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천년의 고찰 동축사(東竺寺)

고사의 향기 수행과 교화의 두 바퀴를 힘차게 굴리면서

2009-05-21     관리자

한반도의 척추 태백산맥이 남으로 내리뻗어 화엄의 성지 부석사를 가만히 싸안고, 아래로 서라벌에 이르러저 이름마저 찬란한 불국사, 석굴암, 기림사등 신라 천년의 가람들을 이룩해 놓았다. 태백산맥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힘차게 남으로 뻗어 동대산맥을 이루어 놓는다. 이 동대산맥이 용트림 하듯 남쪽으로 치달려 무룡산(舞龍山)을 이루고 다시 바윗돌이 마치 정결한 물에 씻은듯 흰 얼굴을 드러내고 삼(森)때 처럼 서 있는 마골산(麻骨山)에 이르러 그 몸을 방어진 푸르른 바다를 향하여 선다.

이 마골산 산정에는 천사백여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불타의 혜명(慧明)을 의연하게 지켜온 동축사가 있다. 숨가쁜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향화(香火)를 밝히고 푸른 동해바다를 향하여 부처님의 성덕과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실천해 온 이 거룩한 기도도량이 이룩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일연(一然)스님이 지으신 「삼국유사」 황룡사 장육조(丈六條)에 보면 「신라 제 24대 진흥왕 즉위 14년(553) 2월, 새로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지으려할 때 기기에 황룡이 나타났다. 그후 이를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사라 하고 진흥왕 30년에 담을 쌓아 17년말에 완성하였다.

▲ 고려시대 양식으로 보이는 삼층석탑

얼마 아니가서 남해에 한 거선(巨船)이 떠와서 하곡현(옛 울산의 칭호) 사포(絲浦)에 닿은지라 조사하여 보니 첩문(諜文)이 있어 이르되, 서축 아쇼카왕이 황철 오만칠천근과 황금 삼만푼을 모아서 장차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며 축원하기를 '인연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을 이뤄달라 하여 한 부처님과 두 보살상의 모형까지도 같이 실어 보냈다.

현리(縣吏)가 문서로 자세히 아뢰니 왕이 사자를 시켜 그 고을 성내의 상서로운 땅을 골라 동축사를 세우고 그 삼존을 안치하였다.

금철을 서라벌에 실어들여 진흥왕 35년 3월에 장육존상을 주조하여 잠깐 사이에 성취하니 무게는 삼만오천근으로 황금이 일만일백구십팔푼이 들었다. 그것을 황룡사에 안치하였더니 이듬해에 불상에서 눈물이 흘러 발꿈치까지 이르러 땅이 한자 가량이나 젖었다. 그것은 대왕이 돌아가실 조짐이었다.

불상이 다 이루어진 뒤 동축사 삼존불상도 또한 황룡사에 이안(移安)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하여 동축사는 창건 되었다.

언제나 오랜 역사는 숯한 이야기와 전설을 만들어 낸다. 특히 오랜 역사를 지닌 불교에는 많은 전설과 영험설화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동축사도 많은 이야기와 영험설화를 가지고 있는데 조선시대의 이야기로 이런 전설같은 이야기가 울산향토지에 전해온다.


▲ 새로이 단장을 한 종각

▲ 中庭에 부처님 사리를 모신 탑

 

「어느해 동지 때의 일이었다.

그 해 동지의 시는 새벽 인시에 들어 있었다.

서부동의 어느 집에서는 팥죽을 끓이느라고 한 노파가 부엌에서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날도 밝지 않은 첫새벽에 밖에서 사람 발자욱 소리가 나더니 기침을 하며 부엌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왠일일까? 들어오는 사람이 동축사의 상좌스님이었다.

"아이구 이 추운데 왠일이요. 어서 이리와 손이나 좀 녹이시요"하며 노파는 부엌앞 불 가까이에 자리를 내 주었다.

"보살님 우리 절에서는 정신이 부실해서 그만 불씨가 꺼져 팥죽을 못 끓일판이 났습니다. 그래서…"하고 스님은 말끝을 흐린다.

"불씨야 여기 안있소. 세상에 쯧쯧". 하며 금방 끓인 팥죽을 한그릇 떠 주며 기어이 먹고 가라고 하였다.

스님은 팥죽 한 그릇을 맛있게 다 비우고는 그릇에 불씨를 얻어 산으로 올라가 버렸다.

몇일 뒤의 일이었다.

동축사의 주지스님이 마을에 내려와서 우연히 노파를 만났다.

서로 합장예배하고 난 뒤에 "아이구 동지에는 세상에 그 추운데 상좌스님을 보내서 불씨를 가지고 가더니 팥죽을 잘 끓였습니까?"하고 물었으나 주지스님은 전혀 그 이야기를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상좌를 그 노파 집에 보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절에 돌아온 스님은 혹시나 하고 상좌승을 불러 물어보았으나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 노파가 거짓말이나 농담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이윽고 법당에서 염불을 하고 있었다. 염불을 하던 스님은 깜짝 놀랐다. 부처님 뒤에 시립하고 있는 한 보살의 입에 팥죽이 묻어있지 않은가. 스님은 너무 놀라와 염불하던 입이 굳어져 염불이 나오질 않았다.

절의 불씨가 꺼지자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부려 불씨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근처 마을에서 잘 알고 있는 전설같은 이야기로 동축사의 부처님과 산신각은 그 영험이 인근 도시에 까지 알려져 기도객이 끊이지 않으며 지금도 만일기도(萬日祈禱)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 역사를 지닌 동축사이지만 전해오는 유물을 많지 않아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유일한 조형물로 남아 지나간 영화를 알려 줄 뿐이다.

지금 현재 건물들은 현 주지스님이신 도암성묵(道庵省默)스님의 발원과 신도회장 김영주거사의 신행, 그리고 많은 신도들의 기도와 원력으로 이룩되었다.

본래 있는 대웅전 자리에 대웅전을 크게 다시 재건하고, 산신각, 요사, 종각을 비롯하여 중정(中庭)에는 부처님사리를 모신 석탑을 건립하는 등 도량 전체가 일신되었다.

최근에는 옛 종각이 기울어지므로 새종각을 완성하였고 제일교포 최봉화 청신녀의 기증으로 말사에서는 보기 드물게 사물(四物)을 갖추었으며, 어렵고 지난(至難)했던 동축사 진입로 도로공사를 끝내고 숙원 불사이던 동울산 포교원 장생사(長生寺) 건립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동안 울산은 방어진 쪽으로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여러 회사가 설립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었고 현대사회에 발맞추어 적절히 교화할 포교당이 없어 고심하던 중 주지스님의 원력으로 전하동에 부지를 마련하고 새로운 포교당과 유치원을 설립하여 이 지역 포교당과 유치원을 설립하여 이 지역 포교에 새로운 등불이 될 것이다.

따라서 동축사는 기도와 수행의 요람이자 새 시대에 발맞추어 새로운 교화사업에 진력함으로써 수행과 교화의 두 법륜(法輪)의 바퀴를 오늘도 힘차게 굴리고 있다.

▲ 포교당과 유치원을 설립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