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 망 증

결혼 • 가정 • 행복의 장

2009-05-15     관리자

‘누구시더라 ‧‧‧‧‧‧ ’
어디서 본 듯하기도 하지만 생소한 느낌을 주는 상대에게 우선 이런 말로 중얼거리게 된다. 기억이 아삼 아삼하다. 꼭 기억을 해야 될 사람에게 이런 표현을 한다면 당사자는 얼마나 서운해 할까. 하지만 기억력이란 게 우리에게 무한정 보장되는 것이 아니고 보면 낭패를 겪는 일이 드물지 않다.
“글쎄 오늘 아침에 고기국을 자셔놓고 한달 동안 고기라고는 구경도 못했다니 ‧‧‧‧‧‧” 시어머니의 서운한 말씀에 가슴이 막힌 며느리는 기억력이 없어서 그러시는게 아니라 자기가 미워서 그러는게 틀림없다고 하소연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시시콜콜한 것은 죄다 기억하면서 유독 고기국만 혼돈할 이치가 없지 않느냐는 항변이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남편에게 이런 푸념이라도 할 때면 “아 오늘이 참 당신 생일이지 ‧‧‧ ” 어쩌구 회상해 주면 풀릴 마음도 “글쎄 오늘이 무슨 날이던가 ‧‧‧ ” 그럴라치면 부부싸움을 일으키게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아이구 참 부엌에 국을 끓이다말구 ‧‧‧ ” 가스불을 끄지 않았다고 이제사 회상하는 분도 많다.
기억 의학적 의미로서의 기억은 획득된 정보를 주의깊은 관찰을 통하여 무의식속에 다시 불러내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기억에 장애가 있는 것을 기억력장애라고 하는데 크게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기질적 기억장애고 다른 하나는 심리적 기억장애가 있다. 기질적이란 말은 기억에 관계되는 감각기관이나 저장하는 뇌세포 또는 회상에 관계하는 신경세포가 생물학적인 병변이 있어서 기억에 장애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자극을 받아 정보를 획득하자면 오관이탈이 없어야 한다. 감각기관 자체가 탈이 나 있으면 정보를 받아들이는 첫 자극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에 기억과 연결시킬 수가 없다. 예를 들면 눈이 탈이 나 있으면 보지 못한다. 사물로 보지 못한다면 사물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지 못할 것이다. 획득되지 못한 정보는 아무리 뇌세포가 발달되어 있어도 사물로 시각적 정보로 수용하진 못할 것이다.

그래서 기억이 불가능해진다. 감각장치는 모두 완벽해도 감각정보를 뇌에 전달해 주는 신경장치에 고장이 있으면 역시 기억하기가 어렵다. 이런 식으로 기억에 관여하는 우리몸의 어떤 기관이던 탈이 생기면 기억에 장애가 오는 것이다.
이 모든 기억장애를 편의상 기질적 기억장애라고 부른다. 대개 뇌의 질병이나 감각기관의 자애 또는 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질병과 연관하여 기억장애가 온다. 흥미 있는 기억장애완 다르다. 기질적 기억장애가 우리들의 기억과 연관된 장기병적기억장애는 그런 병변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감각기관도 정상이고 신경체계도 정상이고 뇌세포도 정상인데 기억이 안 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신체적인 이상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억에만 장애가 있다는 뜻이다.
기억이 되는 입력의 기체를 생각한다만 기질적 기억장애와 심리적 기억장애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이란 과정은 첫째 감각기관을 통해 감지한 정보를 등록해야 한다. 콤퓨터로 말하자면 입력하는 과정과 같다. 둘째단계는 입력된 정보를 보존하여 보관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리 입력을 열심히 하여도 그 정보들이 저장될 수 없다면 입력은 시키나 마나한 노릇이 된다. 세번째 단계는 보존된 정보를 필요에 따라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양만큼 재생시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재생 내지 상기시키는 과정을 합쳐 이 세단계 모두를 기억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자 그렇다면 이 세 단계의 과정이 신체적이던 정신적이던 어뗜 이유에 의해 손상 또는 방해를 받게 된다면 기억은 온전하게 회상되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손상의 원인이 신체적인 것이라면 ‘기질적’이란 이름을 쓰고 또 그 손상의 원인이 정신적인 것이라면 ‘심리적’이란 표현을 쓴다. 세 단계의 손상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감각기관의 기질적 손상은 입력을 방해한다. 눈이 멀었으면 시각적 정보를. 청각이 멀었으면 듣는 정보를, 후각이 손상을 입었으면 냄새 맡는 정보를, 촉각이 손상을 입었다면 접촉을 통한 정보를, 미각이 손상을 입었다면 맛을 통한 정보를 입력하지 못할 것이다. 정보를 얻는 것은 우리 몸의 오관을 통해 얻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기질적 이유 말고도 오관은 하나도 손상을 입지 않았는데 기억에 장애가 있는 경우가 있다. 사람을 몇 번 보고도 모른다거나 같은 말을 여러 번 듣고도 기억을 못한다는 등의 경험은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본다.

