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방] 통도사 극락선원장 명정 스님

경허집, 한암집 낸 명정스님 , 영산회상이 따로 없다.

2009-06-04     관리자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통도사가 자리한 영축산의 모습이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셨던 인도 땅 영축산의 모습과 어쩌면 저리도 흡사하게 생겼을까. 지극한 불연(佛緣)의 땅, 우리의 선사스님네들이 깨달음의 빛 증득하여 열반락을 누렸으니… 대자연의 오묘함이 빚어놓은 예지(叡智)가 참으로 놀라웁기만 하다.
무풍교(無風橋)를 지나 맑디 맑은 계류가 연이어 있는 통도사의 푼에 안기는 순간부터 들뜬 기자의 마음은 바빠졌다. 눈푸른 납자를 친견하러 가는 길이매… 극락암은 울울한 송림 속에 사리(舍利)처럼 박혀 있었다.

“극락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노?”
경봉 스님의 따사로운 음성이 진 주홍 까치밥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원광재(圓光齋)에서 뵌 명정 스님, 냉정한 지성적 여유와 선기(禪機) 번뜩이는 해학이 인상적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더니… 난향(蘭香)보다 더 부드러운 것이 인간의 향기런가.
눈밝은 납자의 선사 스님네의 대한 남다른 사모의 정(情)과 후학을 위한 배려가 피워낸 책[경허집]과 [한암집]. 난해한 묵향 속에서 밤을 낮 삼아 정진한 명정 스님의 원력행은 분명 값진 결과를 낳으리라.

“한암 스님 원고를 작년 가을서부터 준비했지요. 비문, 책서문, 상당법어, 서간문 등이 담겨있어요. 올 4월쯤 끝내놓고 마악 숨돌리고 있는데 한암 스님께서 친필로 쓰신 [경허집]이 발견됐어요. 경허집은 한암 스님께서 초고를 하고 만공 스님께서 탈고를 해서 이미 43년도에 초간본이 나왔고 수덕사에서 번역본(‘81년도)을 내놓기도 했지요. 친필본과 대조해보니 원본에서 누락된 부분도 있고, 대동소이하더군요. 그전부터 경허 스님의 자취를 더듬고 싶었던 터라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지요.”
경허 스님과 한암 스님께서 남긴 오도 (悟道)의 육성이 생생하게 담겨 있는 이 두 권의 법어 집은 경오년 말미에 출간되어 신미년 새해 벽두부터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갈 지침이 될 것이다.

경허 스님(1849~1912) ; 시대적 격변기요, 민족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 태어나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9세에 경기도 광주군 청계사에서 계허화상을 은사로 출가하다. 계허화상이 환속한 이후 동학사 만화강백의 슬하에서 내외전을 섭렵, 그 이름이 팔도에 덜치다. 24세 되던 해 대중들의 바람으로 강사가 되어 개강하니, 학인들이 물흐르듯 몰려오다. 10여년 가까이 후학을 양성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 갔다가 큰 충격을 받다. 문자로서는 나고 죽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불교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한 발심을 하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피나는 용맹정진을 한 지 석달이 지난 어느 날 어떤 스님의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산하대지가 하나임을 깨달아 확철대오 하다. 잠겼던 방문을 걷어차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오도의 법열을 노래로 대신하니

문득 콧구멍 없다는 소리에
삼천대천세계가 내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없는 들사람 대평가를 부르네

