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과 존경이 넘치는 가정

특집/우리 사이 좋은 사이

2009-05-19     관리자

글을 싸달는 부탁을 받고 보니, 이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 좀 부족함을 느끼며 펜을 들었습니다. 내가 결혼한 지도 어언 44년이 되고 보니 지난 세월이 주마등같이 지나갑니다. 시모님 뫼시고 27년간 지내다 보니 며느리로서 부족한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님 뫼시고 지낼 때 하시던 말씀이 모두 좋은 명언이셨음을 내가 나이 들어가며 절실히 느끼며 어머님 밑에서 생활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장성하며 할머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며 저희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곁에서 웃지요. 출가한 딸들도 할머님 밑에서 좋은 말씀 듣고 자란 것이 저희 결혼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인지 두 딸 출가시키고 나서 두 아들 결혼시킬 때 딸들이 우리 어머니 무서운 시어머니일 거라고 걱정들을 하는 말 듣고 혼자 웃었지요.
언제나 저녁 식탁에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이야기할 때, 아들들에게 이루기를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생기면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당부를 했었지요.

12년 전 큰아들이 대학원 졸업반일 적에 어느 날 여학생을 데려왔습니다. 참하게 생기고 마음씨도 유순해 보이고 집안도 훌륭한 댁의 딸 같아 보였습니다.
여러 번 만나본 후 그 여학생에게 큰 과제를 하나 내어주었지요. 그 과제란 ‘항상 내 아들을 편안하게 해 줄 자신이 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은 쉬우나 그 편안함 속에는 부모, 동기간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 또 당사자들끼리의 화합, 집안 간에 우애있게 지내는 것, 또 아들이 사회 생활하는데 편안히 내조할 수 있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라 무척 어렵고도 힘든 과제였지요.
2개월 후 며느리감을 불러 내어준 과제에 대한 답을 물으니, “열심히 잘해 보겠습니다.”라는 대답받고, 우리 내외가 합의하여 며느리감으로 승낙했습니다.
그 이듬해 미국 유학 중이던 큰아들을 혼인시켜 며느리를 같이 떠나보내니, 객지생활 1년 혼자 하던 아들이 좀 편히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 흡족하였습니다. 작은아들은 제 형이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했던 여학생을 소개해주어 사귀어 오다, 어느 날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큰며느리 때와 똑같이 과제를 주었더니. 똑같은 대답을 해서 내 집 식구가 되었지요.

큰아들이 제 동생에게 부탁하기를 공부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부모님 모시고 같이 살아달라고 하여 작은아들도 흔쾌히 그러고 싶다고 하니 작은아들 내외는 결혼 후 곧바로 우리와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작은며느리는 말수가 적은 아이라 결혼 전 사부인이 걱정을 하였으나, 나와 생활하면서 많이 달라졌지요. 내가 외출에서 돌아오면 밖에서 겪은 일, 들은 일 얘기 해주고, 저도 집에서 지낸 일 얘기하고 하다 보니, 서로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나를 닮아 말수도 늘게 된 것이지요.
나는 나의 일을 찾아 열심히 생활하고 바쁘게 지내며, 며느리는 또 제 나름대로의 생활이 있고 하니 서로 갈등없이 좋은 고부간으로 4년 반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또 내 집안 조카가 되는 사람이 살림을 맡아 알뜰히 살아주니 이것도 좋은 고부간으로 지내는 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데리고 사는 동안 첫 손녀를 보아 재롱보기 나날이 즐거웠고 삼년 후 손자도 생겨 같이 살면서 서로 정이 많이 두터워졌습니다. 우리 세대는 일제시대와 6 ․ 25를 겪어 근검 절약 정신이 몸에 배어있는데, 저도 남대문, 동대문 시장도 잘 다니고 그저 소탈하게 생활하는 것을 신조로 하고 있습니다. 손자 손녀 옷도 시장에서 사다주면 마다않고 잘 입히니 예쁘고 나를 따라 주는 것이 고맙고 기특했습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큰아들네가 유학중에 손자, 손녀를 낳아서 네식구가 함께 귀국하여 우리하고 함께 살게 되었지요.

작은아들네는 제 형하고 약속한 대로 형 귀국하며 저희들 네 식구 함께 유학 떠나갔지요. 큰며느리도 객지 생활하다 돌아와서 우리 다 함께 지내게 되어 삼대가 함께 사는 집이 되었지요. 주위에서는 거의 다 따로따로 지내는데 우리만이 좀 어색해 보이겠지만 함께 살면서 미운정 고운정 들며 지내는 것이 저희들 다 장차 사회생활하는 데 힘들고 어려운 고비 잘들 적응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요. 그리고 며느리들한테는 숨김없이 좋은 일, 어려운 일 다 함께 대화를 나누며 의논하지요.
그리고 열심히 살다 보면 손자, 손녀들도 부모따라 열심히 공부 잘하고 착실한 사람이 될 것을 믿고 살아가지요.

