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비니에서 포카라로 가는 길

이남덕 칼럼

2009-05-16     관리자
 룸비니의 밤은 사라(sal)나무끝에 걸린 보름달과 함께 조용히 깊어갔다. 달을 보니 음력 정월 보름. 바로 오늘이 동안거 해제날이로구나, 달은 같은 달이라도 스님들 참선하시는 내장산 산사의 새벽달은 얼마나 맑고 서리발처럼 시릴 것인가.
여기는 부처님 나신 땅, 룸비니의 달빛은 유난히도 포근하다.
아침 8시에 오늘의 목적지인 포가라(pokhara)까지 가는 버스가 바이라와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전에 다시 한번 룸비니 성소를 참배하러 길을 나섰다. 동쪽하늘이 붉으스레 물들어오는데 아직 행길에는 인적이 드물다. 어제 저녁때 성소참배 후에 우리가 들렀던 티벳피난민들의 마을앞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떠오르는 아침해를 배경으로 지금은 개 한 마리만이 어슬렁 걸어가는 광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어제 저녁 바로 그 장소는 아이들로 꽉차 있었다. 내가 네팔에 와서 티벳 사람들을 한꺼번에 많이 만난 것은 여기 룸비니에서 처음이었다. 그 가난은 거의 충격이었다.
성소인 마야사원에 도착하자 여기서도 또 한번 티벳사람들, 이번에는 염주를 손에 들고 마야부인 연못가를 돌며 염불하는 부인네들을 만나게 된다. 동트기 전부터 이렇게 탑돌이 하듯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을 서서 돌고 있는 것이다. 성소에 이르러서는 한 사람씩 오체투지의 예배를 올린다. 이 근처에 사는 그들의 아침일과 인듯이 보였다.
8시 30분 정각에 버스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꽉 차서 떠났다. 다행히 어제밤 묵었던 삼부토건회사 숙소의 이선생이 차표를 미리 끊어 놓았기에 앉아서 갈 수 있는 것만 다행이었다. 짧은 여행에서 그 나라 사람들을 알려면 이렇게 대중교통수단에 밀리면서 피부로 느끼는 길이 가장 첩경이다. 네팔은 여러 종족으로 된 다종족 국가이고 따라서 종교도 국교인 힌드교를 필두로 불교, 라마교(10~15%), 이슬람교(1~2%) 등이 있다(기독교만은 포교가 금지되어있다)고 한다. 이 다종교 속에서 그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이 나라에 들어서자마자 티벳사람들이 내 눈길을 끈 것은 우선 그들의 인종적 계통이 우리와 가까운 몽고족계통에 속해 있기에, 나만 그들을 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편에서도 내게 주목한 채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은 느낀다. 이 인종적인 친근감은 어쩔래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인도·아리안족 계통의 사람들은 힌두교를 신봉하지만 이 티벳·버마계통 사람들은 불교나 라마교(북방불교)를 믿는데 이들의 신앙이 얼마나 순수한지는 오직 감탄스러울 뿐이다. 나는 이미 인도 성지순례 여행에서 이들 티벳(피난민)사람들의 경건한 신앙태도를 목격한 바가 있기에 여기 가트만두시 주변의 사원에서 그들이 오체투지를 계속하면서 그 너른 사원둘레를 한바퀴 도는 것을 봐도 놀라지 않을 수가 있었다. 그 외형에 놀라지 않는다는 뜻이지, 그들의 순수함에 대해서는(녹야원(鹿野苑)의 스투파(佛塔)에서 맨처음 이 광경을 목격했을 때나 지금이나)여전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왜 이들은 그렇게도 신앙생활에 열렬한가. 남이야 보건 말건 일체상관이 없는 그 몰입은 어째서,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들이 부다가야의 탑에서 밤을 새워 불경을 읽는 것을 보았는데 카드만두의 보드 나(Bodh Nath)불탑에서도 네 사람의 남자들이 경첩을 서로 대조하듯이 진지하게 읽어나가는 광경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티벳 불교사원에 가면 한복판에 크고 둥근 원주형 건조물이 있어서 그것을 빙빙 돌리면서 관세음보살 육자진언‘ 옴마니반매훔’을 외는 것을 볼 수 있다. 돌리는 것은 이것 뿐이 아니다.
