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 半生과 元曉大師 <1>

초청 강연 요초

2009-05-20     관리자

 박성배 교수님은 동국대학교 교수로 계시다 미국으로 건너가신 후 11년 만에 학술회의 참가차 일시 귀국하였다. 불광회는 박교수님을 맞아 지난 1월 10일 환영 강연회를 가졌다. 이하에 강연 줄거리를 초약하여 싣는다.   -편집부-

  1  도미까지의 줄거리

  언제부터인지 나는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의학을 선택한 것도 남의 도움이 되자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책도 더듬는 중에 해방 후의 물결 속에서 사회주의 이론에도 깊이 탐닉하였었다. 그런데 사회주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불행의 원인은 제도악(制度惡)이므로 제도악을 사회주의 식으로 고치면 개인이 행복해 지고 사회가 평화로워 질 것이라는데, 현실적인 내용을 보면 많은 모순이 있어 크게 갈등을 느꼈다. 그런 중에 나는 심한 신경쇠약에 걸렸다. 그런데 남들이 절에 가서 수양을 하면 좋다고 해서 찾아 간 곳이 전남 대흥사(大興寺)였다. 그곳에서 시키는 대로 예불도 하고 독경도 했더니 어느듯 병은 나았다. 그 이후에 절에서 많이 듣던 큰스님. 선지식을 찾아 전국을 방랑하기도 하였으나 고생 속에서 진실을 찾는다는 경험 이상에 얻은 것은 없었다. 물론 내 눈이 어둡기 때문이었다. 다시 대흥사에 와서 참선도 해 보고 염불도 해 보다가 아무래도 대학은 나와야 겠다 싶어서 대학에 복귀했다. 그리고 남의 도움이 된다는 것도 불교학을 공부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학교를 불교대학으로 옮겼다.

  대학을 나와 강사가 되고 교수가 되면서 학생들과 함께 불교 신앙활동을 하였는데 거기서 불교세계의 존재를 믿게 될 계기를 얻었다. 그 하나는 보현보살의 세계를 알기 위하여 주야로 끊임없이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을 독송한 끝에 경(經) 한 자 한 자 속에서 경 전체를 보았던 일이다. 또 하나는 학생들과 더불어 구도행각 끝에 격심한 피로 속에서 빈사상태를 딛고 삼천배 정진을 한 것이다. 그때 나는 정말로 죽음을 넘어선 불가사의한 경계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불교를 공부하려면 불가불 저 경계를 깊이 체험하여야 하고, 출가생활에는 그런 세계가 열려 있다는 것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가정도 교단도 팽개치고 삼천배 삼칠일 기도 끝에 출가하였다. 그러나 두 딸에 대한 책임감과 죄의식에 못이겨 다시 대학으로 복귀하였다.

  그 후 일 년이 지난 1969년 3월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 택사스주 달라스에 있는 남감리교 대학에서 기독교를 공부하며, 기독교에서는 그 말할 수 없는 확신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알려고 했다. 기독교 공부는 정말 재미가 있어서 3년 간을 신나게 공부하였다. 그리곤 버클리대학으로 옮겨 6년간 불교학을 공부했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똑같은 어떤 문제의 추구였다.

  2  미국식 불교공부

  사실 처음에는 미국에서 불교학을 공부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미국식 방법을 가지고 동양학을 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버클리대학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시작하였다. 거기서 주로 공부한 것은 『아비달마 구사론』이다. 이 책이 소승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책이고 이것에 대한 이해없이는 대승불교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대승불교의 모든 교리가 아비달마 구사론의 잘못을 지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반야경도 연구했고 또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서양에 소개하는 목록학적인 연구도 계속했다. 6년을 있다가 77년도에 뉴욕주립대학에 취직이 되어 떠났다.

