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강의실] 20.보현행원품 강의

성전강의실

2009-05-13     광덕 스님

  ꊷ수순의 구체적 방법

  경에는 『병든 이에게는 어진 의원이 되고 길 잃은 이에게는 보배를 얻게 한다.』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중생을 수순하는 구체적 방법을 말씀하고 있거니와 거기서 우리는 불자의 사회적 역할의 근본성격을 또한 보는 것이다. 불자가 이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이유 불자의 집단인 교단이 이 사회에서 수행할 과업을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첫째는 병자에 대하여 어진 의원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병이라 하면 우선 신체적 고통을 가져오는 육체적 부조화를 생각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병이다. 정신적인 병 마음의 병이 부리가 되어 육체적 병이 나타난다는 것은 오늘날 공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진 의원이 되자면 무엇보다 현실적 공통을 제거하고 육체적 정상적 건강으로 회복시켜 준다. 그리고 병을 유발시킨 원인을 분명히 일러주어 마음속에서 병을 제거하여야 하며 병을 성장시키는 정신적 생활적 요인을 없애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

  병에 대하여 어진 의사가 되라는 말씀은 병을 알고 약을 쓴다는 것이니 중생들이 그릇된 생각과 행동으로 인하여 그 마음이 거칠어지고 상처를 입고 응어리가 생김으로써 가지가지 불행이 생긴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불자는 모두가 이 수순중생의 가르침을 통하여 어진 의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워하고 불평대고 분노를 품고 또는 슬퍼하고 또는 실망함으로써 병의 싹은 커간다. 그러므로 미워할 사람이 없으며 모두가 함께 따뜻한 인정을 나누는 불행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다. 원래로 한 몸이며 원래로 서로가 은혜로운 존재며 감사할 대상인 것을 알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필경 자신을 병들 수 없는 몸이며 원래로 무명자임을 알게 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속에 끼쳐진 병의 뿌리는 그 것이 성장함으로부터 그 어두운 그림자를 사방에 나타낸다. 심성위에 나타날 때는 불안과 갈등이 되고 몸에 나타날 때는 고통이 되고 환경에 나타날 때는 불행한 사고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불자의 수순중생에서는 이들 모든 병을 알고 고쳐주는 것이다. 육체적인 병이나 불행이 원인이 있는 것을 알아서 그 뿌리부터 제거해주는 것이 보살의 수순이며 치료법이다. 원인적 치료를 못하는 의사는 임시적 조치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점에서 살펴볼 때 불보살은 참으로 대의왕(大醫王)이시다. 병고를 없애고 불행을 없애고 마음의 뿌리를 없애고 필경 부병강건 묘 자재 본신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예부터 이르기를 부처님의 말씀을 약방문이라 하며 묘약이라고도 한다. 그 약은 받아먹으면 무병 강건해서 50세 백세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불사(不死)의 도리를 얻게 하는 불사약(不死藥)인 것이다.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에서 불사의 묘방을 배우고 불사의 약을 마실 줄 알아야 하겠다.

  그리고 이 병은 개인적인 병분만 아니라 사회적인 병 집단적인 병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적·사상적· 구조적 병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 사회적·사상적· 구조적 병에 대한 대책이야말로 무엇에 못지않은 불자의 1차적 책임이라 할 것이다. 오늘날의 개인적인 병고는 그 원인이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다. 아니 그보다도 오늘날의 개인은 그 개인의 독자성을 잃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구조적 힘의 체제 속의 개인인 것이다. 개인의 병고와 불행을 근본적으로 소탕하고 개인의 능력과 덕성을 원만히 키우기 위하여서도 사회적 정신적 병의 제조하고자 한다. 사회적 병의 치료는 사회 정화운동이며 사상적 각성운동이며 평화운동이다. 개아의 가치와 존재양태를 밝혀주며 사회번영의 원리를 제시하여 이에 어긋나는 그릇된 사상과 제도와 사고방식을 뜯어고쳐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법을 진실하게 행하고 진실하게 전하며 전실한 사회의 빛으로써 그 책임을 다하는 불자의 기대는 참으로 크다 하겠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적인 불안과 혼돈이 필경 불자가 그 사회적인 불안과 혼돈이 필경 불자가 그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은 데서 왔다는 사실로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ꊸ 바른 길을 가르쳐라

  둘째로 길 잃은 이에게는 바른 길을 가르켜라 하셨다.