큰며느리는 유학 중에 아기 낳을 때에 내가 와서 도와주기를 부탁하기에 “시어미가 하는 것이 불편할텐데․․․ .”하였더니, 제 시누이들의 산구완을 네 번이나 한 그 실력(?)을 인정해 주어 뽑혀 갔었지요. 아직까지도 그 때의 일로 감사해 하고 제 친구들이나 누구에게든지 자랑 겸 칭송 겸 시어미의 산구완을 즐거이 기억해주어 나 또한 흐뭇했습니다. 나 또한 그 때 최선을 다하여 딸보다 오히려 더 성의껏 하였던 것 같습니다.
며느리는 제 아이 생일이면 늘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니 고맙고 감사하지요.
살다보면 부부지간에도, 내 친자식과도 의견이 다르고 속상한 일이 생기기 마련인데 며느리와 아무 일도 없다 한다면 그 사이는 서로 관심이 없는 오히려 정이 없는 사이라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이 시어미나 우리 며느리나 서로 마음 상하고 이해 못하여 가슴 아픈 일도 생기지만 우리는 서로 털어놓고 걱정할 일은 걱정하고 해명할 일은 해명하며 오해가 쌓이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저녁에 속상한 일이 있다가도 자고나면 눈 녹듯이 녹이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항상 대화가 많습니다. 며느리가 늘 하는 소리가 있지요. 이렇게 한 지붕 밑에서 지내는 것이 보통 사람들은 며느리가 힘들고 어려운 시집살이 한다고 하나 며느리 생각으로는 시어미인 나도 힘들 것이라고요. 그 말 뜻은 아마도 저도 노력하고 나도 노력하면서 서로 이해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두 며느리에게 “너희들 친구들이 우리 고부 사이를 어떻게 보는가?”하는 질문을 하여 보니 “어려운 시어머니이신데 애정이 많으신 걸 보니 저희들도 존경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괜찮은 시어미로 여기는 것 같아 그런 줄 믿고 즐거이 지냅니다.
주말이면 작은아들네가 와서 떠들썩하게 지내근데 손주 넷이서 친 형제간처럼 엉키어 노는 모습은 참 흐뭇합니다. 내가 사 남매를 키우며 제 일로 여긴 형제간의 우애를 손주들을 통해 다시 보면서 대가족에서 지내며 아이들에게 은연중에 좋은 교훈을 주었나 싶습니다. 손자들은 저희들끼리, 손녀들은 또 저희들끼리 재미난 재롱을 만들어 우리 내외 앞에서 발표회를 한다, 게임을 한다, 법석이고 할아버지와 장기도 두고 동네 산에 함께 오르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도 종알대며 사랑을 나눕니다.

작은며느리 얘기가 시댁에서 4년 반을 지낸 덕에 유학 갔을 때 주위에서 어른 모시다 온 사람이고 아이들 조부모 밑에서 자란 애들이라고 바로 보아 주어 흐뭇했다며 시댁에서 있던 일이 참 잘 했다며 흐뭇해하고 또한 주말에 큰집 오는 걸음이 친정에 오는 기분이라 하니 같이 지낸 시간들이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항상 4남매를 키우며 어려운 처지를 당하면 상대편으로 돌려 놓고 판단을 하라고 이르고 항상 어려운 사람 생각하라고 이르고 내 할 도리 다하며 누구에게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살라고 이르지요. 그리고 ‘나만’ 편하게 하는 것 좋지 않다며 가르쳤지요.

며느리들도 내 이 뜻을 잘 받아들이고 저희 생활하는 데 적응 잘하며 슬기롭게 지내니 참 예쁘고 고맙지요. 살림난 작은며느리가 이번 대보름에 오곡밥, 일곱 가지 나물이며 부름 깨고 잣불 켜놓고 우리 하는 것 배운 대로 했다고 하니 이제 며느리들이 우리 가풍을 잘 이어갈 것 같은 믿음이 생깁니다.
함께 지내는 큰아들네도 저희들만의 가정을 꾸려 나갈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은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부모에게 효도하면 자녀들이 잘 된다는 신조로 잘 들 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유순경은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사대를 다녔다.
장성한 2남 2녀의 자녀와 많은 손주를 둔 할머니로서 행복한
가정을 위해선 고부가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현재 정박아 교육시설인 사단법인 慈行會이사이자 부회장
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