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문무 왕의 염원과 그 열매

권두수상

2009-06-04     관리자

민족통일을 이룩하여 세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던 겨레를 하나로 뭉쳐서 화합과 풍요와 평화로운 하나의 조국을 처음으로 실현할 수 있었던 문무왕의 대업 성취는 물론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필연적인 많은 요인들이 작용해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요인으로 문무왕 스스로의 신불심과 원효. 의상 등 당시 고승들의 교화 활동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경오년도 저물고 신미(辛未)의 새해가 다가왔다. 그처럼 남북의 온 겨레가 열망하던 통일이 한 걸음 더 앞으로 가까워진 셈이다.
그러나 민족의 통일이 겨레의 희망과 열기만으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근 40년의 나라 빼앗긴 억눌림에서 벗어났다고 깃발 흔들며 그렇게도 기뻐했던 해방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에 나라가 동강나는 비극 속에서도 비 온 뒤 버섯처럼 정당만 생겨나고 서로 물고 뜯던 일이 엊그제 같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라 찾는 일이 빼앗긴 물건 찾듯 쉽지 않았던 거와 같이, 갈라진 민족이 하나로 뭉치는 일도 그저 되어지는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야기 다 접어두고라도 과연 오늘의 이쪽저쪽 우리네 현실이 진정 하나의 조국실현을 가능하게 할 여건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노인으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에 따라 울고 웃어야 하며, 세계가 다 아는 아시안 게임의 전적 순위마저 천연덕스럽게 자기네가 2위를 했노라고 우기는 그 풍토에 얼마만큼의 민족통일이 수용되겠는가. 또한 화염병과 최루탄과 시위와 파업과 흉포한 범죄사건들이 뒤범벅된 이 사회병(社會病)을 근본적으로 치유하지 않은 현재상태에서 어찌 조국통일의 주역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답답하면서도 희망을 찾아야 하는 이 시점에서 서서, 옛날 이 땅에 처음으로 민족통일을 이룩한 문무왕과 당시의 신라를 잠시 되돌아 본다.
문무왕은 대략 다음과 같은 뜻의 유언 (遺詔, 三國史記 新羅本紀 7文武王 21년) 을 남기고 있다.
과인이 어지러운 시대에 전쟁의 때를 만나 서쪽(百濟)과 북쪽(高句麗)을 쳐서 영토를 넓히고 원근을 다독거려 편안하게 하였으므로, 위로는 조종의 돌보심에 위안하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묵은 원한을 갚게 되었다. 공이 있는 자에게 두루 벼슬을 고루 내렸으며, 무기(兵器)를 녹여 농기구(農具)로 삼아서 백성들을 잘 살게 하였다. 세금과 부역을 줄여서 집집마다 풍족하고 민간이 편안하여 나라안에 근심이 없으며,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차고 감옥은(죄인이 없어서)잡초만 무성하다. ……

또 산과 골은 변천하고 세대는 옮겨져서 吳王(孫權)의 무덤에 빛나던 금 향로(金鳧)도, 위주(魏主 曹操)의 무덤에 이름높던 (동작대 銅雀臺)도 모두가 소용없이, 옛날의 만기총찰하던 영주(英主)도 끝내는 한 무덤의 흙이 되고 만다.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곁에 구멍을 뚫으니, 야단스런 장례의식은 한갖 자재(資財)만 낭비하고 인력만 헛되이 괴롭혀서 죽은 영혼도 제도하지 못한다. 생각할수록 마음의 아픔을 금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일은 나의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숨을 거둔 뒤 10일에는 곧 고문(庫門)밖 뜰에서 인도식(佛敎儀式)으로 화장할 것이며, 복기(服期)의 경중(輕重)은 본래 법도가 있지마는 상(喪)의 제도는 검약을 따르도록 하라.

