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식이 없는 종교는 노예로의 길을 갈 뿐

풍경소리

2009-05-19     관리자

세계의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하는 근본문제를 두고 사관(史觀)의 논쟁이 지식인 사이에 이어졌다. 물론 그것은 근세 계몽시대에 서양의 선구적 지식인들이 종래의 생각 즉, 신이 그 뜻에 따라 세계의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기독교적 ․ 신학적 세계관과 역사관을 깨부숨으로써 시작된 일이다.
그들 지식인은 사람의 지성(知性)인 이성(理性)을 역사의 궁극적 결정요인으로 보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과 신뢰성을 제고했다. 그에 대한 보수 반동세력의 대응은 사람은 본래 이성적이지 못하고 역사는 소수의 영웅이나 엘리트가 이끌어 나가고 사람은 합리적이기보다 비합리적이며 전통이나 습속에 매인다고 강조했다. 그것도 일리는 있다.
여기에 더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물사관이라고 하는 인간조건의 궁극적 조건의 기본문제를 제기했다.
그러한 마르크스의 역사관은 그의 정의관과 진보에 대한 호소력과 함께 많은 지식인과 피압박 ․ 피착취 대중을 매혹시켜 왔다. 그러다가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지배적 지위를 쟁취한 부류가 마르크스의 이상과 이론을 왜곡 ․ 변질시키고 마침내는 그들의 기독권 체제가 무너짐으로써 마르크스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현재 세계의 역사와 사회를 움직여 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20세기의 우리 세태를 통해 다시 보는 일을 시도해 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현대세계에서 전쟁과 혁명의 요인이 되고 사회 변동에 격심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는 요인은 문화와 종교 그리고 민족이라고 하는 요소라 알고 있다. 종교도 하나의 문화적 범주에 들어간다고 하면 문화라는 요인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또 민족도 하나의 공동체를 문화적 동질성을 통해 이루는 인류의 집단의 개념이기 때문에 문화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세계의 역사나 사회생활에 대해 그것을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하는 요소가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좀 막연한 개념으로 보이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접근해서 민족과 종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남북으로 동강난 강토를 하나로 통일시키고 서로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민족을 하나로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종교와 문화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없다.

여기서 종교라고 할 때 그것은 국경과 민족의 장벽을 초월하는 인간 삶의 궁극적 문제에 대한 가르침의 체계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민족이라고 하는 좁은 생활단위보다 차원이 높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만 어떠한 종교일지라도 민족과 문화의 생활 단위 속에서 그 민족의 것이 되어야 참으로 그 민족의 종교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점에서 하는 말이다.
우리가 불교를 말해도 ‘한국 불교’를 말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한국 민족의 문화의 틀 속에 수용되어 한국의 것이 된 불교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인도의 불교나 버마(미얀마)나 태국이나 일본의 불교가 아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불교는 아니다. 여기서 손쉬운 예를 들어 본다.

필리핀은 3세기 반, 다시 말해서 3백 50년을 기독교 문화 속에서 기독교화된 나라이고 민족이다. 스페인이 300년, 미국이 50년을 지배하면서 완전할 정도로 기독교화시켰다. 서양 사람이 비기독교 ․ 미개인에게 ‘복음’을 전해준다고 하는 사명을 이상적으로 수행한 본보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필리핀은 어떠한 나라이고 민족인가. 1940년대에 미국은 필리핀을 극찬해서 아시아에서 미국식 민주주의의 ‘쇼윈도’라고 했다. 민주주의가 성공한 모범이라고 칭찬했다.

그런데 현대의 필리핀은 마르크스 독재로 시들어 버리고,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족벌세력이 나라의 부를 독점해 지배하는 부패한 사회이고, 미국 등 다국적 기업이 토착 매판자본과 야합해 민중을 착취 수탈하고 있는 제3세계 나라이고, 정치적으로 낙후된 나라로 알고 있다. 미국 양키문화의 온갖 쓰레기가 판을 치며 사회가 응집력과 자정력을 전혀 결여한 부패하고 타락된 사회란 인상이 주어져 있다.

사실 필리핀의 애국자인 역사학자이며 정치가인 레나드 콘탄티노가 쓴 『필리핀 민족주의론』을 보면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나도 모르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런가.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필리핀 사람이 서양의 문화에 동화되어 자기 문화 자체를 잃어먹고 문화적 노예가 돼 지금은 자기의 언어조차 없어져서 영어가 공용어가 되었으며 반면, 서민대중은 영어를 잘 해독하지도 못해서 선거연설을 할 때면 영어의 쉬운 단어로써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단어를 짧은 구절로 반복을 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정치의 질은 떨어지고 그러한 정치적 질의 하위수준을 악용하는 대중정치의 조작은 더욱 더 대중을 우민화시켜서 억압과 착취의 지배구조를 공고화시켜 갈 뿐이다.

그래서 필리핀의 정치는 미국의 국무성의 아시아과에서 좌우하고 필리핀에서 행세하는 엘리트가 되려면 미국의 명문대학을 나와야 하고 미국의 명문대학을 나올 돈이 있는 필리핀사람이라고 하면 열 손가락도 못 되는 필리핀 족벌세력의 가족의 일원에 속해야 한다.
대개의 서민대중은 소작농이나 하급 사무원이나 호텔의 보이나 호스테스 정도의 사회적 지위에서 만족하는 것이다. 이것이 절대빈곤 속에 허덕이는 절대다수의 필리핀 민중의 기독교문화의 혜택이고 그들이 누리는 복음이기도 하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필리핀의 카톨릭은 ‘필리핀 카톨릭’이 아니라 ‘스페인으이 카톨릭’이고 ‘필리핀의 기독교’는 필리핀의 기독교가 아니라 ‘미국의 기독교’였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기독교는 ‘필리핀 민족의 종교’ 간단히 말해서 ‘민족 종교’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 민족이 그나마 민족적 동질성을 지니고 민족종교를 지니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민족의 문화가 있었고 그 문화 속에 외래종교를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민족문화가 그러한 포용성과 수용성으로 풍요한 터전이 된 것은 문화가 민족의 생존과 진로에 대해 진취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래종교를 수용하는 종교성직자나 신도가 역사의식이나 문제의식이 있어서 그 종교를 통해서 민족생존에 주어지는 것과 주어질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끊임업이 따지고 나가지 아니하면 수동적 객체로 그치고 말며, 필리핀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처럼 민족 자체가 모래알처럼 흐트러져서 노예적 종속으로 전락하게 된다.
지금 우리 한국불교나 한국민중이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은 건전한 민족문화의 기풍을 가꾸어 나가며 외래의 문명을 우리 틀에서 수용해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일이다.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인이나 신도가 그 시대의 흐름 속에서 민족 생존의 진로에 대해 나름대로의 자기 몫을 해내려고 하는 의식과 의지의 주체성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문제의식’이라고 하고, 나아가서 시대흐름을 바라볼 때 ‘역사의식’이라고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마비되고 사회문제에 대한 사명감이 결여된 종교집단은 노예적 종속으로 전락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똑똑히 정신차려서 다시 깨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의 시기를 할 일 못한 채 지나서 때가 늦으면 결코 다시 돌이킬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