스님이 나이 31세, 때는 기묘년(1880) 동짓달 보름 무렵이다. 그 후로 경허 스님은 해인사를 선두로 해서 범어사, 통도사, 화엄사, 송광사 등 처처에 선원을 열고, 정체해 가던 한국불교에 새 활력을 불어 넣다.
“만공, 해월, 수월, 한암, 용성 등 수많은 선지식들을 배출해서 수행가풍을 면면히 이어가게 한 조선조 말엽의 최대 고승이라”고 하면서 명정 스님은 오늘의 한국불교가 있게 된 것이 다 경허 스님의 덕화(德化)라고 한다. [경허집]속에 담겨 있는 스님의 행장, 비문, 서문, 사찰 창건기 등을 비롯하여 오언율, 칠언율이 보석처럼 영롱하다. 스님의 선시는 문자사리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한암 스님(1876~1951) ; 19세에 금강산 장안사 금월선사에게 득도하다. 34세에 맹산군 우두암에서 10년을 좌선 하다가 안광이 홀연히 밝아지다. 뒤에 경허 스님의 지도를 받고 법을 잇고, 1926년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가 종풍을 크게 드날리다가 열반에 들다.
“경허 스님 제자 중에서 한암 스님이 글을 제일 잘하셨지요. 불경은 말할 것도 없고 제자백가를 섭렵하신 학덕 높은 분입니다. 그렇게 맑으시고 검박하실 수 없어요. 대개 전쟁이 나면 다들 살겠다고 아우성인데 6.25사변 때 피난을 가자 해도 안 가시고, 꼼짝도 안하고 수행 하시다가 열반에 드셨습니다. 참으로 값진 열반이지요. “라고 회고하는 명정 스님의 말을 들으면서 문득 미당 서정주의 시가 떠올랐다. 제목은 ‘방한암선사’ 이다.

난리 나 중들도 다 도망간 뒤에
노스님 홀로 남아 절마루에 기대 앉다.
유월에서 시월이 왔을 때까지
뱃속을 비우고
마음 비우고
마음을 비워선 江南으로 흘려 보내고
죽은 채로 살아 비인 옹기 항아리같이
반듯이 앉다.
먼동이 트는 새벽을 담고
비인 옹기 항아리처럼 앉아 있는걸
收復해온 병정들이 아침에 다시 보다.

“야반삼경에 문빗장을 만져 보거라” 는 선구(禪句)를 남기고 열반에 드신 경봉 스님(1892~1982). 살아 생전 스님을 모셨고 지금도 스님의 도향(道香) 피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명정 스님께 그 뜻을 여쭈었다.
“입만 열면 그르치고 한생각 일어나면 천리만리 멀어지는 것이 이 집안 소식 아니요? 세상의 비밀은 남이 모르게 하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만, 부처님 비밀은 이미 다 드러내 놓았는데도 모르는 것이예요. 뒤집어 보여주고 귀를 뚫고 들려줘도 모르는 것이 부처님 비밀이라. 경봉 스님께서 열반하실 때 남긴 말씀도 그런 류에 속하는 것이니 설명 할 수 없지요. 직접 한번 만져보시오. 허허, 그 말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원각(圓覺)자리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보통 사람들이 모르니…”

“그렇게 자비로우시고 글 잘하시고 글 잘 쓰시고 사리에 밝고 법문 잘하고 도를 갖추셨던 분이 없어요. 근세에 우뚝한 분이라. 잘 생기고 키도 크셨지요. 얼마나 성실 하셨는지 19세 때부터 91세로 입적하실 때까지 예불 참석하시고 대중공양에도 안 빠지셨지요. 신도들한텐 알아듣기 쉬운 법문을 하셨는데 수좌들한텐 서릿발같이 엄격하셨어요. 수행하고 법문답하고 아주 득특한 가풍을 갖고 계셨지요.”
경봉 스님은 소변소에는 휴급소(休急所)라고 써 붙이고 대변소에는 해우소(解憂所)라고 써 붙였단다. 세상에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소변 참고는 일 볼 수 없으니 급한 일일랑 쉬어 가면서 하라는 뜻이요, 해우소 라는 말은 근심 걱정 우비고뇌의 썩은 욕심을 대변볼 적에 말끔히 비워 버리라는 말이다.

“우리 스님 최고 멋쟁이 도인이라. 큰 스님일 계속하고 있으니 지금도 시자라.”고 말하는 명정 스님은 원광재에서 주하면서 참선하고 집필하며 경봉 스님과 선사 스님네들의 향기를 이어가고 있다. 극락선원 선원장으로 20~30명의 납자들에게 경봉 스님처럼 많은 뒷받침을 해주고 있다고 귀띰 해주는 노 보살님의 미소가 정겹다.
“극락문밖에는 돌도 많고 물도 많으니까 돌부리에 걸려서 자빠지지도 말고 미끄러져서 옷도 버리지 말고 잘 가래이.”
영축산 전경이 다 잠긴 통도5경 극락 영지에 경봉 스님의 배웅하는 모습이 아슴프레 비쳐 오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