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도불교(4)

해외 불교

2009-05-14     관리자

3, 인도의 티베트 불교

1960년대에 각각 달라이라마가 세운 「티베트 하우스」와 「인도 티베트 문화협회」도 「티베트 문화를 존속시키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티베트 하우스」는 필사본 ․ 목판본 ․ 인쇄본 ․ 귀중한 예술품을 수집하고 있으며, 박물관 ․ 도서관 ․ 큰 상점도 유지하고 있다. 「인도 티베트 문화협회」는 인도 정부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특히 티베트 어린이를 교육시키는데 있어서)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티베트인의 인도에의 망명이 티베트 불교에 심대한 변화를 끼치고 있다.

중공은 반복적인 방송으로 중공 지배 후에 티베트로부터 탈출한 사람들은 본래 부유한 귀족과 농노 소유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도 네팔 부흐딴, 그리고 시낌으로 피난한 3만의 티베트인 가운데 단지 5백명 만이 상층 출신이다. 인도에 있는 5만명의 망명자들 가운데 약 85%가 농부와 목자이다. 지난 7년 안에 8,100명이 인도 정부와 많은 외국 정부, 그리고 사설 재단의 원조로 이 땅에 재정주하였다. 마이소르주의 문드고스(Mundgos)에 있는 새 부지는 4천명을 더 부양해주며, 전체로 약 만 2천 명이 된다. 수공업 센터, 소규모의 산업단위 낙농장이 수천 명에게 더 직업을 주고 있다.

6,7천명의 어린이들이 기숙학교와 보육학교에 있다. 3만명 이상의 나머지 망명민에겐 유일한 직업이 공사노동인데. 그중 2만명의 남녀가 하루 30센트로 중노동을 하며, 가족을 유지하기 불가능한 매우 어려운 상황 하에서 천막에 살고 있다. 나머지 실업자들은 더욱 나쁜 조건에서 생존하고 있다. 달라우지에선, 수백 명이 다 무너져 가는 시장(市場) 건물에 군집해 있으며, 드라름 살-라(Dharmsiāla)에선 산기슭에 텐트를 치고 살거나 주거에 부적당한 낡은 집에 살고 있다. 이 지역에선 식량배급을 받지 못할 때도 있어 영양실조와 기아 상태로 고생하고 있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이 가장 고생하고 있다. 이전에 티베트에선 사원이며 승려, 전체적 방식이 어린이에게 불교를 차근히 심어 주었다. 인도에선 이들 어린이의 불교 교육이 부모나 교사에 달려 있어, 이 이상 삶과 밀착될 수도 무의식적으로 흡입될 수도 없다.

달라우지나 혹은, 무수리(Mussoorie)에 있는 타링 부부(Mr. and Mrs. Taring)가 경영하는 학교에 있어서와 같이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는 소수이다. 그들에 대한 그리고 특히 어린 승려에 대한 책임은 라마에게 놓여 있다. 인도의 기후가 이런 일을 가장 힘들게 만든다. 북사(Buxa) 사원엔 150~200명의 승려가 폐환을 앓고 있다.
마드라스 외곽 아드야르(Advar)에 있는 작은 티베탄 부락에선, 소년들을 마하보드히 협회의 사원에서 대학에 다니도록 보냈는데, 그들은 열기를 견딜 수 없어 집에 다시 되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참 승려들은 이전과 같이 승려들만의 생활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신자들게 대한 책임을 지고, 생계를 마련할 수단을 모색해야 하며, 옛 관습을 살려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승려나 라마조차도 일로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점은 라마들은 살기 위한 돈을 만들기 위해 밤과 낮으로 페인트칠을 한다.

우두머리 라마는 일과 원조를 얻는 노력에 시간을 내야 한다. 어떤 승려들은 더 이상 달라이라마의 화신이 없을 것이라고 염려한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 있는 어린이들로서 수련에 필요한 격리와 공부, 명상의 삶을 이끌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까규빼 종파의 한 화신이 1966년 11월 달라이라마가 공식적 승인을 하고, 수련을 위해 시낌으로 보냈다. 그는 당시 세 살이었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의 미래가 매우 불확실하다는 것은 진실이다.

