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가람 터를 찾아 5 - 흥법사

불교문화산책 95

2007-01-16     관리자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꽃 소리. 개미취와 구절초는 나이 먹은 거북 주위를 뒤덮고, 순례자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놓지만 마른 꽃가지 꺾이는 슬픔은 달랠 수 없다. 조금씩 다가오는 가을은 빈 절터를 먼저 찾는가 보다.

▲ 진공 대사 탑비 귀부 및 이수(眞空大師塔龜趺 및 賂首),고려 초(940 ), 보물 제463호
흥법사의 내력
『고려사절요』 「태조신성대왕」조에 “왕사 충담(忠湛)이 죽으니 원주 흥법사에 탑을 세우고 왕이 친히 비문을 지었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태조 23년 (940)에 이미 사찰이 창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조선 정조13년 기유년(1789) 5월 이덕무와 박제가에게 편찬을 명한 『청장관전서』 제55권 「앙엽기 2(沒葉記二)」 흥법사 비후(興法寺碑後)조에 흥법사를 자복사(資福寺)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에 건국 초 태조가 전국에 국가와 백성의 복을 비는 자복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흥법사가 고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의 주인공 충담은 진공(眞空)스님의 속명으로, 그는 신라 말 당에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 신덕왕(神德王)의 왕사(王師)가 되었으며, 고려 태조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 기록에는 경문왕대부터 고려 초까지 활동한 또 한 분의 진공 스님이 있는데, 영풍군 비로사에 남아있는 진공 대사보법탑비의 주인공이다. 두 인물이 어떻게 같은 법명을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비로사의 진공 스님이 선법을 배우기 위해 진전사를 찾아가 도의 스님의 탑에 예를 올렸다는 기록은 자못 시사하는 바 크다. 공교롭게도 흥법사에 반출된 우리나라 시원형 부도의 주인공 염거 화상 역시 도의 선사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 흥법사지(興法寺址), 문화재자료 제 45호
▲ 흥법사 석등대석(興法寺 石燈臺石), 고려 초
채마밭으로 변해버린 절터
흥법사의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와 서거정(1420~1488)이 젊은 시절 흥법사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15세기 중엽까지는 사세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비의 귀부만이 전하고 있다.
삼층석탑은(사진4, 보물 제 464호) 통일신라 전형양식을 계승한 일반형탑으로, 지대석 위로 하대석과 면석을 1매의 돌로 만들었다. 기단 각 면에는 우주나 탱주의 모각 없이 3구씩의 안상만이 조각되어 있는데 내부에 꽃문양을 세장하게 조식하였다. 탑신은 기단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어 고려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진공대사탑비(사진1)의 비문은 고려 태조가 짓고 최광윤(崔光胤)에게 명하여 당 태종의 글씨를 모아서 조각한 행서체(行書體)의 집자비이다.“미인은 박명한다.”는 말이 있다. 빼어난 서체에 매료된 선비들이 나투어 찾았으며, 종국에는 탁본의 욕심을 누르지 못하고 파손되고 말았다. 귀부는 원주지역의 그것보다는 고달사지의 모습에 가까우며, 이수에는‘眞空大師’라는 4자의 전액(篆額)이 있다. 이 외에 1931년 진공 대사 부도와 석함(사진2)이 서울로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을 지키고 있다. 팔각원당형으로 원형에 가까운 중대석에는 용의 몸체가 살아 숨쉬는 듯 웅건하게 조각되어 있다. 한편 부도와 함께 옮겨진 석함은 경문(經文)을 봉안했던 것인데, 뚜껑까지 완비한 희귀한 예이다. 흥법사의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와 서거정(1420~1488)이 젊은 시절 흥법사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15세기 중엽까지는 사세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비의 귀부만이 전하고 있다. 삼층석탑은(사진4, 보물 제 464호) 통일신라 전형양식을 계승한 일반형탑으로, 지대석 위로 하대석과 면석을 1매의 돌로 만들었다. 기단 각 면에는 우주나 탱주의 모각 없이 3구씩의 안상만이 조각되어 있는데 내부에 꽃문양을 세장하게 조식하였다. 탑신은 기단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어 고려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진공대사탑비(사진1)의 비문은 고려 태조가 짓고 최광윤(崔光胤)에게 명하여 당 태종의 글씨를 모아서 조각한 행서체(行書體)의 집자비이다.“미인은 박명한다.”는 말이 있다. 빼어난 서체에 매료된 선비들이 나투어 찾았으며, 종국에는 탁본의 욕심을 누르지 못하고 파손되고 말았다. 귀부는 원주지역의 그것보다는 고달사지의 모습에 가까우며, 이수에는‘眞空大師’라는 4자의 전액(篆額)이 있다. 이 외에 1931년 진공 대사 부도와 석함(사진2)이 서울로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을 지키고 있다. 팔각원당형으로 원형에 가까운 중대석에는 용의 몸체가 살아 숨쉬는 듯 웅건하게 조각되어 있다. 한편 부도와 함께 옮겨진 석함은 경문(經文)을 봉안했던 것인데, 뚜껑까지 완비한 희귀한 예이다. 