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심시심] 한 벗 웃음에 십년 세월 사라지다

2009-05-14     이종찬

  선의 세계에서는 원래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세계에서 시간이나 공간이 아무리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각 자체에서 있는 것이므로 이 생각으로 형성되는 사물의 존재를 생각으로 여의면 그 사물은 사라지는 것이다.

 끝없는 공간의
나와 남이라는 것이 터럭 끝의 거리도 아니며
수 십 세대의 시간이
끝내는 마음 한 자리의 생각에 벗어나지 않는다.

( ?????)

하였으니, 진여의 원융한 본체로 본다면 모든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귀일되므로 한 자리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말로 형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무엇이라 이름 지어 구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도 여의고 생각마저 끊은 상태다. 이것이 선에서의 말 없음이다.

조선조 중엽 취미대사(1590~1668)는 이러한 생각의 여윔을 자연 사물에까지 절로 되어 있는 분 같다. 그러한 사실이 언어로 표현될 때 시가 되는 것이다.

산은 나를 부르지 않고,
나 또한 산을 모른다.
나와 산
서로 잊은 곳,
바로 별달리 있는 한가로움.

(???)

처음에는 산과 내가 서로 마주보는 대상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에 집착되어 있을 때다. 이제는 산이 나요. 내가 산이다. 처음부터 산이 나를 불러서 살고 있다면 내 뜻에서 산 것이 아니라 산의 뜻에서 산 것이다. 내 몸은 내가 가장 가까운 것이라 모르듯이 산이 나와 가장 가까우니 알 수 없고 내 몸을 내가 늘 의식하지 않아도 나이듯이 산은 늘 산이요. 동시에 산도 아니요 나도 아니다.

물고기는 물에 노닐면서 물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에 유유자적하다. 내가 모든 대상을 잊고 나마저 잊었을 때 그것이 가장 한가함이요. 이상세계가 있다면 이것이 이상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잊음의 자세 이것이 시간을 초월 하는 것이다.

삼(?)사에 가랑비 내리고
선들바람은 팔월달 가을
만나자 한 벗 웃는 웃음에
십 년 세월 사라져 버렸네.

(???)

서늘한 산사의 팔월, 가랑비가 내린다. 여기 10년만에 만나는 동도인, 그 기쁨 말로 형언할 수가 없다.

말이 있다면 표현이 잘못 된 것이다.. 웃음 한번이 10년의 시간을 녹이고 만것이다. 굳이 염화미소가 아니더라도 묘체의 설명은 미소일 수밖에 없다 대사는 또, 다른 시구에서

평안히 끄덕이는 머리
묘체는 형언할 수 없어
(???)

하였으니 여기 부질없는 이야기는 대사의 시에 개칠한 것밖에 안된다.

(국문학. 동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