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아우성 소리

빛의 샘/봄을 가꾸는 마음

2009-05-19     관리자

긴 겨울을 겪고나면, 봄이라는 단어는 마치 고향의 소식이 가져다주는 향기마냥 달콤하기만 하다. 고향에서 봄을 제일 먼저 마중나가는 사람은 항상 어린아이들이었다.

개울의 얼음 녹는 소리가 요란해지고 들판에 푸른 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하면, 나는 또래 아이들과 함께 들과 산을 쏘다니며 봄소식을 찾아다녔다. 양볼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갈대잎에 손등을 찢기면서도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칡뿌리를 찾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항상 회초리를 들고 기다리셨다. 그러나 그 이튿날 허벅지의 회초리 자국이 채 아물기도 전에 나는 또래 아이들과 함께 다시 들놀이를 다니곤 했다.
그러나 이제 도시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자연으로부터 봄을 느끼지 못한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봄은 아무런 냄새조차 풍기지 않는다. 휑한 바람과 마냥 똑같은 지하철 레일 위를 오락가락하는 나에게 봄이 저 먼저 찾아와 인사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졸음이 오는 지하철 속에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이는 여학생의 하얀 브라우스와 청바지 밑으로 살짝 드러난 맨살은 문득 ‘아 봄이로구나’하는 소리가 목구멍으로부터 터져나오려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봄 손님들은 책을 사로 종로통을 나가기라도 하면 더욱 요란하다. 아직 단발머리의 소녀들과 콤비 양복을 입고 한껏 멋을 부린 사회 초년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는 금새 개울의 얼음을 모두 녹이기라고 할 것 같은 따뜻한 물줄기의 아우성으로 들린다. 그들의 마음을 어찌 30대 중반으로 들어서는 나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자율화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입시지옥과 사춘기의 마음 고생을 겪은 그들의 웃음소리와 새로운 호기심으로 이런저런 책을 집는 그들의 손 마디 마디는 들판의 푸른 싹들보다도, 고향 산마루에 피어나는 봄 아지랭이보다도 아름답다.

이러한 봄손님들을 맞이하는 나는 행복하다. 아직 강의실 찾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은 대학 신입생들이 새로 사귄 자기 또래 아이들과 함께 대학 캠퍼스를 오가는 모습 하나 하나는 봄소식을 찾으며 들판을 헤매던 어린 나의 모습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새로 산 듯한 청바지와 콤비 양복 윗도리, 그리고 화장기가 전혀 없는 여학생의 발간 볼은 봄나물의 푸릇푸릇함과 청순한 봄향기가 배어있는 모습이다.
새로운 봄맞이를 하려는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서면, 방금까지도 들렸던 그들의 봄의 아우성 소리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자연의 정적만큼이나 고요해진다. 그러나 그 고요함 뒤에 숨겨져 있는 소리없는 봄의 아우성은 그들의 또렷또렷한 시선 속에서 새어 나온다. 이런 진지한 시선들 앞에서 나는 어느새 옷매무새를 고치게 되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출발의 길목에 서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축복으로 받아들이고자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요즈음 나는 이러한 봄맞이를 꿈꾸는 행복을 빼앗겨 버렸다. 연일 신문의 1면 톱기사를 장식하고 있는 대학 입시부정 사건은 대학 새내기들의 파릇파릇한 봄의 아우성 소리를, 꿈꾸는 나를 꽁꽁 얼어붙게 해 생명의 싹이라고 전혀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겨울 들판으로 쫓아냈다.
백번 양보해서 불의를 저지른 대학내 직원들과 입시 브로커들, 그리고 돈을 들여서 자식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부모들을 ‘황금 만능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암적인 존재들이라고 치부해 두자. 그래도 여전히 나의 행복한 봄맞이의 꿈을 빼앗아가는 존재들이 남아있다. 그것은 돈을 주며 제자를 대리 시험장으로 몰고 간 소의 교육을 직업으로 가진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수백만원의 돈과 장학금을 명목으로 대리 시험장에 들어선 이제 막 대학에서 진리를 탐구하겠다고 발을 내디딘 학생들이다.

물론 선생들이 학부모로부터 돈을 받고, 대학생들이 과외 아르바이트를 통해 수맥만원을 벌어 유흥비에 탕진한다는 사실은 하나의 상식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나의 봄맞이 꿈을 앗아가는 것은 이런 소수의 암적인 존재들만은 아니다.
교육을 치부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참 인간이 되는 교육을 하고자 하는 다수의 선생들과 묵묵히 폭넓은 지식을 슴득하고자 노력하는 다수의 학생들이 늠름하게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적 실정이 나의 봄맞이 꿈을 앗아가는 주범이다.

그러나 나의 귀에는 여전히 대할 새내기들의 봄의 아우성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언젠가 그들의 희미한 소리가 겨울 내내 얼어붙은 들판과 눈 속에 파묻힌 쓰레기들을 모두 쓸어버리는 우뢰와 같은 폭포가 되길 기다리며, 나는 여전히 대학 새내기들이 지르늠 봄의 아우성 소리를 듣는 봄맞이의 꿈을 꾸련다.

장시기는 동국대, 경원대 영문과 강사. `90년대 이후 꾸준
히 문학평론 활동을 해오고 있다. 역서 『거꾸로 가는 마
차』외에 논문 「Sons and Lovers:예술과 삶의 존재양
식」「포스트모던시대의 미학적 인식」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