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집착에서 ‘랑페르(지옥)’가 펼쳐진다

불교영화산책 4

2007-04-30     관리자

지난 해 연말에 개봉한 ‘랑페르’는 핀란드 출신 다니스 타노비치 감독의 작품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일본, 베트남이 공동으로 제작한 이 영화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서 영감을 얻어 폴란드 출신인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생전에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랑페르’는 불어로 지옥을 뜻하는 말이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사랑과 욕망을 통해서, 마음의 집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 바로 지옥이라는 상징을 드러낸다.
삶의 고(苦)를 일으키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집착이다. 그 집착이 마음에 일어날 때 우리는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무시하고 그것의 소통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이 모든 마음의 집착을 지속하게 한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의 집착과 단절의 고통, 그것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영화 ‘랑페르’속의 지옥은 사람이 죽은 뒤에 가는 지옥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단절되고 집착하는 마음이 머무는 곳, 바로 그러한 현실이 삶을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게 하는 지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음의 습관
그리스 신화 ‘메디아의 비극’을 연상하게 하는 영화 속 어머니와 세 딸의 비극적인 삶은 아버지의 외도라고 오해하는 사건에서 시작된다. 둘째딸 셀린느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연구실을 찾았을 때, 아버지 앞에서 알몸으로 서 있는 소년의 모습은 그 자체로써 아버지의 외도로 확실시된다. 아내와 딸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밝히고자 하는 아버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사건 이후 세 딸은 가족으로서의 소통마저도 거부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녀들 역시 어머니의 삶으로부터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다. 큰딸은 의심과 의혹으로 괴로워하다가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채고 배신감으로 살고 있고, 둘째딸은 누구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막내딸은 친구의 아버지이며 지도교수인 유부남을 사랑하면서 금지된 사랑에 대한 이별을 두려워하며 스스로 마음을 옭아매고 있다.
어느 날 둘째딸이 유일하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된 청년 세바스티앙으로부터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다. 세바스티앙은 바로 셀린느의 아버지 앞에서 알몸으로 서 있었던 그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셀린느가 엄마와 함께 사무실로 왔던 그 시간에 알몸으로 자신의 사랑을 구애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고백한다.
딸들은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리지만, 병원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그녀는 아무 표정 없이 당시 자신의 생각에 전혀 후회 없다고 말할 뿐이다. 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고, 진실이 밝혀져도 자신의 마음의 습관을 바꾸지 못하는 어머니의 삶을 반복하고 있는 딸들의 삶은 어머니의 마음의 집착에서 이미 예견된 비극이라는 것을 영화는 굳이 숨기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본 현상에 대한 어떤 질문도 답변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본 것에 대한 순간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남편의 대화도 단호하게 거부했었다.

마음의 자유…
직접 목격한 순간의 현상에 대한 집착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삶, 특히 가족의 삶을 파괴하는 근원이 된다. 여성에게 가혹한 영화라는 것을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지만, 이 영화에서는 삶을 바꾸기 위해 마음의 최대의 적인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없다.
영화에서 세 딸들의 사랑과 삶은 질투와 의심으로 변한 큰딸의 사랑을 레드(red)로, 누구와도 소통을 원하지 않고 폐쇄적인 둘째딸의 소심함을 블루(blue)로,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막내딸 안느의 사랑을 그린(green)으로 구분하고 있다. 프랑스의 국기에서 영감을 얻어 자유, 평등, 박애의 뜻을 가진 ‘블루’, ‘화이트’, ‘레드’의 영화를 만들었던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에 대한 오마주(hommage, 영화에서 존중의 표시로 다른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것)를 타노비치 감독은 놓치지 않는다.
특히 영화를 보는 동안 ‘블루’에서 남편의 죽음 후 그리움과 고통으로 지내던 줄리가 얻은 자유를 생각하게 된다. 남편에게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과 정체를 알고 난 후, 그녀는 비로소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던 그리움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줄리가 선택한 용서는 그녀가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으로, 우리 삶에 던져진 비극을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구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랑페르’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도 없으며 마음의 지옥으로부터 자유를 얻지도 못한다. 그녀들이 얻지 못한 마음의 자유, 즉 집착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의미는 영화 초반부에 다큐멘터리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자연 다큐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이 장면에서 뻐꾸기 새끼가 땅으로 떨어진다. 지나가던 남자는 그 새를 다시 둥지 위로 조심스럽게 올려놓는다. 그러나 그 새는 다른 새들보다 먼저 알을 깨고 나와 다른 알들을 둥지로부터 밀어내려다 자신이 떨어진 것이다.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그 남자의 선행이 있은 후 그 새끼 새는 다시 다른 알들을 밀어내려다 자신이 땅으로 ‘퍽’ 하고 떨어진다.
직접 본 현상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마음의 자유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지옥과 같은 삶은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긋나고 단절된 마음의 집착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영화는 확인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