네팔의 불교 스투파 사원 건축의 특징은 큰 반원형 탑신위에 방형(方形)탑을 얹어놓고 그 네모난 사방면 마다 큰 눈을 그려 놓았는데 (제3의 눈·부처님의 눈), 이 눈이 모든 것을 지켜본다고 믿어지고 있다. 반원형 탑둘레에는 육자진언을 새겨놓은 청동제 원통(mani 車)이 죽 매달려 있는데 참배자들은 진언(옴마니반매훔)을 외면서 이것을 손으로 돌리며 탑을 도는 것이다.
이런 스투파건축이 다 2천년전의 것이라 하고, 또 곳곳이 기원전 3세기의 저 불교수호의 제왕인 아쇼카 왕의 기념탑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테팔의 중심부인 카트만두 분지까지 일찍이 불교가 성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13세기초에 인도전역이 회교도에 유린당했을 때 북부인도 특히 불교성지가 밀집해있는 간지스강가의 불교는 강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와 네팔에 피난처를 구했을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인도에는 불교가 자취를 감춘대신 북쪽으로 피난간 불교는 네팔과, 히말라야산으로 이어진 티벳에서 깊은 뿌리를 내린 것으로 믿어진다. 불교도의 수는 힌두교도보다 적지만 네팔문화의 중심인 카트만두의 예술문화는 이 지방의 토박이인 ‘네팔’족이 만들어낸 것이고 이들은 불교도 들이다.
오늘날 네팔에는 신·구 두 층의 티벳계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하나는 옛날서부터 북부산악지대에 정착하고 있는 종족들. 등산안내자로 유명한 셀파족은 본래 종족의 이름인데 불교를 신봉한다. 등산안내자로 유명한 셀파족은 본래 종족의 이름인데 불교를 신봉한다. 중앙산악지대에 살고있는 구릉(Gurung)족도 라마불교도들이다. 이들은 우리를 만나면 같은 핏줄을 만난 듯이 반가워한다. 두 번째는 30년전 달라이라마가 중공에서 탈출해서 인도로 망명올 때 넘어온 피난민들이다. 어제 내가 룸비니에서 만난 사람들은 피난민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다. 하루하루 노동품을 파는데 임금이 하루 25루피(1불이 28루피)이니 우리돈으로 600원도 안된다. 그래도 이들은 별 불평이 없이 저녁 5시에 일이 끝나면 일제히 환성을 올리고 헤어진다고 들었다.
버스 창에 기대어서 난민촌의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는데 바깥 천길계곡하늘로 새떼가 날으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새파란 앵무새들인 것을 보고 나는 환성을 질렀다. 이게 바로 아미타경(阿彌陀經)에 나오는 ‘앵무사리가릉빈가’새들이 아닌가! 포카라로 가는 길은 극락으로 가는 길인가!
티벳 피난민들이 모두 가난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부지런하고 생활력이 강한 것은 꼭 우리나라 이북에서 월남해온 피난민들을 연상케한다. 그들에게는 농토가 없기 때문에 도시에서 상업에 종사하거나 융단이나 수공예품 등을 생산하여 그것이 이 나라 외화획득·관광수입의 대중을 이루고 있다 한다. 돈을 벌고나서 그들이 첫 번째 하는 일은 그들 신앙의 중심인 절을 짓는 것이다. 카트만두시의 보드 낫트 불탑근처에는 크고 작은 절들이 여기저기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회건물이 그 점에 있어서도 똑 같다.
사람은 절박한 상황에서 신불(神佛)에 의지한다. 흔히 종교를 의존적 삶의 태도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피상적 견해다. 절대절명의 극한상황에서 인간은 초인적인 힘으로 그 상황을 초극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줄기찬 생명력의 분출이며, 최대한 인간능력의 발휘인 것이다. 종교는 그 생명근원에 도달하는 가장 정확한 직통코스라고 생각된다.
하루종일 만원버스속에서 네팔사람들과 함께 밀리면서, 그들 성품의 온유함과 너그러움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차가 얼마나 만원인지 차장은 안에서 버스문을 닫을 수 가 없어서 밖에서 밀어부쳐 닫은 후에, 자기는 달리는 버스 창문으로 다리부터 넣어서 안으로 들어오는 써커스를 연출한다. 이 ‘몸싸움’속에서도 누구하나 소리지르거나 욕하거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 화가 많고 성미가 급한 우리 한국사람들 수준에서 보면 네팔 사람들은 모두가 성자급 이상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은 무엇일까. ‘가난’이 그 원흉은 아니라는 것을 이 긴 하루여행에서 절실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