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다시 생각 합시다] 5.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

불교를 다시 생각 합시다 <5>

2009-05-13     김재영

  - 전도행(傳道行) ~ 우리가 몸 바칠 지상명령(至上命令)

 ♧ 부루나 존자의 순교

  부루라(purna · 富樓那)는 코살라국(國)의 바라문<브라만교의 사제>출신으로 항상 수행과 전도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 나아가 고하였습니다.
「부처님 이제 저는 멀리 서쪽의 수로나국(國)으로 가서 부처님의 정법을 전도하여 하오니 허락해 주소서.」
「부루나여, 수로나 백성들이 사납고 모질다. 만일 그들이 그대를 꾸짖고 모욕하면 어찌 하겠느냐?」
「부처님 저는 그때에 『수로나 사람들은 어질고 착해서 나를 주먹으로 치고 돌을 던지지는 않으리라.』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
「부루나여 만일 그들이 주먹으로 치고 돌을 던진다면?」
「부처님 저는 그 때에 『수로나 사람들은 어질고 착해서 나를 칼로 해치지는 않으리라.』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
「부루나여 만일 그들이 칼로 해친다면?」
「부처님 저는 그때에 『행자(行者)는 부처의 정법을 구하기 위하여 기꺼이 이 육신 버리기를 원하는데 수로나 사람들은 어질고 착해서 나로 하여금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큰 공덕을 짓게 하는구나.』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
「착하고 착하도다. 부루나여! 그대는 잘 수행하여 능히 인욕(忍辱)과 자제(自制)를 얻었도다. 너는 이제 수로나로 가라. 가서 여래의 정법을 널리 전하라. 사납고 모진 백성들을 제도하여 부처의 나라로 인도하라.」
부루나는 곧 수로나로 가서 남녀 오백 명씩의 백성들을 제도하고 흉포한 자들의 박해로 순교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처님은 그를 찬탄하셨습니다.
「장하다, 부루나여! 그대는 무한 생명을 성취<증득(證得)> 하였구나.」
<※참고 · 현암사 - 석가의 생애와 사상 P 259~261 · 법통사 - 우리말 팔만대장경 P 386~387)

  ♧ 무엇이 먼저인가?
  어느 종교를 물론하고 전도의 문제포교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고려되고 또 가장 헌신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불교 쪽 사정은 꼭 그렇지도 못한 듯합니다. 포교 전도행에 대한 이념적인 갈등 내지는 가치관의 혼란이 본질적인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불자의 기본 사명이 문제될 때,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곧 위로 보리(지혜)를 찾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대답이 우리 불자들 사이에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상구보리 <수행>한 다음에 하화중생 <전도>하겠다.」 라는 관념으로 해석되고 또 그렇게 사고(思考)되어져 왔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전통 불교 사회에서는 아주 강한 고정 관념이 되어서 출가 스님들 사이에도 오로지 수도에만 전념하는 것이 높이 평가되고 세상에 나가 전도하고사회 사업에 종사하는 것은 질이 낮은 하류층(下根機)의 일로서 기피되거나 경시되어 온 느낌마저 듭니다.
「내가 깨치지도 못하였는데 어찌 남을 제도하고 전조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너무도 조리 정연한 주장이 포교 전도행을 갈망하는 중생들의 입을 침묵시켜 왔던 방편<무기>이 되어왔던 전철을 우리는 아직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불교를 찾는 개인적 동기의 입장에서 볼 때는 수행을 앞세우는 이런 주장은 일응 타당한 것인 듯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이웃」을 동반하지 않는 「나(自我)의 추구」는 필경 통로가 차단된 아집(我執)의 함정으로 자신을 침몰시키고 이리하여 불교 집단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역사 창조의 정열을 상실한 채 제 설 자리를 모라 헤매어 온 것이 아닙니까?
불자의 수행은 나 <小我 · 我想>를 버리는 것으로 그 근본을 삼는 것인데 제 방향을 잃어버린 「상구보리」가 「하화중생」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처음부터 틀린 일일지도 모릅니다.

  ♧ 첫째 바라밀은 전도행(傳道行)

  포교 전도행을 통하여 이웃과 함께 살고 세상과 함께 가려는 전도 정신은 석가모니 당시의 본래 교단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상가(sangha- 교단) 대중들은 실제로 뜨거운 열정과 사명감으로 이 전도행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수행자들아! 자 이제 전도의 길을 떠나가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사람들과 신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떠나가라. 수행자들아!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하여 우르벨라의 세나니가마(村)로 가리가」 <※ 잡아함경- 39~16 ○현암사 - 아함경 이야기 P69-77>
  이 전도의 명(傳道令)을 받은 수행자<사문>들은 모두 출가 직후의 제자들로써 이들은 길과 마을을 찾아 전도하고 수행하고 또 수행하고 전도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수행과 전도가 결코 둘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땀 흘리는 전도행이야말로 최선의수행이 되는 것임을 그들은 너무도 명백히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깨달은 자에게나 아직 덜 깨달은 자에게나 전도행은 가장 거룩한 바라밀(paramita .` 波羅蜜~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길> `이요 가장 첫째가는 바라밀이요 가장 먼저 해야 할 바라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든 불자들이 함께 나아가는 6바라밀의 첫 머리에 보시(布施~멀리 베품)가 있고 보시바라밀 가운데 법시(法施) 곧 전도행이 가장 으뜸이라 정하신 부처님의 속뜻을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불자들에게는 부루나 존자와 같은 전도 행자가 진실로 기다려집니다. 아침저녁으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이제 이 땅에서 그 은은한 범종 소리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일요일이면 거리를 확보하는 성경 낀 학생들을 보면서 누구도 돌봐주는 이 없는 쓸쓸한 사찰의 학생 법회를 생각합니다.
「행자들아! 자 이제 전도의 길을 떠나가자.」
나와 당신이 이 부처님의 명(命)앞에 순종할 때 저 부루나 존자의 용기와 정열을 백2분의 일이나마 닮아가려 수고할 때, 진정 이 땅 위에는 잊혀진 종(梵鐘)소리가 다시 울려 퍼질 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