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에 사랑의 매

빛의 샘 – 새해

2009-06-04     관리자

새해 첫 날, 새벽 1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안방으로 불려와서 바지가랭이를 잔뜩 걷어 올린 채 서 있었다.
“아버님, 오늘은 설날입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아직 집에 안들어 갔습니다.”
“그 애들은 자기 집 규범을 따르겠지. 너는 우리 집 규범을 따라라.”
다시 안 그러겠으니 용서하라면서 빌 줄 알았다. 그런데 당당하게 변명이다.
쫙-. 금새 피멍이 든다. 두 대… 열대쯤 때렸을 것이다. 얼마나 아플까? 그래도 잘못했다는 말은 없었다.
“가서 자거라. 그리고 자동차 키를 당분간 내라 보관하겠다. 법을 제정한 국가대신 내가 벌을 주겠다.”
밤이 새도록 아들의 방문 틈으로 새어나는 흐느낌 소리는 나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아들이 연기자라는 이유 때문에 나는 너무나 큰 것을 아들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지 마라. 담배 피지 마라. 운전 조심해라. 등등…
공인(公人)이라는 멍에를 아들에게 씌우면서… 청소년들은 마치 이들의 모든 것이 절대적인 기준인 양 모방한다. 아들이 생활을 최대한으로 절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회에 책임 의식을 가져 줄 것을 강하게 제고시켜 왔다. 잘 따랐다. 2학년에 진급하면서 세번째 어긴 것이다. 설날이다 참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가 있다. 언젠가 제 놈의 매 맞은 다리의 아픔보다 때려 준 아비의 가슴이 더 아팠으리라고 이해 할 때가 있을까? 이래서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이쁜 자식 매 하나 더 때려 주라고 어른들은 일러 주었을까?
나에게도, 내 아들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설날 아침 매 맞았던 기억이 있다. 해방 다음해였을 것이다.
밥상 앞에서였다. 설날 아침 밥상 위에 밥 한 톨 없고 해방떡(콩가루로 빚은 떡, 해방 된 덕분에 먹게 된 떡, 고마움 보다는 지겨움이 스며있음)만 놓여 있었다. 나는 먹지 않고 버티었다. 심통마저 부리면서 … . 양곡사정이 무척 어려운 때였다. 그러나 사정을 알리 없는 나이였다. 설날 아침에도 비린내 나는 해방 떡을 먹는다는 일만 매우 지겨웠을 것이다.
종아리가 몹시 아팠다. 마주 친 어머니의 눈에 가득 찬 물기를 보면서 나도 공연히 슬퍼지던 기억이 지금도 또렸하다. 그리고 이 기억은 1. 4 후퇴로 피난와서 십년 가까이 온갖 어려움을 이기게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 속의 물기의 의미를 나는 나의 아들을 때리면서 처음 알았고, 나의 매맞은 종아리보다 어머니의 가슴이 더 쓰리고 아팠으리라는 것도 이해 할 수 있었다. 사랑의 매라는 표현으로 위로하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에 인색한 요즘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너무나 많은 구실 때문에 참된 사랑의 매가 자취를 감추려 하고 있다. 정성과 성의가 자취를 감추려 하는 것이다.
사태를 바로 뚫어 보지 않으면 안될 때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대 범죄 전쟁선포를 아무리 높은 소리로 외쳐 보았자 공염불이다.
무엇이 먼저인가는 자명한 일이다. 가정구성원 서로 사이에 믿음을 회복하는 일. 이웃간에 믿음 회복하는 일. 믿음 속에서 윤리, 도덕성이 소멸될 리 없다.
윤리, 도덕이 회복 되어지는 사회. 새해의 소망이다. 내 아이들에게 참고 견디는 힘부터 길러주고 규범을 지킬 줄 알게 이끌어 주는 일을 선행하면서. 佛光

이학종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영남신문 기획의원. 문인협회 회원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