  무엇이 길인가? 생명의 길이다. 번영의 길이다. 평화의 길이다. 깨달음의 길이며 불국에 이르는 길이며 불심을 행하는 길이다. 오늘날 시대를 방황의 시대라고도 한다. 길을 잃고 있다기보다 나아갈 목표를 잃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생의 참된 의미를 잃어 버렸고 사회는 가치의 기준을 잃어버렸고 역사는 그 방향을 잃어버렸다. 참으로 방황의 시대요 혼돈의 시대다.

  길을 걸을 때 다리의 힘이 좋거나 장비가우수하거나 의욕이 왕성하거나 그 무엇에 앞서는 것이 목표에 이르는 바른 길이다. 목표를 잃었다면 그것은 오리무중인 것이다. 길이 없는 것이다. 목표를 두고야 지름길도 있고 도는 길도 있으며 험한 길도 있고 평탄한 길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아예 목표를 잃고서 부질없이 억센 팔다리의 힘과 우수한 장비를 소모해가며 방향 없이 정처 없이 마구 몰아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길가는 자에게 이보다 큰 위기가 있는가?

  그런데 이러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중에서도 다행이다. 그것마저 모르는 데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육체만을 자기로 알고 물질의 축적이 가장 안전한 일신안보 책으로 알고 패당의 조직화를 최상의 안전보장책으로 착각하는 중생세계는 실로 기막힌 『길 잃은 상태』인 것이다. 불자들은 먼저 중생들이 미혹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목표를 잘못 설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각운동을 향한 사상운동의 전개는 이것이 불자의 근본과업의 하나인 것이다.

  다음에 미혹을 깨우쳐 줄 뿐만 아니라 바른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 세대가 길을 잃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줄 뿐만 아니라 「이것이 바른 길이다.」하고 일러주어야 하는 것이다. 시대와 역사와 사횡에 대하여 그 상황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어야 하는 것이다. 시대와 사회와 사상에 대하여 정견의 안목에서 진단하지 못하고 처방하지 못한다면 그런 종교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길은 여러 길이 있다. 개인의 마음이 갈 길도 있고 개인이 행하는 길도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 가는 양심의 길도 있고 기나긴 역사가 함께 흘러갈 평화와 정의의 길도 있는 것이다. 국가가 부강해질 길도 있고 한 단체나 조직이 흥왕할 길도 있다. 손수레가 가는 길도 길이며 기차가 가는 길도 길이다. 그런데 이 여러 길의 공통점이란 모두가 함께 승인하고 이해하며 모두와 함께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길은 그것이 마음의 길이든 고속도로이든 모두가 함께 있고 함께 가고 있다는 공통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길이란 원래로 바른 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삿된 나쁜 길은 길일 수 없는 것이다. 만인은 길에서 함께 있고 길을 감으로써 함께 성취와 번영이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공통·통일의 길 위에서 우리는 평화와 번영을 약속받고 있는 것이며 그 길에서 벗어날 때 불행이 오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우리가 함께 있는 길, 즉 참된 존재방식과 번영의 방식을 바로 아는 것이 이것이 바른 길을 가는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ꊹ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서로가 함께 어울려서 존재하는 것이며 결코 개아로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길에서는 서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감으로써 번영의 피안에 통해지는 것이다. 하나의 원리 위에 하나의 이치를 함께 쓰고 함께 다스림을 받으며 함께 성공을 실현해가는 것이다. 이것이 길이 아닌가. 이것이 만인이 추구하는 길의 원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에 어긋나는 사고방식이나 행위는 길이 아니다. 불행에 이르는 길이며 파멸해 이르는 길이며 사회나 역사를 욕되게 하는 길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물질주의며 이기주의다. 육체나 물질로써 자기를 삼음으로써 일체 이웃과 일체 자연과 진리와 대립한다. 그리고서 육체적 개아를 고집한다. 존재는 물질이며 가치는 물질이다 라는 논리가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물질주의적 입장은 이기주의적 행동과 팽창기술이 거기서 퍼져가는 것이다.