흥법사의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와 서거정(1420~1488)이 젊은 시절 흥법사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15세기 중엽까지는 사세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비의 귀부만이 전하고 있다. 삼층석탑은(사진4, 보물 제 464호) 통일신라 전형양식을 계승한 일반형탑으로, 지대석 위로 하대석과 면석을 1매의 돌로 만들었다. 기단 각 면에는 우주나 탱주의 모각 없이 3구씩의 안상만이 조각되어 있는데 내부에 꽃문양을 세장하게 조식하였다. 탑신은 기단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어 고려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진공대사탑비(사진1)의 비문은 고려 태조가 짓고 최광윤(崔光胤)에게 명하여 당 태종의 글씨를 모아서 조각한 행서체(行書體)의 집자비이다.“미인은 박명한다.”는 말이 있다. 빼어난 서체에 매료된 선비들이 나투어 찾았으며, 종국에는 탁본의 욕심을 누르지 못하고 파손되고 말았다. 귀부는 원주지역의 그것보다는 고달사지의 모습에 가까우며, 이수에는‘眞空大師’라는 4자의 전액(篆額)이 있다. 이 외에 1931년 진공 대사 부도와 석함(사진2)이 서울로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을 지키고 있다. 팔각원당형으로 원형에 가까운 중대석에는 용의 몸체가 살아 숨쉬는 듯 웅건하게 조각되어 있다. 한편 부도와 함께 옮겨진 석함은 경문(經文)을 봉안했던 것인데, 뚜껑까지 완비한 희귀한 예이다. 흥법사의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와 서거정(1420~1488)이 젊은 시절 흥법사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15세기 중엽까지는 사세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비의 귀부만이 전하고 있다. 삼층석탑은(사진4, 보물 제 464호) 통일신라 전형양식을 계승한 일반형탑으로, 지대석 위로 하대석과 면석을 1매의 돌로 만들었다. 기단 각 면에는 우주나 탱주의 모각 없이 3구씩의 안상만이 조각되어 있는데 내부에 꽃문양을 세장하게 조식하였다. 탑신은 기단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어 고려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진공대사탑비(사진1)의 비문은 고려 태조가 짓고 최광윤(崔光胤)에게 명하여 당 태종의 글씨를 모아서 조각한 행서체(行書體)의 집자비이다.“미인은 박명한다.”는 말이 있다. 빼어난 서체에 매료된 선비들이 나투어 찾았으며, 종국에는 탁본의 욕심을 누르지 못하고 파손되고 말았다. 귀부는 원주지역의 그것보다는 고달사지의 모습에 가까우며, 이수에는‘眞空大師’라는 4자의 전액(篆額)이 있다. 이 외에 1931년 진공 대사 부도와 석함(사진2)이 서울로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을 지키고 있다. 팔각원당형으로 원형에 가까운 중대석에는 용의 몸체가 살아 숨쉬는 듯 웅건하게 조각되어 있다. 한편 부도와 함께 옮겨진 석함은 경문(經文)을 봉안했던 것인데, 뚜껑까지 완비한 희귀한 예이다. 흥법사의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와 서거정(1420~1488)이 젊은 시절 흥법사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15세기 중엽까지는 사세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비의 귀부만이 전하고 있다. 삼층석탑은(사진4, 보물 제 464호) 통일신라 전형양식을 계승한 일반형탑으로, 지대석 위로 하대석과 면석을 1매의 돌로 만들었다. 기단 각 면에는 우주나 탱주의 모각 없이 3구씩의 안상만이 조각되어 있는데 내부에 꽃문양을 세장하게 조식하였다. 탑신은 기단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어 고려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진공대사탑비(사진1)의 비문은 고려 태조가 짓고 최광윤(崔光胤)에게 명하여 당 태종의 글씨를 모아서 조각한 행서체(行書體)의 집자비이다.“미인은 박명한다.”는 말이 있다. 빼어난 서체에 매료된 선비들이 나투어 찾았으며, 종국에는 탁본의 욕심을 누르지 못하고 파손되고 말았다. 귀부는 원주지역의 그것보다는 고달사지의 모습에 가까우며, 이수에는‘眞空大師’라는 4자의 전액(篆額)이 있다. 이 외에 1931년 진공 대사 부도와 석함(사진2)이 서울로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을 지키고 있다. 팔각원당형으로 원형에 가까운 중대석에는 용의 몸체가 살아 숨쉬는 듯 웅건하게 조각되어 있다. 한편 부도와 함께 옮겨진 석함은 경문(經文)을 봉안했던 것인데, 뚜껑까지 완비한 희귀한 예이다.

▲ 흥법사 진공 대사 부도와 석함, 고려초(940), 보물 제365호

이 외에 흥법사에서 반출되었다고 전하는 염거화상탑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으며, 절터에는 중문지로 추정되는 곳에 초석과 자연석을 정교하게 쌓아올린 축대가 남아있다. 조선시대 서원까지 들어서 철저하게 파괴된 절터엔 수령 500년은 됨직한 팽나무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흥법사를 다른 것에 비유한다면 헌책방과 견줄 수 있을 게다. 먼지 수북이 쌓인 종이무덤 속에 지혜의 정수를 담고 있는 곳. 폐사는 헌책방과 같은 곳이다. 죽어있던 놈들이 금시에 자리차고 일어나는 그런 곳이다. 높게 갠 가을하늘 아래 옛터엔 고즈넉함만이 더하고, 바람은 애꿎게도 들풀을 춤추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