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망명수기 <7> 우리 이웃 중국

티벳 불교 총수이며 국가원수인 비구 달라이 라마의 망명 수기 : 내 나라, 내 겨레

2009-05-26     달라이 라마

제4 우리 이웃 중국

내가 몇해동안 통치하는 사이에 전에 없이 우리들의 주권이 갑자기 중요하게 됐다. 전설부터 말하자면, 티벳은 아무도 내 것이라고 주장한 바 없는 눈덮인 산과 숲속의 호수였다. 사람이 생기고 그 중에서 우두머리가 된 자들이 다스렸다. 이 때가 2천년 전이다. 그 후 40세대의 왕들이 전승되었다. 27대에 우리의 토속신앙이  나라 안을 휩쓸었다.

그 다음 왕 때 불교가 소개됐다. 그로부터 5대째 불교가 뿌리를 내렸다. 사신을 인도에 보내서 문자를 배워오게 하고 티벳 글이 생겼다. 왕은 종교에 대한 10가지 공공질서와 16가지 칙서를 내렸다. 중국과 네팔의 공주가 왕비로 왔다. 이들이 갖고온 불상중 하나를 라사에 처음 도착한 4살 때 경배했다. 인도에서는 불교 뿐만 아니라 문물을 많이 배워 국력도 신장됐었다. 그 후 36대 왕 시절 중국과 싸움이 생겨 우리가 중국땅 7지방을 정복했다. 이 때를 기념하는 석주가 포탈라궁에 있다.

그 다음에 왕은 인도에서 고승을 청해 처음으로 티벳 사람을 출가시켰다. 40대 왕은 다시 중국과 전쟁을 하게 돼 이번에도 중국땅을 정복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승려가 휴전을 시켰다. 이 때 두 나라 글로 국경비를 세우고 앞으로는 싸우지 않기로 한 내용을 두 나라 대궐 앞에도 세웠다. 이 시절의 왕인 33, 37, 40대 세 임금을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존경 한다.

그러나 41대 왕은 불교를 없애느라고 6년간 전력하다가 죽고, 그 왕의 두 왕자가 서로 싸워서 대신도 두 패로 갈라졌다. 여기서 또 분파가 나오며 근 4백년 지리멸렬 하였다. 13세기 우리나라 고승이 중국의 왕사로 갔다오며 티벳 내의 세 지역 통치자가 됐다. 그 후 1백년 가까이 그의 문도들이 20명 왕으로 내려오고, 다시 90년 가량 딴 문도가 11명 왕 노릇을 했다가 재가인이 왕으로 앉았으나 2백년 지나며 달라이 라마의 교정일체를 집권하는 시초가 됐다.

그 후 3백년 이상 10명의 달라이 라마가 계승되며 공석은 섭정들이 잠시 했다. 제5대 달라이 라마가 청나라 황제의 초청으로 중국을 다녀오며 계속 두 나라 사이는 달라이 라마를 통한 교분으로 지속됐다. 그외의 국제적 활동은 바로 전임 제 13대가 앞서 말한대로 군대도 신식으로 만들고 외국에 유학생도 보내고 수력발전도 하고 우표발행 전보설비, 새 금은 주화 지폐도 내고 사원 교과목도 바꿨다. 외교적으로 티벳이란 나라가 공인된 때이기도 했다.

19세기 말 영국이 무역을 명목으로 자주 국경분규를 만들고는 협상을 티벳과 할까? 중국과 할까? 망설이다가 1893년 중국과 멋대로 티벳 남부무역권을 체결했다. 영국이 국경표지라고 해 놓으면 우리는 빈번이 뽑아버렸다.

영국이 항의하면 중국과 따지라고 일축했다. 화가 난 인도  총독이 티벳은 중국과 주종관계라며, 1903년 라사에 진군했다.

티벳군은 패배하고 달라이 라마는 동부로 피하고 이듬해 라사에서 영국과 화평을 했다.

영국의 보호국 꼴에 달라이 라마 도장을 섭정에 찍었다. 영국은 재빨리 중국, 소련에게 티벳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내막은 인도에 있는 영국사람이 중국과 담판하고 영국에 있는 소련사람과 했다. 종주관계라는 단어는 서양사람들이 썼고 중국과 우리는 그런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데 영국과 서명까지 한 중국이 1910년 라사로 입성하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영국 보호를 받게 됐다. 

이듬해 중국에 내란이 나고 청나라로 새 중국이 되느라 티벳 주둔군 내부에서도 분란이 생겼다. 새해에 티벳은 중국군을 전부 몰아냈다. 그리고 1950년 중공이 다시 찾아왔다.

인도에서 돌아온 달라이 라마는 독립국이라고 선포하여 중국이 선물한 옥새대신 자국민이 바친 것을 썼다. 공문에 [중국황제 어명에 따라]를 [부처님 뜻으로]라고 바꾸었다.

그리고는 또 외부와 단절하고 틀어박혀 문서상으로 아무것도 증서를 챙기지 않았다. 그런데 1913년 영국은 인도에 불러놓고 [중국에겐 티벳 자치를 동의하라] 우리에게는 [종속관계를 동의하라]고 구슬렀다. 중국은 거절하고 영국과 우리만 서명했다.

그리고 중국은 동의 서명을 하지 않는 한 아무 특권이 없노라고 선언했다.

티벳은 중일전쟁에도, 세계대전에도 참가하지 않고 중립으로 지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군수품 통과도 거절했다.

1947년 인도에서 아시아 국가회의를 개최할 때 티벳 국기도 게양했다. 같은 해 인도가 독립하여 우리에게도 외교관계는 타국에 한대로 유지한다고 알려 왔다.

1948년 티벳 여권으로 인도, 중국, 불란서, 이태리, 영국, 미국에 무역사절단을 아무 거리낌 없이 순방시켰다. 1934년 전임자가 입적하자 중국은 문상이랍시고 와서 국경문제를 꺼냈으나 우리는 네팔, 영국, 인도 대표처럼 대접하다가 1949년 쫒아냈다. 옛날 서로 공방전 하느라 두나라 사이를 드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티벳이 중국땅이라는 근거는 없다.  근년 국제법률가위원회도 밝혔지만 1959년 국제연합에 제출한 내용을 몇 줄 인용하겠다.

1912년 중국이 물러난 후의 티벳은 분명히 독립국이며, 중국에 예속된다는 법적 근거는  없다. 따라서 1912년 후부터 중국법에서 벗어난 완전한 주권국이다.

 

홍교 김일수 옮김 
마하보디협회 한국지부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