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밝히는 등불] 안나푸르나 오르는 해종스님

설산(雪山)에 영근 깨달음의 빛, 안나푸르나 2봉(7,937m)과 4봉(7,525m)오르는 해종 스님

2009-05-22     사기순

'단추 하나만 누르면 만사가 OK’인 전자동 시대, 그저 편안한 게 최고라는 사고방식이 팽배해지는 이즈음,‘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어서 중생제도 할 원력으로 발심 출가한’스님 네들의 삶은 참으로 고결해 보인다.

그러나 현대의 분주한 일상사는 스님 네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어찌 하다 보니 출가 당시의 마음과는 십만 팔천 리가 되어 있더라.”는 몇몇 스님들의 말씀이 오히려 진솔하게 여겨질 정도니 여러모로 도 닦기는 힘든 세상인가 보다. 스스로의 실존의 의미를 깨닫고 이 세상에 한 치의 빛이라도 더하기 위해 용맹정진 하는 수행납자가 그리운 오늘, 안암동 개운사에서 해종 스님을 뵌 것은 행운(?)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듯하다. 작년 사월 초파일,‘스님이 최초로 히말라야 고봉(高峯)인 메라픽(6,476m) 정상에 올랐다.’고 하여 교계와 세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진 해종 스님. 부처님 빛 뿜어내는 설산(雪山)에서 담아온 그 내면의 이야기는 온갖 답답증을 확 뚫어주는 청량제로 다가왔다.

“타성에 안 젖자니 너무 힘들고 타성에 젖어 살자니 부끄럽기 그지없고… 발심 출가한 마음을 곧추세워 비구답게 사는 길이 어떤 것인가? 번민도 많았습니다. 처처가 불국토요 일마다 부처님 일 아닌 것 없지만, 좀 더 가까이 부처님의 진실생명력을 느껴 보고 싶어 떠났지요.”십수년전 해인사에서 출가, 해인사 강원에서 경전공부를 하고 봉암사, 송광사, 통도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하가 오대산에 자그마한 토굴을 마련해서 수행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이치로는 홀가분한데 현실로는 얽매여 답답증이 풀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대자비 가르침을 일러준 적도 있건만 어느 한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망각의 상태가 찾아 왔다. 안으로는 더 궁금해지는데 밖으로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전을 봐도 큰스님 설법을 들어도 별반 감응아 없는 무감각 증세는 참으로 큰 병이었다. 지독한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스치는 영상이 히말라야였다. 부처님께서 수도하셨던 수행자들의 근본적 고향이자 일찍이 모든 인류의 시원을 이루는 영산(靈山) 히말라야.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 실린, 부처님의 설산수도 상을 보면서 강력한 이끌림을 받았는데,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기 위한 상황에서 히말라야ㅏ 그리워진 것도 다 큰 인연의 소산이겠지요” ’88년의 일이었다.

가진 거라곤 하나도 없었던 스님은 무작정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무전만행을 떠났다. 첫 목적지로 일본을 택했다. 일본을 알기의해, 또 경제적으로 넉넉한 나라이니 경비를 벌기도 쉬울 거라는 계산속에서였다. 일본서 8개월여 체류하는 동안 햄버거 집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공사판에서 벽돌을 나르기도 했다. 그렇게 경비를 마련하는 한 편 틈틈이 산행을 즐겼다. 일본을 떠나 홍콩을 경유해서 본래 목적지였던 히말라야에 도착한 ’89년 봄이었다. 히말라야, 그 품안에 뛰어들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산이었다.

히말라야를 본 순간 속 앓이가 순식간에 풀어지는 후련함을 맛보았다. 히말라야는 침묵 속에서 무정설법(無情說法)을 하고 있는 신비의 명산이었다.“애당초 등반 계획은 없었습니다. 단지 히말라야만 바라만 보고, 인도 성지순례를 할 예정이었는데… 첫 눈에 반했다고나 할까요. 바라만 볼 게 아니라 올라가 보자는 생각이 간절한 걸 어쩝니까? 무턱대고 올랐지요.” 때마침 카트만두에는 한국등바대(에델바이스 산악회 초오유 정찰대)가 있었다. 그들을 따라갔다. 10일간의 카라반 끝에 남체에서 헤어져 다시 혼자가 되었다. 로부제에서 고락셉으로 넘어가는 4,800m의 고개에서 고소(산소가 부족해 심장에 물이 고이는 증세)를 겪었다. 구토, 두통에 오한까지 겹쳐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을 때 한 이스라엘 여행자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자 또 올랐다. 몇 번 길을 잃는 곡절 끝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터에 닿았다. 산을 오르면서 수많은 성자들이 왜 설산고행을 했는지 그 답은 저절로 얻어졌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극한 상황, 생사의 갈림길에 던져지니까 화두가 순일하게 잡혔다. 극도에 달해서 생명을 건 무아(無我)의 경지에서는 무엇이든지 다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다.