  3  고통을 이긴 기도

  미국에 처음와서 제일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는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책만 붙들고 있는 것보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더 좋겠다 생각하고 일자리에 뛰어 들었다. 그들과 사귀기도 하고 말도 익히고 돈도 벌 작정이었다. 여러 일을 했으나 그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어떤 무기공장에서 쇠를 녹이는 용광로 현장작업이었다. 12시간 근무에 녹초가 되고 견딜 수 없는 신체적 고통이 따랐는데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예전에 성철스님밑에서 죽을 고비를 무릅쓰고 삼천배를 했던 힘이었다. 『내가 삼천배도 한 사람인데 이것도 못견뎌?』하는 오기가 치밀어 왔다. 그리고 격심한 피로 속에서도 산더미 같이 쌓인 읽어야 할 책과 써야 할 페이퍼...

  나는 무던히도 어려운 고비를 싸워 나갔다. 어떤 때는 옆에 있는 콘사이스를 잡을 힘이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내게는 어느덧 부처님께 기도하는 버릇이 생겼다. 원래가 나는 타력신앙적인 사람이 아닌데 어려울 때마다 잠자리에 누우려 하면 나도 모르게 기도를 했다. 기도를 하며 어려움을 이기고 고통을 참아 나갔다.

  4  원효스님의 믿음

  뉴욕주립대학에 와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한국의 원효대사를 서양에 소개해 보고 싶다는 연구계획서를 학교당국에 제출했더니 승인이 되어 2만불의 연구비가 나왔다. 나는 원문을 영어로 번역하고 해설하였으며,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현대적 논리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특히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고 논문을 썼다. 그리고 논문을 학계 전문학자들에게 돌리고 그 분들의 비판을 받고 또 나의 답변을 가하고...

  이런 식의 연구방법을 썼다. 역시 내가 밝히려 한 것은 믿음에 관해서다. 서양에서는 믿음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다. 그런데 원효대사에게서는 그 믿음의 대상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원효스님은 대승기신론을 번역하면서 해설하기를 『대승이 믿음을 일으킨다. 믿음이란 대승의 작용이다. 대승이라는 체(體)의 작용이 신앙이다.』이런 식으로 해설했다. 원효스님은 『대승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어도 모든 것이 다  그 속에 있는 것, 모두가 그로부터 나오고 어떠한 표현도 대승 그 자체를 표현하기에는 부적당하다.』했다. 대승이란 말을 쓰는 것도 어찌하지 못하고 하나의 부호적인 의미에서 대승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무엇이냐 하면 대승의 용(用)인 것이다. 대승은 체(體)고 기신은 용이란 것이다. 그래서 믿음과 대승은 둘이 아닌 것으로 나타내게 된다. 이것이 원효에 있어 대승이며 믿음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이것을 번역하면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했다. 서양에 불교를 소개한 일본의 대학자인 스즈끼(鈴木) 박사는 대승기신론을 번역하면서 『대승에로 향하는, 대승에의 믿음을 일으키는 논이다.』라 했다. 서양에서는 믿는다 할 때 무엇을 믿는다 하는 대상을 두는 것이 특징이다. 『나는 신을 믿는다.』할 때에 그 『신』을 빼고 『마음』을 넣으면 마음을 믿는다가 된다. 이 마음 대신에 『대승』을 넣는 형식을 취했다. 이렇게 하면 대승은 믿는 대상이 된다. 대승을 그렇게 대상화 하면 원효대사가 생각한 대승은 체요 기신은 용이라는 해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게 된다. 나는 이 점을 착안하고 스즈끼의 다른 논문을 전부 뒤져 보았더니 승찬(僧燦)대사의 신심명(信心銘)을 번역할 때도 그런 식으로 마음을 믿는 것이라고 했다. 스즈끼박사는 항상 『IN』이라는 전치사 다음에 목적어 『MIND』를 넣는 식으로 번역을 했다. 그러나 참선도 많이 하시고 굉장히 높고 깊은 경전도 번역을 하신 스즈끼박사가 그 점을 모를리 없는데도 그렇게 한 것은 어쩌면 미국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했는지도 모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