변방의 성과 진새(鎭塞) 및 각 고을의 과세(課稅)는 긴요한 것이 아니면 모두 폐지하고, 율령과 격식도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쳐서 시행하라.
즉,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은 전쟁에 쓰인 무기를 녹여 생산수단의 농기구로 만들었으며, 부세와 잡역을 줄여서 백성들이 편안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정치를 잘 하였으므로, 나라 안에 도둑과 범죄자가 없어서 감옥은 텅 비어 잡초만 무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였기 때문에 자신의 시신을 산과 같은 왕릉에 묻지 말고 불교식으로 화장해서 동해에 뿌려주기를 원했고, 행여나 불필요한 과세나 율령 격식이 남아있다면 즉시 없애거나 고치게 하였다.

문무왕은 또 평소에 자주 지의(智義) 법사에게 말하기를,
“짐의 이 몸이 죽은 뒤에는 호국(護國)의 큰 용이 되어서 불법을 숭봉(崇奉)하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원한다.”라고 하였는데, 그는 사후에 과연 동해의 호국룡이 되어 신라를 지켰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동해의 호국룡이 된 문무왕은 천신(天神)으로 되돌아간 김유신(金庾信)의 신령과 함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내놓아 통일후의 신라로 하여금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였다는 설화까지 전하여 주고 있다.
그 젓대를 한 번 불면 병난(兵亂)은 물러가고, 질병(전염병 등)은 낫게 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장마에는 날이 개이며, 폭풍에 바람 자고, 성난 파도는 잔잔해 진다는 것이다. 세상의 파도는 어려움과 거센 물결을 이 젓대 한 소리로 말끔히 잠재운다고 해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는 바로 통일된 이 땅이 길이 평화롭고 번성하기를 바라는 문무왕의 큰 원력(願力)과 호국애민(護國愛民)하는 그 성덕(聖德)을 기리고, 또 그로부터 누리게 된 통일 전성기의 안정과 번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구가(謳歌)한 이야기로 볼 수 가 있다.

그와 같이 민족통일을 이룩하여 세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던 겨레를 하나로 뭉쳐서 화합과 평화로운 하나의 조국을 처음으로 실현할 수 있었던 문무왕의 대업(大業) 성취는 물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마는, 거기에는 필연적인 많은 요인들이 작용해 있었을 것으로 볼 수기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요인으로는 문무왕 스스로의 신불심(信佛心)과 원효, 의상 등 당시 고승들의 교화 활동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백제의 고토와 고구려의 땅을 차지하고도 신라마저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설치하여 삼키려고 하는 당나라 군사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명실공히 민족통일을 완성하였던 문무왕은 후환을 염려하여 외교(外交)와 내치(內治)에 힘쓰는 한편 변두리에는 많은 성을 쌓았고 또 나중에는 서울(慶州)둘레에 새로운 성을 쌓으려 착수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의상(義湘) 법사가 사람을 시켜 글을 보내기를,
“국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땅금을 긋고 성으로 삼아도 백성은 감히 넘나들지 못하며 재앙이 없어지고 복업(福業)이 길 것이오나, 정치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長成)이 있어도 재앙과 폐해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글을 본 문무왕은 즉시에 성 쌓는 공사를 중지함으로써 백성들의 고역을 덜어주었다고 한다.

왕이 존경하여 의상에게 전답 장원과 노복을 바쳤으나 그는 하나도 받지 않고, 평생을 옷 한벌과 물병과 바릿대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다. 당시 원효(元曉) 대사는 서민의 행색으로 통일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교화하여 집 없는 거지나 코흘리개 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을 알고 삼보에 귀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의 위화감(違和感)을 없애고 지역(고구려,백제,신라) 감정을 조화하는데 큰 몫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 밖에도 명랑(明朗) 신혜(信惠) 의안(義安) 지의(智義) 등 고승이 문무왕의 대업을 도운 것으로 보이며, 또 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김유신도 철저한 불교신앙인이었다. 그러한 여건들 속에서 문무왕의 통일 염원은 실현되었고, 그 절실한 원력의 열매로써 한 백여년동안 평화롭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전성기를 누릴 수가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