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얼 우리 문화

민화-그 소망의 세계

2009-05-19     관리자

    민화는 조선시대 서민들이 사용하던 생활 그림이다. 지금처럼 감상을 위해 그려진 그림도 아니고 예술품으로 대접받으며 귀하게 여겨지던 그림도 아니다. 민화는 우리가 일상으로 사용하는 방을 장식하는 실용성을 갖고 있는 것이 첫번째 특징이며 또한 거기에 서민들의 소망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 두번째 특징이다.

 이러한 민화들이 어느때 부터 시작되었는지 누구도 확언할 수는 없지만 삼국시대의 무덤 벽화들이 꽤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뿌리가 매우 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금 현재 남아있는 민화들은 모두 조선시대 이후의 것이므로 조선민화라는 공용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민화는 이해하기 힘든 그림이 아니다. 누구나 보면 알 수 잇는 서민들의 그림이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우리의 선조들이 갖고 있는 종교, 사상, 바램과 풍자들이 풍부하게 표현되어 있다. 비록 그 민화들이 구도도 맞지 않고 기법도 없으며 예술품으로서의 진가를 갖고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그림들에서 부드러움과 은근한 소망을 함께 나눠 가질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화공이라 하였고 환쟁이라고 비하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세운 조선시대 속에서 무엇을 만들거나 그려내는 장인들은 귀한 신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양반 중에서도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이 출현하였는데 그들은 스스로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림은 천한 기예'라고 하여 어떠한 긍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 곧 양반에게 있어서 그림은 시간이 날 때 연마해 보는 여기에 지나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은 그림의 표준을 중국에 두어 그 쪽의 화풍을 따르고자 노력하였기 때문에 민간에서 유행하던 민화와는 그 풍격을 완전히 달리 하였다.

 이에 비해 그림을 관장하는 정부기관인 도화서에 소속된 화공들이나 민간의 이름없는 화공들은 결코 그림을 천한 것으로 여길수 없었다.

 그림은 바로 그들의 생활수단이며 한평생을 이어갈 직업이었기 때문에 설사 그 작업이 가난과 방랑과 멸시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민화에는 대개 그 그림을 그린 이의 낙관이 없다. 아니, 그 당시에는 낙관을 찍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린 이의 이름을 팔아 높은 그림값을 받자는 풍토는 애시당초 없던 시대였고, 화공들도 그림을 그려서 생활할 수 있으면 되었지 그 그림에 '내가 그렸소'하고 자랑할 일도 없었다. 곧 그림은 방에 놓인 가구처럼 생활용품의 일부였지 지금처럼 예술품이라는 귀한 이름으로 따로 분리되어 오히려 서민과는 거리가 멀어진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이름없는 화공들이 어떠한 구도, 기법, 소재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분방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길가의 민들레에서부터 조그만 곤충과 호랑이에 이르기까지, 금강산에서부터 중국의 산수에 이르기까지, 삼신할머니부터 부처님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화공들은 걸림없이 그림을 그렸다. 그야말로 민화의 소재는 이 땅의 삼라남상과 이 땅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를 포함하며, 나아가 중국의 역사와 산천까지도 포용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수많은 민화들이 모두 구도가 틀리고 기법이 다 다른 것을 볼때 우리는 조선시대 화공들의 마음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림 1>은 봉황과 호랑이, 토끼를 함께 그린 그림이다. 봉황은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새이다. 오동나무 가지에만 깃들며 몇 백 년에 한번 열리는 대나무 씨앗만 먹는다는 봉황은 성인이 이 세상에 나오면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 봉황 한 쌍이 오동나무 가지 위에서 서로 어울려 노는 모습과 나뭇가지 뒤에 몸을 반쯤 내민 채 엿보고 있는 새끼 봉황에게서 우리는 한 가족의 아늑함을 얻을 수 있다.

 오동나무 그늘 아래에는 한 마리 호랑이가 두 마리 토끼를 쫓아 가는데 앞서 가는 토끼의 뒤돌아 보는 모습이 그렇게 여유만만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뒤쫓아 가는 호랑이도 토기를 꼭 잡아먹겟다는 모진 마음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두마리 토끼와 호랑이 한 마리가 서로 친구가 되어 어디론가 소풍이나 가는 듯한 모습, 뒤에 처진 호랑이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듯한 토끼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웃 사랑의 다스함을 느낀다. 적자생존이니 약육강식이니 하는 살벌한 용어를 어찌 이 그림에 적용시킬 수 있겠는가.

 그림의 아랫쪽 오른편에는 빨간색으로 칠한 불로초가 보이는데 바로 요즘에 유행하는 영지버섯이다. 결국 이 그림이 나타내는 바램은 상서로움과 너그러움과 수명장수이다. 이러한 소망들을 담고 이 그림은 어느 집안의 방안에 꽤나 오랫동안 걸려있었을 것이다.

 <그림 2>는 어변성용도라 하여 물고기가 변하여 용이되는 그림이다. 중국 황하의 계곡중에는 용문이라는 곳이 가장 물살이 험하고 급한 협곡인데 잉어가 이 협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용으로 변한다는 전설이 있어왔다. 이를 '잉어가 용문에 올랐다'고 하여 드용문이라 하며 조선시대에는 이 듯을 출세의 상징으로 삼아왔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임신을 하면 이 그림을 흔히 안방에 걸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들의 출산과 세상에서의 출세를 함께 기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물고기는 '막아 지킨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물고기가 눈을 뜨고 잠자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가 얹혀진 것이다. 절간 추녀 밑의 풍경에도 어김없이 이 물고기가 매달려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이며, 우리의 어머니들이 고사를 지내고 문설주 위에 환실로 명태를 묶어 매다는 것도 바로 이런 소망이다. 흰실은 그 실처럼 길게 이어지는 수명을 상징하며 마른 명태는 모든 재앙을 막고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림 3>은 중국 소상강의 여덟가지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 소상팔경도 병풍 중에서 수상야우라는 그림이다. 소상강에 밤비 내리는 풍경을 그린 이 그림은 아이들의 장난기와 같은 천진함이 그득하다. 구름 아래로 비 떨어지는 묘사도 그렇고, 배만한 오리가 물에 떠다니는 여유도 그렇다. 게다가 대숲 속에서 솟아 올라간 소나무 꼭대기에는 까치 한 마리가 올라 앉았고, 호랑이는 그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한 채 망연히 서 있다. 중국의 풍경을 소재로 쓰면서도 우리의 호랑이와 까치, 소나무를 끼워 넣은 당당함 속에서 민족 문화의 맥은 역시 대다수 서민들의 몫이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민화는 간절한 소망들을 천진스런 마음으로 그린 것이다. 그래서 바보 민화라는 별명도 얻어 가진 조선민화는 어린 아이들의 그림처럼 어떠한 틀에도 얽매이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민화를 보고 기뻐하려면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순진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민화를 그린 이의 마음을 닮고, 그 그림을 걸어 놓았던 이의 마음을 닮아서 민화처럼 여유롭고 밝은 마음으로 생활해 나가게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