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健康에 관한 48章(11)

自我强化法

2009-05-15     관리자

  제6의(第六義) 친근(親近)  (계속)

    제三十三품  소임살이

---role playing & role reversal ---

  아직껏 유약하거나 병약한 자들에게 지지와 편의를 공급해 주는 어른들도 각계 권속무리 속에서 효과적이기 위해서 분업과 협동을 하게된다.

  각자의 소질에 따른 더욱 능률적인 방향으로의 일의 분업과 전문화가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권속무리의 큰 살림살이를 각자가 분담해서 하는 소임살이로 나누어 지는 것이다.

  이 소임살이는 물론 자기가 맡은 바 소임살이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잘 처리해 나가야 하지만 또 동시에 같이 하는 이웃의 소임살이도 잘 알아서 때로는 역할이 바꿔지거나 부득이 하게 대타를 하게 될 때면 거침없이 할 수 있도록 평소에 이해와 동감이 잘 되어 있으면 더 좋은 일이 없겠다.

  그래서 간혹 큰 능력의 어버이들은 종종 엄마이자 아빠이고, 형이자 아빠이고, 누나이자 엄마일 수 있는 것이다.

  상기한 맡은 바 소임살이를 얼마나 중요시 하나 또는 인간 생활에 기본과 연관하는 일일수록 보기에는 하찮은 것 같은 일들이 사실은 더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좋은 교훈 이야기를 하나 들까 한다.

  때는 중국에서 송나라가 동야의 문화권을 주도하고 있는 시대, 장소는 일본, 그들로서는 가마꾸라 시대겠다.

  하루는 송 나라 중국의 한 항구에 멀리 일본서부터 선진문명국으로 무역선이 들어 왔다. 그 무역선에는 일본의 여러 특산품이 실려 왔을 뿐만 아니라 이 무역선을 타고 일본의 젊은 소장 학승이 한 사람 타고 있었다. 기예(氣銳)한 불교학승은 다름 아니라 뒤에 일본이 낳은 가장 독창적이라는 평을 받은 바 있는 도원(道元)이었다. 그는 일본서는 이제 더 사사할 사람이 없었으니 당시의 대 문명국이자 대 불교국이던 송나라로 건너와서 학문을 닦겠다고 결심한 기예쟁쟁한 소장학자(小壯學者)였던 것이다. 이제 무역선이 그리던 송 나라의 항구에 닿았으니 이제 소원하던 학문의 곳으로 닿았다고 선창에 나와 중국의 대지를 바라 보고 있으니까 어찌된 셈인지 작은 전마선을 타고 이곳 무역선으로 가까이 오는 그 곳 송 나라의 승려를 보았다. 같은 교학의 동지이자 또한 본거지의 사람이라 그는 유심히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었다. 그가 무역선에 오르자 주로 주방에서 쓰는 찬거리를 진기한 것으로 일본서 싣고 온 산해진미들을 고르고 흥정하고 있었다. 그래 그는 의아했다. 아니 송 나라 대국의 불교 승려가 되는 사람이 주방의 찬꺼리를 찾고 있다니 일면 놀라면서도 가벼운 경멸의 감정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정중히 그를 자기 방으로 안내하여 작은 일본서 유학 온 학승임을 밝히고 하는 말이 보자하니 노장께서는 불교승려이신데 어이 고상한 학문은 않으시고 그래 주방의 찬거리나 사러다니시느냐고 물었었다.

  그랬더니 그 송나라 노승은 껄껄 웃으면서 『외국의 젊은 수도승이여! 그대가 내 하는 일이얼마나 중요한 수도이며 또한 그것이 바로 불도임을 아직 모르시는구려 언젠가 알게 될 때가 올 것이요.』하면서 배를 내렸다.

  그 후 도원은 오랜 수도와 학문 끝에 일본 불교사상 아니, 일본사람으로서는 보기 드문 일본의 정신사상, 최대의 독창적 학자로서 대성하였던 바 그는 언제나 그 당시의 일을 회상하면서 일면 부끄러워 하고, 또 일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진정 학문이나 수도라는 것이 무엇이며 학문이 생활이나 인생과의 관계에서 그처럼 불가불이(不可不離)의 것임을 누누히 후학(後學)들에게 가르치고 타일렀다 한다.

