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부탄 5 협곡의 최대사원 통사죵

불국토 순례기/청정불심의 나라 부탁5

2009-05-22     관리자

대장관을 이루는 통사죵(Tongsa Dzong)은 왕가선조 전래의 죵으로서 ‘통사강’에 이르는 험한 산중턱에 여러 층에 걸쳐서 건립되어 있다.  원래 1648년 ‘가왕.남걀’이 건축한 이 죵은 그후 여러 번에 걸쳐서 확장되어 오늘날에는 20개 이상의 사원이 집약된 최대의 죵이다. ‘가왕. 남걀’이 두륵파의 유력자의 가계로부터 원조를 받아 주요 고을에 큰 ‘죵’을 즉, 요새겸 승원을 건설한 것중에서 가장 큰 죵이 통사인 것이다.

죵은 종교계 및 세속권력의 중심이 되어 오늘날 눈에 가장 띄는 경관이 된것이다. 1639년 ‘가왕. 남걀’은 티벳인을 상대로 대승리를 거두어 ‘샤부도웅’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사람들이 복종한다.’ 혹은 최고의 종교권력자를 의미하며 부탄의 세속계와 종교계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그는 왕국을 통일하고 다시 점령지를 통합했다. 또한 16개의 교리를 의미하는 ‘웅가, 쥬도우마’라는 목제의 도장을 새겨서 그의 16개의 교의를 세상에 넓게 펴나간 지배자였다.

통사로 가는 길은 가장 험난한 길이어서 일찍 출발했다. 험한 계곡을 아슬아슬하게 꼬불꼬불거리며 계속 전진하는 동안 길가에는 아낙네들이 도로포장을 위한 돌을 깨거나 길옆의 수로를 정리하는 비참한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한 가족이 집단이 되어 도로보수를 맡아 천막을 치고 그곳에 산다. 이러한 모습은 이미 인도, 네팔, 티벳과 같은 후진국에서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점인 것이다.

얼마후 노브딩(Nobding)이라는 삼거리에 도달했다.  한적한 고산지대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계속 전진하면 통사로 가는 길이고 우회전하여 산악으로 향하면 강티 사원(Gangtey Gompa)으로 가는 길이다.  험난한 코스였지만 한 곳이라도 더 촬영할 욕심으로 강티 사원으로 가기 위해 비포장도로의 산길로 들어섰다.

한참 굽비굽이 올라가니 점차 산세가 험해지고 북향이어서 눈과 얼음으로 인해 차가 전진하기가 어려웠다.  산의 경사면에는 잔설과 야크(히말라야의 전형적인 들소)가 몇 마리 풀을 뜯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그중 가장 큰놈을 골라서 서서히 접근했다.  가까이 접근해도 꼼작않고 필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므로 안삼하고 더 접근한 것이 화근이었다.

셔터를 몇 번 누르는 사이에 야크가 갑자기 경사면에서 뛰어내려 정면공격을 해왔다.  재빨리 몸을 날려 도망가는 순간 발을 헛디뎌 수 미터의 언덕 아래로 거꾸로 떨어졌다.  이때 카메라만 휴대 안했어도 큰 부상을 면할 수 있었으나 무의식 중에 카메라를 아끼는 마음으로 가슴에 안고 떨어지는 바람에 얼굴에 중상을 입었다.

이가 부러지고 코가 찢어지고 우측 이마와 뺨에 큰 부상을 입었다.  응급처치도 못하고 흐르는 피를 겨우 멈추게 한 후에 죽으나 사나 목적지를 향해서 또 전진했다.

그러나 갈수록 길이 얼어서 차바퀴가 헛돌아 올라갈 수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큰 부상만 당한 채 되돌아 섰다.  상처가 아프고 피는 흘렀지만 히말라야 산골에 병원이 있을 리가 없다.  할 수 없이 계속 전진하면서 통사로 향했다. 통사에 가까이 갔을 때 그곳에 마침 자원봉사자가 봉사하는 작은 보건소가 있어 겨우 상처부위에 소독을 하고 밴드를 붙이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높은 산을 숨가쁘게 넘어서 계곡으로 나아가니 높은 언덕에 이 나라 최대 사찰인 통사죵이 위용을 뽐내며 언덕에 우뚝 솟아 있다.  성곽과 벽은 흰색이고 지붕은 노란색이어서 더욱 화려하고 멀리서도 잘 보였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 죵은 내일 보기로 하고 험악한 자갈길을 텅텅거리며 올라서 쉐라브링 모텔(Sherabling Mo-tel)에 투숙했다. 

경치 좋은 언덕 위에 있어서 통사종과 눈덮인 히말라야가 한눈에 조망되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자려 했지만 상처 부위가 계속 쑤셔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통사죵은 경사면에 굽이굽이 이어져 있어서 넓게 보이지는 않지만 건물이 계속 이어져서 부속 건물이 많았다. 

이곳은 많은 수도승과 고승들이 웅거하는 곳으로 스님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언제나 이들은 친절하고 낯설은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접근하여 말을 걸었다. 또한 나의 몰골을 보고 근심어린 표정으로 부상의 연유를 묻기도 했다. 서투른 이 나라 말로 부상 경위를 설명하자니 더욱 고통스러웠다.

경내의 건축양식은 통사의 경우 거의 전화를 입지 않아서인지 1600년대 ‘가왕. 남걀’이 축성한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빌딩 7~8층에 버금가는 높은 건물을 토벽과 나무로만 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토벽은 금간 데가 한 곳도 없는 것을 보면 이들의 건축술은 옛부터 아주 뛰어난 것으로 느껴진다.

이 죵은 난공불락의 요새로서 역할도 하는 것이다.  건물의 남.동.서쪽은 깍아지른 절벽이고 북쪽만 겨우 통로가 있으며 큰 문만 닫으면 1~2년은 포위되어도 끄덕없이 버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고전적인 외관과 큰 안뜰, 아름다운 화랑, 아름답게 단청된 목조물은 아침햇살에 찬란함을 고조시킨다.

마을은 항상 이 죵을 중심으로 주변에 형성된다.  통사 마을은 죵의 위치와 비슷한 급경사면에 점포와 주택이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제일 커다란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식당은 주방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  예쁘게 생긴 젊은 여인이 있어 안내자에게 물으니 이집 딸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주방에서 우리에게 줄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집 남편은 누구냐고 하니까 저쪽에 아기를 업고 있는 나이든 사나이를 가리키며 이 집 가족은 티벳에서 이주한 사람인데 여자가 가장이고 남편이 넷이라고 한다.  둥그레진 나의 눈을 보고 이들의 생활관습이라 대답한다.  이곳에서 이틀을 머물고 동쪽으로 향해 나의 여정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