 인도에서의 라마들은, 더 이상 라마라는 것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라마로서 행동할 때만이 받아들여진다고, 한 저명한 평신도는 말했다. 그들의 영향력은 그들의 공부와 성취, 모범,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수 명이 이미 죽었고, 나머지도 10년 안에 죽을 것이다. 그들과 새 세대 사이의 갭이 불안스런 요소이다. 롭상 K, 라룽빠씨(Mr, Lobsang K.Lhalungpa)가 망명 정부와 갖가지 종파 사이의 중심적 지위를 쥐고 있다.

그는 승려를 유지할 수 있는 자급자족적인 대책을 가진 모든 종교적 학교의 재조직, 현대의 요구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수정된 교과 과정(각 승려는 최소한 한 가지의 외국어를 배우는 것), 학구적 공부를 마친 후 할 수 있는 명상 센터들을 만들고, 역사적 ․ 사원적 전통이며 비의적(秘義的)인 구전의 가르침과 평민의 민담을 쓰거나 혹은 테이프로 기록하는 것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자료들은 분류되어야 하고, 비전의 가르침은 비밀이 보장돼야 한다. 그는, 작은 비불교집단을 위한 데라둔(Dehra Dun) 밖에 8에이커를 포함해서 갖가지 종교 집단을 위해 땅을 공급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종파 사이에 어려움이 있다. 게룩빠는 망명민의 거의 반을 이루는 소규모 종파를 일소시키고 합병하려 하여 비난을 받고 있다. 그들은 어떤 원조도 막으며, 가족을 해체시키고, 땅에 접근하는 것도 거부한다고 한다. 학자들이 다른 종파를 연구하려고 하면, 모든 대답을 정책선에서 변경하는 어떤 확실한 해석가를 통해서만 정보를 얻도록 한다고 말한다. 모두가 그러므로 서로를 의심하게 된다. 오늘날 라마들 가운데 타 종파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로서는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어렵고, 각 그룹은 다른 그룹을 위험하거나, 혹은 하찮은 요소로 얕보는 경향이 있다. 언어의 지역적 차이가 더 분화를 야기시킨다. 또한 일부 유복한 승려도 있다. 달라우지에서 거리를 걸어 보면, 어떤 승려는 공단과 멋진 옷을 입고 있는가 하면, 어떤 승려들은 매우 빈약한, 거의 누더기를 입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문제는 생계유지의 곤란이다.

승려들은 약초를 재배할 필요를 느끼나, 벌레를 죽일까 두려워 땅 파기를 꺼린다. 그들 역시 영어를 배운 젊은 승려를 요구한다. 다만 서서히, 내키지 않는 듯이 그들은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인도에 있어서 그들의 지도자와 더불어 모든 종파의 티베트 불교도들은 일차적으로 티베트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바라건 바라지 않건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와 인도 불교에도 얼마간의 영향을 갖고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티베트 승려들은 마하보드히 협회의 사찰에도 보이는데, 그들은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공부하기도 하며, 언어 문제에도 불구하고 인도 불교도 가운데 가장 커다란 집단인 암베드까르의 추종자들과 함께 일하기도 한다.

티베트 불교는 오늘날 인도에 있어서 하나의 종교적 세력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67년 12월, 달라이라마는, 마하라쉬뜨라에 있는 예오뜨말(Yeotamal)로부터 12마일 떨어진 나그(Nag)강 꼬땀바(Kotamba)에서 4일에 걸친 전 인도 불교도 회의를 주재하였다. 자그만치 3백만 인이, 인도뿐 아니라 스리랑카, 미얀마, 일본, 그리고 기타 불교국으로부터의 불교지도자들이 모였다. 대부분의 암베드까르의 추종자들이 있는 마하라쉬뜨라에서 회합 위치며 그 거대한 수자를, 티베트의 지도자가 신 불교 운동에 자신의 특권과 지지를 대여해 주고 있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