  고상하고 고귀한 학문이란 도도한 상아탑 속에 세간을 여민 곳에나 또는 승려가 구름 위에 노니는 고산선경(高山仙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 비근한 생활 속에 있고 학문이나 수도란 그런 생활이 시발이자 귀착이라는 것이다. 의. 식. 주의 평상생활이 안 되니 학문이고 수도이고 또 학문이나 수도가 다 되고 나면 결국은 평상하는 이 의. 식. 주의 생활만이 평상심(平常心) 문제인 것이다.

  문제는 권속무릳ㄹ의 살림살이 생활에서 맡은 바 소임살이를 잘 해내느냐 아니냐에 우열이 있지 무엇을 해야 고상하고 무엇을 하면 저열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맡겨 놓아도 맡은 바 소임살이는 거뜬히 해내는 것이 요사이 말로 하는 역전살이(fole revesal)인 것이다. 말하자면 부엌 살림살이 하나 철저하게 잘하면 나라 살림살이인 수상직을 맡겨 놓아도 잘 해낸다는 것이다. 자기가 맡은 바 소임살이가 잘 될 때 그것이 얼마나 권속무리에게 훌륭히 좋게 영향해 가느냐를 똑똑히 알아서 또한 높은 금도를 지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엌에서 맡은 바 밥이나 찬거리를 잘 장만해서 생활 수도에 필요한 자양분을 필요할만치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게 제공하면서도 그들이 맛있게 먹음으로써 생활에 감사를 느끼며 생활에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채공이나 주방 살림살이가 얼마나 중대한 보람있고 떳떳한 소임살이냐 말이다. 큰 자부심과 자존심과, 그리고 영광을 가지고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던 이러한 태도일 때 그는 당당해 지고 도도해 지는 것이다. 이때 바로 못내미 한산습득(寒山拾得)이가 사실은 보현 문수보살인 것이다.

  제 三十四품 공동운명체에의 충의와 보은감사

 ---sense of royality, belongess and of thankfulness---

  우리 인간의 가장 뚜렷한 생물학적 특징을 두가지만 든다면 그것은 두 발로 일어서 걷게 되기 때문에 뇌, 특히 대뇌피질과 손의 발달이라는 것과 그리고 여러 가지 권속무리 속에 산다는 군거성 사회성이라는 것이다. 후자로 말하자면 사람은 별의별 사회집단 속에서 살기 때문에 인간이 되었고 인간으로 건재하기 위해서는 집단사회 속에 있어야 하니 집단성이야말로 자기의 존재의 일부이고 스스로의 자존심의 중요한 일부임에 틀림 없다. 자기의 여러 집단성을 자랑으로 여기고 고마워 하고 거기에 속함을 떳떳히 여길수록 그는 자존심이 올라가 정신건강에 한몫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 자기 집단에의 자랑스러운 소속감(sense of belongness)과 동일감(sense of identification)과 그리고 충성심(sense of royality)과 그리고 또한 보은감사(sense of thanktulness)에 차는 것이 바로 정신건강의 제 三十四품인 것이다.

  제三十五품 수소작주(隨所作主)

