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

해외강단

2009-05-13     관리자

󰊱 미혹을 넘어선 입장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로 설명되고 있으나 여기서는 부처님이 깨달으시고 해탈하시고 열반에 이르신 그 은혜로 우리들 범부도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점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미혹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나, 인도 사람들은 윤회하여 새로이 태어난다는 생각이 매우 강하다. 그러한 생각은 부처님이 나시기 조금 전부터 현저했다고 생각된다. 초기불교에 의하면, 인생의 진실을 깨달은 성자는 생사를 초월하고 있다. 따라서 윤회를 초월하였다. 그래서 성자에게는 윤회가 없다. 완전한 인격자인 부처님은 최후의 몸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혹의 생존은 끝이 났다. 청정한 행은 확립되었다. 할 일은 이미 다 해 마쳤다. 우리들은 다시는 생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런 문구가 경전에는 자주 보이는데 이것이 이상적인 수행자의 모습이다.
여기에서 미혹의 생존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 것은 단순한 유물론이나 단멸론(斷滅論)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초월한 입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의 뜻
걸림이 없는 사람은 참된 도리를 알고 있다. 그에게는 생존을 위한 집착도, 생존의 단멸을 위한 집착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오래 살려는 생각에 매달려 있지만 그는 이것을 초월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은 생존의 단멸을 바란다. 이것도 하나의 미혹이다. 이런 집착도 없으므로 현세적 세속적인 것을 일단 초월한다.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는 입장도 또한 넘어선다. 걸림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 경지를 깨달은 사람이 부처님인데, 「붓다」라 하는 것은 깨달은 사람, 또는 눈 뜬 사람이라는 뜻이다. 붓다라는 말은 부처님 이전부터 인도의 여러 종교에서 쓰여 온 말이다.
붓다는 불교의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여 거기에 안주한 사람이므로 그 경지에 대한 말도 여러 가지이다.
인도의 가장 오랜 고전인 <리그 ․ 베다>에는 인간으로서 가장 바람직한 것을「요가 크셰마(Yoga-kṣema)」라고 하였다.
「요가」란 결합한다는 뜻인데 재물이든 소든 어떤 수확을 얻는 것을 말한다. 「셰마」란 소중하게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재물을 손에 넣더라도 사람은 마침내 죽어야 한다. 재물도 없어질 때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참으로 인간에게 바람직한 것이 못 된다는 반성도 있게 된다. 여기서 참된 인간은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말한 것이 불교이다.
「요가-크셰마」에 있어서 인간의 바람직한 상태를,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길을 실천하여 마음이 고요하고 부드럽고 편안한」것이라는 의미로 불교에서는 바뀌어 쓰였다.

평온에 이른 사람
그밖에 이상의 경지, 해탈의 경지를 말할 때의 예를 들면, 「행복」을 스바스티(Svasti)라고 한다. 이 말은 인도에서 지금도 쓰여 지는 말인데 불교에서도 쓰인다. 이상의 경지란 저 언덕〔피안〕이라 하여 범어로 파라(Pāra)라고 하는데 이 말은 자이나교에서도 쓰고 있다.
수행자는 저 언덕에 이른 사람이다. 수행을 완성한 사람을 「흐름을 건넌 사람」이라고 한다.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것을 말한다. 우리는 구국의 목표를 진리하고 하는데 진리는 스스로 체득하고 모든 사람이 제각기 스스로 어려움을 넘어서 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타인이 알지 못한다고도 하는 것이다. 또 인생의 최고 목적, 즉 편안함을 추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사뭇 추상적인 듯 생각되지만 인도사람에게는 사뭇 구체적으로 이야기 된다. 수행자는 편안함에 돌아온 사람이라는 뜻에서 성자의 고요한 심경을 거울 또는 고요한 바다, 혹은 부동한 바위에 비교되고 있다. 대개 수행자의 심경을 노래한 장노게(長老偈)와 장노니게(長老尼偈)에는 이런 말들이 보인다.
「나는 이제 아무 집착하는 것 없이 편안함에 돌아 왔다.」
마음의 고요함을 강조하여 편안한 길로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맑고 시원스런 호수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요함이란 움직임이 없어진 교요가 아니라 안에 힘이 충실한 고요를 말한다.
또 이런 말도 보인다.
「얕은 개울물은 소리를 내고 흐르지만 큰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부족한 것은 소리를 내지만 가득 찬 것은 아주 교요하다. 어리석은 자는 반쯤 찬 물병과 같고 어진 사람은 물이 가득한 호수와 같다.」
「부족한 것은 소리를 낸다.」란 말은 어떤 통렬한 비꼬임을 느끼게 한다. 인도사람에게는 이 말이 지금도 살아 있어서 경사스러운 일에는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워 놓는다.
이처럼 고요함에 돌아와 아무런 걸림이 없다는 것은 안락한 경지이다. 해탈의 경지이며 최고의 경지이고 「최다의 안락」이라고 불리 운다.

