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의심할 뿐!

선가귀감 강설 11

2007-01-16     관리자


제27장
願諸道者, 深信自心, 不自屈不自高.
바라건대, 수도하는 사람들은 깊이 자기 마음을 믿고, 스스로 뒤로 물러나거나, 스스로 잘난 체하지 말지니라.

이 마음은 평등하여 본래 범속함과 성스러움이 없느니라. 그러나 대개 사람에게는 어두운 이와 깨친 이가 있고, 범부와 성인이 있느니라.
스승의 깨우침에 힘입어 홀연 ‘진아(眞我)가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음은 이른 바 돈오(頓悟)라고 하느니라. 이런 까닭에 스스로 물러나지 말지니라. 『육조단경』에서 노(盧) 행자가 돈오를 이르시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본래 한 물건도 없느니라.”라고 하였느니라.
깨친 후에 익힌 습기(習氣)를 점차 끊어 가면서, ‘범부를 고쳐 성인이 되게 함’은 이른바 점수(漸修)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스스로 높이지 말지니라. 『육조단경』에서 신수(神秀) 스님이 점수를 이르시되,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하라, 부지런히 털고 닦을지니라.”라고 하였느니라.
물러나는 저(低) 자세는 교학자의 병통이고 스스로 높이는 고(高) 자세는 선학자의 병통이니라.
교학자는 참선 문 안에서 깨쳐 들어가는 비결이 있는 것을 불신하고, 방편의 가르침에 깊이 걸려 참과 거짓을 달리 집착하며 관행(觀行)을 닦지 않고, 남의 보배만 헤아려서 스스로 물러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선학자는 교문에서 닦고 끊어가는 정도의 길이 있는 것을 불신하고, 물든 마음과 익힌 습기(習氣)가 일어날지라도 부끄러움을 낼 줄 모르며, 공부의 수준이 겨우 초심자임에도 불구하고 법에 대한 우쭐한 생각이 많아 스스로 높이는 말을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바른 뜻을 가진 수심자(修心者)는 양극단으로 스스로 물러나는 자세나 스스로 높이는 자세를 취하지 말지니라. 평하여 이르되, “스스로 물러나는 자세나, 스스로 높이는 자세를 취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입장에서 보면 다 원만한 둥근 원과 같아, 초발심 때라도 벌써 중생의 시작점이 부처의 완성점과 맞닿아 중생이 곧 부처로 하나이기 때문이며, 또한 생멸(生滅)의 입장에서 보면 보살의 완성이 있기까지는 초발심에서 점차 수행해 오르는 55위의 단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니라.

강설
보조 스님은 「계초심학인문」에서, 법문을 들을 때에 빠지는 단견(斷見)·상견(常見) 두 가지 양 극단을 말한다.
첫째, 단견은 현애상(懸崖想)이다. 현애상은 낭떠러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사람의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를 표현한 말이다. 선지식의 법문을 따르기가 몹시 어려워 포기하고 말겠다는 나약한 사람은 말한다. “나는 근기가 약하고 전생 습기가 많아 금생에는 다만 부처님 법의 인연이나 짓고 가야지, 성불은 그만두자.”
둘째, 상견은 관문상(慣聞想)이다. 관문상은 습관적으로 어제도 그 말, 오늘도 그 법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법문이 별것 아니라는 경박한 마음을 낸 사람은 말한다. “선지식 법문이 별것 아니구나! 늘 듣는 그 말이네!”
도 닦는 사람이 선지식에게 경박한 마음을 내면 백년이 지나도 별 수가 없는데, 간혹 큰스님의 시자들이 측근에서 자주 습관적으로 듣는 법문이라고 하여 가벼이 여기는 경우가 있다. 법문을 들을 때에는 허회문지(虛懷聞之)하여, 마음을 텅 비우고 듣는다.
지리산에서 정진하는 구참 스님의 일화이다.
도반이 찾아왔다. 서로 오랜만에 만나도 수좌들은 공부이야기이다.
“스님, 화두가 어떻습니까?”
대답은 간단한 법문이다.
“다만 의문을 가질 뿐입니다!”
화두가 어렵다거나 쉽다는 생각이 없이 오직 한길로 ‘이뭣꼬?’ 정진(精進)만 있을 뿐이다.