그저 막연히 동경했던 히말라야는 이제 가장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 공부를 이끌어 주고 때론 경책을 가하며 선장시켜주는 선지식이었다. 그 후로 본격적인 등반 곧 처절한 구도행각이 새롭게 시작된다. 1년에 1,000m씩 높이는 산행을 작정하면서 카트만두로 돌아와 인도 성지순례에 나섰다. 인도인들의 눈빛은 깊은 사색을 담고 있었다. 영혼이 위대한 나라였다. ’90년 4월 비밀리에 출국하여 ‘나의 산’이라는 뜻의 메라픽 등반(6,476m)에 불교인 최초로 성공, 그 감회를 이렇게 말했다.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엔 허탈 하더군요 한 십 여분 지나니까 그렇게 평온할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메라픽 정상에서 맞기 위해 강행군 했다. 고소 증세로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잠 한잠 못 잤지만 그대로 정진에 들어갔다. 등반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며 셀파들이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생사도 없는데 교소 따위야’하면서 극복해냈다. 희박한 산소, 매서운 추위, 몸을 날리는 강풍, 밥 한 술 먹지 못하는 악조건을 견뎌가면서 이룬 산행은 무엇보다 값진 것이었다.

“산행은 곧바로 수행의 길입니다. 수 십 번도 죽을 고비가 닥쳐오는 과정에서 냉철한 지혜와 직관의 힘이 요구됩니다. 자연적으로 화두가 순일하게 잡힙니다. 또한 산행에는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가르침이 절절히 배어있습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보시가 없이는 등반의 성취를 바랄 수 없단다. 산악인들의 말로 하면 팀 웍이다. 셀파나 포터에게 의복이든 음식이든 똑같이 베풀어 한 마음으로 등반해야 목표 성취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계율을 지키듯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몸과 마음가짐, 뼈를 깍는 인욕정진,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던지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선적 경지와도 같은 행보, 무턱대고 걷기만 하면 영락없이 죽음의 그림자는 다가오니 알고 있는 지식과 지혜를 총 동원해야 한다. 산행은 수행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 관계이다.

그래서 해종 스님은 많은 스님 네들과 불자들에게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산행을 권유한다. ‘히말라야의 위대한 침묵 속에 들어 가보면 내면의 헐떡거림이 쉬어질 것이요, 영산에서 기른 진취적인 기상은 이 민족 번영에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해종 스님은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민족통일의 간절한 염원을 안고 우리 시대 가장 절박한 불사, 통일 교두보가 되고 싶다. 해종 스님은 오는 8월 중순에 출국하여 안나푸르나 2봉(7,937m)과 4봉(7,525m)을 오를 것이다. 안나푸르나 2봉은 성공률 16.7%밖에 안 되는 험산, 재작년 9월 21일 영남대 산악회의 김용규 ․ 정갑용 대원을 앗아가 한국인에겐 죽음의 산으로 각인된 곳이다.

안나푸르나에서 산화된 영혼들을 천도하고 불교인 최초ㅗ 7,000m를 넘어설 해종 스님. 이미 정초에 출국해서 안나푸르나 정찰등반 및 훈련을 했다. 6월 한 달 동안은 제주도에서 마지막 트레이닝을 했고 7월에는 장비 구입에 들어간다. 그 경비가 적잖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여쭙자 “뜻이 있으면 길이 있겠지요”라는 한마디.‘산행이 곧 수행이고 그 산행에서 체득한 깨달음의 빛을 우리네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니 큰 불사(佛事)가 아니겠는가’ 불사의 동참발원 불자를 부르고 싶은 기자의 바램이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