안락이라는 사상
고요한 것이 안락하다는 사상은 예부터 불교에서 일러온 말이다. 고요하고 편안한 이상의 경지를 「니르바라(Nirvāṇa)」라고 하여 음대로 적어서 열반이라 하고 원적(圓寂)이라고 번역도 한다. 닐바나의 말의 뜻은 대체로「불꽃이 사위어 꺼져 없어진 것, 불꽃이 꺼져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우리 마음의 번뇌의 불길이 켜진 것은 닙바아파나(NiBBāpana)라고 한다. 닢바이파나는 니르바나와 같은 말이다. 해탈한 사람은 니르바나에 들었다고 한다.
「핀갸」라는 노인이 부처님에게 물었다.
『저는 늙어서 쇠약해졌습니다. 눈도 희미하고 귀도 잘 안 들립니다. 제가 미혹한 채로 죽지 않도록 진리의 가르침을 저에게 주십시오. 이 세상에서 생과 노쇠를 벗어나는 것을 알고 싶습니다.』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핀갸여, 물질적 형태가 있으므로 사람은 허물어지는 것을 보게 되고 물질적 형태가 있으므로 게으른 사람들은 병에 시달린다. 그러므로 그대는 게으르지 말고 물질적 형태를 버려서 다시는 생존상태에 돌아오지 않도록 하라.』
하시며 물질적 속박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물질적 조건은 여전히 거기에 남아 있다. 그에 속박되지 않으려면 어찌하면 좋을 런지 핀갸 노인이 거듭 물으니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핀갸여, 사람들은 망령된 집착에 빠져 고뇌가 생기고 늙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니 그대는 게으름이 없이 망령된 집착을 버려 다시는 미혹의 생존에 되돌아오지 않도록 하라.』

열반의 경지
우리들의 속에 숨어 있는 맹목적이며 근본적인 충동인 망집(妄執)은 참으로 끊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를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세상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아름답고 쾌적한 사물에 대한 욕망이나 탐착을 없애는 것이 불멸의 니르바나의 경지이다. 이 도리를 잘 알아서 힘써 조심하여 현세에서 온전히 번뇌를 여인 사람은 항상 편안함에 돌아간 사람이다.』
이 니르바나의 경지는 미혹한 범부들이 의지할 곳이므로 큰 강물가에 있는 섬에 비유되기도 한다.
『매우 두려운 거친 물결이 밀려들었을 때 늪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늙고 병들고 죽음이 밀어 닥쳤을 때 사람들을 위하여 피나 처인 섬〔洲〕을 나는 말할 것이다. 아무런 소유도 없고 집착이 없는 것이 이것이 곧 성이다. 이것을 니르바나라고 부른다. 그것은 노쇠와 죽음이 소멸한 것이다. 이 도리를 잘 알아서 조심하여 현세에서 번뇌를 여읜 사람들은 악마에게 압도되지 않는다. 악마의 종자가 되지 않는다.』
편안함〔니르바나〕이라고 하면 어쩐지 멀리 떨어져 있는 경지인 듯이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지 못하고 있을 뿐, 우리들은 근처에 있어서 이미 그 편안함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덮인 사마에게 어둠이 있다. 바르게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캄캄한 밤이 있다, 그러나 선량한 사람에게는 온전한 드러남이 있다. 마치 바르게 눈뜬 사람에게 광명이 있는 거와 같다. 바른 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은 편안함의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이미 구원받고 있다는 사고방식은 도원(道元)이나 친란(親鸞)에게서 현저하다. 「번뇌장안수불견(煩惱障眼雖不見) 대비무권상조아(大非無倦常照我)-번뇌가 눈을 가려 못 본다. 이르지만 부처님은 끊임없이 나를 항상 비추신다.」라 하여 번뇌 때문에 보지는 못하지만 정신 차려 볼 때 부처님의 큰 자비는 이미 우리들을 감싸고 있다는 말이다.
덕이 높은, 수행이 깊은 사람을 만나면 느끼는 것이 있다. 바람직한 경지라 하는 것은 현실을 버린 곳에 잇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받아서 거기서 살고 그러한 대상을 지배하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수행을 이루어 밝은 지혜를 얻어 진리를 깨달으면 거기에는 범부들이 갖고 있는 정신적 육체적 활동작용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다. 그것들이 우리를 속박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린다왕은 나가세나장로에게, 깨달은 사말도 고통이 있느냐고 물었다. 장로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부처님은 일체 악을 떠나 완전한 상태에 계시다. 그러나 니르바나에 이른 사람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마음의 고통을 낫게 하는 인(因)과 연(緣)이 다 풀어졌으므로 마음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大道에 문이 없다
참된 자기를 보게 되면 거짓된 자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망집에서 벗어나고 과거에 걸림 없고 현재에 근심 없으며 미래를 걱정 않는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열반에 이른다는 것이 초기의 수행자의 심경이었다. 고요하고 편안한 경지, 이것을 적정(寂靜)이라 하고 샨티(śānti)라고 한다. 평화라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해탈이고 해방이다. 해탈이란 한 가지 한 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해탈한 사람은 이 세상에 살고 있다. 개인적 존재로서 오온(五蘊)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미혹의 생존을 반복하는 일이 없게 된다.
절대의 경지란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그것을 얻으려고 실천하고 가르치는 것이 불법(佛法)이다. 불법은 대도(大道)이다. 대도에는 문이 없다. 모든 사람을 포용한다. 교리를 세워 다른 사람을 이단시 하는 일이 없다. 불도의 위대한 길은 여기에 있다. * (이 글은 일본「在家佛敎」第三三四號에서의 초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