감각기관에 손상은 없지만 심리적으로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편집증적 생각에 사로잡혀 있거나 집착이 심하다거나 아니면 혼자 엮어나가는 공상이 많다거나 한다면 그런 심리적인 연유들 때문에 오관이 성해도 옳바르게 지각하는 능력이 떨어질 것이다. 신경증이나 정신증의 여러 형태에서 기억손상이 있거나 왜곡이 있게 되는 원인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혼자 깊은 공상에 빠진 사람에게 시각적으로 무엇을 보여준다 해도 보여준 내용을 간추려 기억하지 못한다. 눈뜨고 보지만 공사에 밀려 건성으로 보기 때문에 입력에 장애를 받는다.

입력과 등록을 통해 들어온 정보는 두번째 과정인 보존이 필요한데 이 보존은 주로 뇌세포가 담당한다. 뇌세포가 병변이 있으면 보존이 불가능하다. 비유하자면 창고가 불이 나고 없는데 물건을 쌓아둘 곳이 어디란 말인가. 그러나 문제는 보존시킬 뇌세포에 아무런 장애가 없어도 신경증이나 정신증과 같은 심인성정애의 증상으로 기억장애가 오는데 이때는 보존 기명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세번째 과정인 회상단계는 보존된 정보를 다시 의식상태로 끌어 올려 원래 입력단계와 같은 상황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단계도 물론 뇌세포가 온전치 못하면 보존자체가 어려우니까 보존 안된 내용을 아무리 회상시킨다해도 떠오를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존이 잘되어 있는 정보라도 심리적인 요인에 의해 기억으로 떠 오를 수도 있고 감감한 채 무의식 속에 남을 수도 있다. 가령 기질적인 손상이 없는데도 기억장애가 있다는 것은 심리적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가령 만나기 싫은 빚쟁이를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누구시더라 ‧‧‧‧‧‧ ’하고 만난 상대방의 실체가 기억으로 금방 떠오르지 않는 게 편할 것이다. 기억이 생생하다면 괴롭기 때문에 회상되는 정보를 방해함으로써 자신의 괴로움을 연기시켜 보자는 무의식적 과정 때문에 일어난다.

반대로 보고 싶은 애인과의 여러 가지 기억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과다하게 떠오른다. 이런 현상은 회상을 독려함으로서 애인과 지녔던 행복한 순간들을 더 많이 더 오래 간직하고 싶은 심리적 현상 때문에 일어난다. 그래서 기억장애라고 통칭되긴 하지만 기억상실, 기억과다, 기억착오 등과 같은 모든 형태를 포괄한다. 40대 중반 이후의 기억장애들은 뚜렷한 심리적 원인이 선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고령화 현상 때문에 비쳐지는 자연현상으로 이해되어진다. 나이 들수록 젊었을 때 같지 않는 기억력을 실감하게 되는데 이는 앞서 말한 고령현상 즉 노화와 관계가 있다.

노화에 의해 오는 기억장애는 최근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는 대신 옛날에 입력된 정보는 보다 오래 회생이 가능하다. 이런 기적을 이해할 수 있다면 시어머니가 일부러 자기가 미워 고기국도 안 끓여 주었다고 그러신다는 억울은 풀릴 것이다. 아침은 최근의 정보이기 때문에 기억에 없지만 어릴 때 기억은 오래전에 입력된 것이기 때문에 시시콜콜 기억하게 된다. ‘내가 무엇하러 냉장고 문을 열었지?’ 이런 기억장애가 있거든 당신도 나이 들었구나 하고 당신을 되돌아 보라. 佛光

이근후 : ‘35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 경북의대를 졸업했으며
현재 이화의대 신경정신과 주임교수 및 동대학병원
신경정신과 과장으로 있다. 수필집에 「까치야 까치
야」 「임금님의 귀」 「사랑한다면 증거를 보여 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