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偈二首

선심시심

2009-06-04     관리자
묵은 해니 새 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 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妄道始終分兩頭
冬經春到似年流
試看長天何二相
淨生自作夢中遊

작자는 학명(鶴鳴) 선사(1867~1929)… 영광 불갑사(靈光 佛甲寺)에 출가. 금화스님의 법을 잇다. 역자는 석정(石鼎) 스님.
석정 스님의 선게(禪偈) 번역은 정평이 나있지만, 특히 이 시는 명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첫 구절을 직역한다면, - 어리석은 사람들은 노상 매사를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 이렇게 될 것이다. 그것을 스님은 제2구의 뜻과 어울리게 ‘묵은 해니 새 해니 분별하지 말게’ 하고 의역했으니, 시의 대의(大意)는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날 수 밖에 없다.
그렇다. 따지고 보면 묵은 해가 어디 있고 새 해가 어디 있나? 그렇게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미혹의 분별심>이 있을 따름이지, 묵은해가 따로 있고, 새 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이 아닌, 천박한 분별이 문제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을 끝내 집착과 미혹의 수렁에로 몰아넣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헛되이 잘못 분별하니까 마음이 갈라지고, 분심(分心)이 되니까 잡념이 끓게 된다. 번뇌 망상이 일게 된다.
이 시를 읽고 나서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다. <시간은 영원의 그림자>라는 말. 이 시에 있어서 저 변함없는 한결 같은 하늘이 <영원>의 은유라면, 춘. 하. 추. 동 사계절의 변화는 바로 시간의 은유라고 볼 수도 있으리라.
시간에 사로잡혀, 그림자에 현혹되어, 자칫 본말을 전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지어다. 그러자면 어서 꿈에서 깨어나라. 꿈에서 깨어나야 참 인생이 비롯될 게 아닌가. 하고 이 시는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밤마다 부처와 자고
아침 되면 함께 일어난다.
부처 간 곳을 알려거든
말하고 움직이는 곳을 살펴라.

夜夜抱佛眠
朝朝還共起
欲知佛去處
語默動靜止

작자는 부대사(傅大士)(497~569) … 양무제(梁武帝) 때 거사. 보지공(寶誌公) 화상이 미륵불 화신이라고 무제에게 소개함. <금강경 오가해>중의 한 사람. 역자는 석정(石鼎)스님.
부처란 더없이 바른 깨달음을 이룩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한 깨달음을 이룩한 사람은 누구나 부처다. 과거 칠불만이 부처인건 아니다. 이 시의 작자인 부대사도 부처임에 틀림없다. 보지공(寶誌公) 화상이 부대사를 무제(武帝)에게 소개 할 때, 미륵불 화신이라 한 것을 보아도 알 만하려니와 우선 이만한 시를 써낸 위인이 미혹한 범부일 리가 있겠는가.
<밤마다 부처와 자고 / 아침 되면 함께 일어난다> 이것은 그가 부처와 일심동체라는 암시인 것이다. 부대사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의 본래 면목, 자성(自性)을 바르게 깨닫기만 한다면, 그 순간에 그 사람은 부처인 것이다. 그와 부처는 둘이 아니다. 깨달은 사람의 어. 묵. 동. 정.은 다 부처 성품의 표현인 만큼 언제 어디서나 활불(活佛)의 면목이 약여 할 것이리라.
그런데 진정 깨달은 사람이면, <내가 곧 부처다. 부처를 보려거든 나의 일거일동을 보라> 할 리가 없다. 만약 누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그가 사이비임을 스스로 폭로한 것일 터이므로 밑천도 못 건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이 시는 어디까지나 암시적인 표현을 통해, 즉 겉으로는 나와 부처를 둘로 구분 지으면서도, 실은 둘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는 점이 이 시를 시이게, 즉 설득력과 재미를 아울러 갖게 만든 비결이라 할 수 있다.

박희진 : 시인.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였으며
‘55년[문학예술]지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 하였다.
[시집으로 [아이오와에서 꿈에] [라일락 속의 연인들]
[산화가]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