  한 권속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일에 전신전령으로 하는 다시 말해서 심일경성(心一境性)하는 자세가 어느덧 몸에 배이면 그의 자리에 따라 주도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일에 관한 태도로 주도성이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 회사의 급사가 스스로의 맡은  바 일을 그야말로 천직으로 여겨 요새 말로 전력투구하고 있을라치면 그는 바로 급사하는 그 일로 해서 그 회사의 주인인 것이다. 반대로 명색이 사장이면서도 제 소임살이 하나 잘 못하여 빈들거리고 있다면 위치야 회전의자 사장자리겠으나 실제로는 주인 못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을 유명한 당의 조주선사는 『수소작주(隨所作主)하면 도처개진(到處皆眞)』이라 갈파하였던 것이다. 스스로의 일, 소임살이 또는 자기의 처지에 알아 차려 거기에 진력하는 주도적 자세를 취해서 일한다면 어디가나 주인이고 그것이 바로 주인이고, 급사 두고 주인이 따로 없으니 이것이 바로 진실된 주인자리라는 것이다. 아닌 말로 그러한 수소작주 하는 급사면 자리도 또한 어느새 승진할 것이겠다. 그러나 역시 그러한 것일랑 생각 말고 오직 자기 일에 수소작주 한다는 것이 또한 우리의 최대의 명제의 하나인 이무소득의 정신이다.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로 무소부득(無所不得)』일 때 뒷 것 『무소부득』은 쳐다 보지 말고 앞의 『이무소득고 』에만 눈 팔아 전심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 정신건강에 관한 제三十五품은 어디서나 수소작주 하는 것, 처지에 있는 응분의 일에 전력투구 하는 것, 전신전령을 기울이는 것, 또는 심일경성 하는 것이다. 심일경성이란 전신전령을 기울이니 정성을 다하니 알뜰하기 짝이 없으니 주체와 객체 자기와 대상 사이의 분별심이 떨어진 일체가 되는 상태인 것이다., 무분별 초출방외(超出方外) 또는 전기(全機) [full pressence]라는 지경인 것이다.

  제三十六품 적적요요(寂寂寥寥)

  --クビとサビ--

  군거환담(群居歡談) 독거사색(獨居思索)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저자에서는 권속무리 속에서 어울려 있는 이득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또한 홀로히 있는 이득을 말한 것이다.

  권속무리 속에서 끼리끼리 어울려 노니다가도 각자 제 자리 제 일 보기에 바빠서 또한 뿔뿔히 흩어지기 마련이다.

  멀리 떨어져서 홀로히 독거할 때의 고독감은 여럿이 어울려 있을 때의 범용함과 더불어 자칫 잘못하면 우리들의 건강을 해치기 쉬운 것이다.

  권속무리를 떠나 멀리멀리 홀로 있을 때의 한없이 밀려 오는 외로움의 파도는 정녕 견디기 어려울 정도일 때가 종종 있다. 이때 정말 권속무리란 좋은 것이로구나고 뼈저리게 여겨 그저 고맙고 감사히 여기게 되면 그 적적요요함도 또한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면 『チョッビリ淋しがり    (살짝 외로워 함)』은 심신에 약이 되는 것이다. 외로워서 뇌뇌(惱惱)하는 심정은 야릇한 쾌감마저 없지 않다는 것이다. 외로움은 그리움의 변이이니 님이란 대상 상실(love object-lost)도 또한 친근과 적요라는 대응의 전체적 상황에서는 과히 나쁘지 않다는 것이 적요의 미학이겠다. 우리들의 기본적 궐속무리란 다름 아닌 바로 부. 모. 형. 제. 자. 매. 부. 부. 자. 녀.사. 제. 붕. 우. 선 후배 등으로 그래서 때로는 적대자로도 전개되는 소위 중요한 타인(importent others)이니 님이란 바로 그들이고 그것은 드디어는 자기가 속하는 별의별 인간집단으로 전개되어서 드디어는 인류로 변해가는 것이겠다.

  여기 별의별 애정대상에서 떨어진 『간(間)』[far distancing]에 외로워 외로워 하는 특히 현대 서구인들은 그들이 지나친 개인주의에 빠져 있는 결과라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된다.

  한번 더 강조해서 사람이 인간으로 건재하기 위해서는 상기한 별의별 권속무리 속에서 끼리끼리 더불어 해서 따뜻한 체온을 느껴서 좋지 [solidarity linking Common identity] 제 혼자 강대하다고 날뛰더라도 언젠가는 외로운 한마리 늑대 [lonely wolf]로 쓸쓸히 지낼 수 밖에 없겠다. 독재자의 말로인 것이다.

  여기 님 향한 일편단심 속의 살짝 외로움은 우리의 정신강의 제 三十六품으로 중요한 대목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