 이 허리띠는 이 사촌이 어머니로 부터 아주 오래 전에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 전에는 죽은 하미의 것이었음도 사실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위저라트네로서 명확하게 [ 내것]인 것이다. 이때는 하미가 이 세상을 떠난 지 4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이 사촌은 오랜 세월 동안 자기가 매어온 이 허리띠가 자기의 것이라는 것을 한번도 의심해본 일이 없었다. 이 허리띠는 하미가 살인 사건을 저지르기 바로전에 위저라트네의 숙모 즉, 이 사촌의 어머니네 집에 갔다가 두고 온 것임이  밝혀졌다.

15. 뒷 날의 위저라트네

내가 1969년에 이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아직 고등학교에 재학중이었다. 나이는 이미 만 23세이었는데 학교에 재적중이었던 것은,  물론 대학으로 진학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이사람에게 정신적 질환이 있었던 게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 아버지는 소상인으로서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고 싶은 의욕이 강해서 여러차례 재수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1971년 5월에 드디어 세일론 대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내가 1973년 4월에 가서 만났을 때에는 그 학교에 재학중이었다. 그는 의학을 전공하기 위하여 자연 과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미 영어에 능숙하게 되어 나와는 통역 없이 서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었다.그리고 1969년에는 정신질환이 말끔히 회복된 상태였으며, 1971년 12월에는 외과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쳐서 손가락의 분리도 가능하게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