관행(觀行)
마음으로 관(觀)하여 진리를 터득하였다면 생활 속에서 터득한 그 진리를 행(行)한다는 말이다. 혹은 자기 본래 성품을 밝게 관조(觀照)하는 방법으로 여러 선지식의 관심(觀心) 행법(行法)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 뜻을 말한다.

보살(菩薩)
보리살타(菩提薩狎)의 준말. 부살(扶薩), 살타(薩狎)라고도 한다. 뜻으로는 각유정(覺有情), 개사(開士), 대사(大士) 등으로 번역하며, 성불하려고 수행하는 사람의 총칭이다. 넓은 의미로는 대승 불교의 가르침에 귀의한 불자이다.
보살이란 큰마음을 내어 불도에 들어오고, 사홍서원을 내어 육바라밀을 수행한다.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을 닦으며 여러 수행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佛果)를 증득한 사람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많이 떠오르는 지장보살은 이와 구별한다. ‘지옥 중생이 하나도 남지 않아야 성불하겠다’고 하여 영영 성불하지 않겠다는 대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이기에, 이와 구별하여 대비(大悲) 천제(闡提)라고 한다. 근원에서 보면, 육도 중생을 다 제도하지 못한 부처는 세상에 한 부처도 없다. 그 까닭은 육근(六根) 중생을 제도하면 육도(六道) 중생도 함께 제도되기 때문이다.
경전에 나오는 첫 보살의 이름은 전생 석가모니 부처님의 명호인 호명(護明, 일명 善慧) 보살이다. 과거불 연등(燃燈) 부처님이 호명 보살에게 수기(授記)를 내리면서 말한다.
“미래에 반드시 성불할 것이니라.”
『팔상록(八相錄)』에서는 호명 보살이 도솔천 내원궁에서 강림하여 태에 들고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는 모습이 장엄하게 묘사되고 있다.

55위(五十五位)
51위, 52위 등 경전마다 조금씩 다르다. 55위는 『능엄경(楞嚴經)』의 가르침이다. 분석하는 알음알이 지식의 간혜지(乾慧地)를 지나서 열 가지 믿음 자리인 십신(十信), 열 가지 머무는 자리인 십주(十住), 열 가지 나아가는 자리인 십행(十行), 열 가지 돌이키는 자리인 십회향(十廻向), 네 가지 더 힘쓰는 자리인 사가행(四加行), 열 가지 땅인 십지(十地)의 단계를 지나서야 성불하는 과정이다.

제28장
迷心修道, 但助無明.
미혹한 마음으로 수도를 한다면 단지 무명만을 도울 뿐이니라.
깨달음이 만약 투철하지 못했다면 어찌 수행이 참되다고 이르랴! 깨침과 닦음의 관계는 마치 기름과 불이 서로 돕고, 눈과 발이 서로 돕는 관계와 같으니라.

강설
예 하나. 무소유(無所有)에 대한 절도범 미결수의 자기변호이다. “모두가 무소유야! 주인이 따로 없어 죄 될 것도 없다. 죄라면 시간이 죄야! 잡히는 시간을 잘못 택했을 뿐이네!”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법문을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다.
묵조선(默照禪)의 구호로 지관타좌(只管打坐)가 있다. 지관타좌는 ‘다만 앉아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좌선(坐禪), 즉 청정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뜻에서 말한다.
“한 시간 앉으면 한 시간 부처, 열 시간 앉으면 열 시간 부처.”
지혜롭지 못한 시민 선방의 불자 가운데는 앉는 것만을 종으로 삼아 하루 종일 우두커니 앉아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보리자루를 선방에 백날 놔두는 격이니 어찌 부처가 되기를 기약하랴! 맑은 정신으로 앉아 단 10분이라도 소중함을 일깨우는 일이 중요하다. 보조 스님은 말한다.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