  바른 길을 역행하는 최대의 악덕은 이래서 물질주의와 이기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인간미망의 틈에서 싹트는 독버섯이다. 그래서 3천년 전에도 왕성히 솟아났었고 역사를 흐르는 틈틈이 처처에서 미혹의 계절과 상황에 따라서 발호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아주 엄청나게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기주의나 물질주의의 독버섯은 인간존재와 번영원리를 근본적으로 역행하는 것이므로 거기에서는 인간불행과 파멸만을 가져온다. 오늘날 세대는 팽대하는 물질주의· 이기주의적 풍조 속에서 중대한 위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물질의 생산도구가 되었고 인간의 동물성을 성화하게 되었다. 그리고서 그 결과는 수많은 생령들이 압제와 공허 속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불안과 공허·방황, 황폐한 심정과 갈등 그 모두가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 연유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본다. 따라서 불자가 일어서 싸워야 할 것은 바로 인간암흑을 조성하는 근원적 미혹과 그에 뿌리한 사상체계이다.

  이 점은 인간에 있어서 근원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혹에 대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도 바로 이에 대한 처방과 교화활동으로 이 땅 위에 불법과 교단을 성립시켰던 것이다.

10.시대의 照明者 역사의 향도자

  수순중생장에서 말씀하신 『바른 길을 가르킨다』는 법문만큼 우리의 눈을 자극하는 것도 드물 것이다. 불자가 『바른 길』을 가르키는 『불법의 행동자』되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가르킨다』는 것은 알도록 길을 일러주는 것이다. 그것은 말과 몸짓으로 길을 가리키는 것 만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불자는 모름지기 역사 속에서 진리의 조명자가 되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현실적 향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대와 역사의 현실을 진리의 거울에 비추어보고 <이것은 진리의 길이다>, <이것은 진리의 길이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그것은 진리에 비추어보아 그릇된 것을 고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자는 고발적 증언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역사적 현실 위에 진리의 본분을 명확히 드러내어야 한다. 진리의 태양이 소소히 밝고 역사적 현실이 그 햇빛아래 뚜렷이 드러날 때 거기에는 말을 넘어선 증언과 고발과 격려와 처방이 함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불자는 이러한 진리의 조명자 이상의 행동자이어야 하는 것이다. 현실에 대하여 비판하고 고발하는 것을 넘어서 바른 길을 스스로 실천하며 행하여야 한다. 비진리에 대한 항거나 모순적 현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진리에 의한 긍정적 측면을 실천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 긍정적 측면을 힘써 실천한다는 것은 비판이나 부정보다 몇곱이나 차원을 달리하는 건설적 힘이 있는 것이며 사회적 안정이 있는 것이다. 불자가 바른 길을 일러준다 하여 긍정적이며 건설적 실천이 없이 한낱 비평과 부정과 항거에 그친다면 그것은 불자가 아니다. 역사적 현실을 담당한 주체적 책임자가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역사와 시대에 대해서 바른 길을 일러주는 불자는 정히 사회의 향도자가 괴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 한국불자들의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한편 긍지도 없지 않으나 부끄러움 또한 크다. 국가와 사회에 있어 『바른 길을 가르키는』자로서 책임을 다하였는가? 사회의 『향도자』로서 얼마만한 실천이 있었던가? 또한 오늘날 이러한 책임을 수행할 불자와 교단 내에 각오와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있는가?

  거기에는 뜨거운 반성과 함께 새로운 각오와 앞으로의 다짐할 부분이 더 많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유감 유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