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단] 선禪과 노동 생산

2009-05-10     쇼오킨 후루타(吉田紹欽)

여기서 노동, 생산이라 한 것은 일반적 용어가 아니다. 노동은 선에서 말하는 작무(作務)이고, 생산이란 그 작무와 관계 있는 생산을 말한다.

1. 禪과 사찰운영

노동과 생산의 문제는 그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든지 간에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불가결한 행위이므로 이것이 선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선에서 노동생산이 이윤추구행위는 아니라 하더라도 선에서 살아가는 행위가 없다면 그런 가르침은 안개를 마시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거와 같다고 하리라.

선이 이런 살아가는 행위라고 할 과제에 직면한 것은 선종사에서는 대체적으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의 일이다.

중국에 선을 전해온 것은 5세기 후반이다. 인도에서 보리달마가 전해 왔다. 그 선은 남북 이종(二宗)으로 나뉘어 발전하고 마조도일(馬祖道一 707~786)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 때가 되면 참선수행에 뜻하는 사람이 사뭇 늘었다. 마조 문하에는 139인이 있었다고 하니 석두문하에도 그에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부터 덕망이 있는 고승은 왕후나 귀족, 그밖에 유력한 신도들의 귀의를 받아 저들의 보시헌공에 의하여 절을 경영하여 왔지만 마조문하처럼 수행자가 백 명을 넘게 되면 보시헌공만으로 생활을 유지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무엇보다 식량문제가 절실하게 되었다. 혼자 산중에서 수행한다면 나무 과실이나 물을 마실 수도 있었겠고 소수인이라면 걸식이나 그 밖의 공양으로도 견딜 수 있었지만 다수가 되고 보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두산(牛頭山)에 있던 법융(法融 594~657)은 산중에서 수행하는데 문도가 3백 명이 넘어 양식이 모자라 스스로 산을 내려가 8십리 밖에서 희사를 모아 등에 지고 산에 돌아와 문도를 공양하기를 3년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법융의 시대에서 백장(白丈)의 시대가 되면 문제는 심각을 더하여 어떤 타개책이 절실하였다. 백장이 율원(律院)에서 선원을 독립시킨 것은 바로 그 타개의 길을 연 것이고, 그 독립에 의하여 참선수행자는 반드시 자활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선원이 독립한 후 독자적인 청규(淸規)를 만들었다. 그것은 선원에서 생산활동의 합법화를 도모한 것이 초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백장은 청규를 제정하면서, “대소승에 걸리지 아니하고 또한 다른 것도 아니고 박약절중(博約折中)한 것이 선문규식(禪門規式)이다.” 라고 하였다. 대소승 계율에 국한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고서 그 취지를 절중하여 정신을 살렸다고 출가자의 금지되었던 생산활동을 인정하고 금전을 갖는 것도 인정한 듯하다.

선원에서 생산활동이라 하면 농경에 의한 식량수확이 첫째이다. 그러기 위하여 농지를 개간한다. 초목을 베는 것도 부득이하다. 당시 큰 절은 농장이 있어 거기서 나는 수익으로 축재하고 또한 사원을 경영하였다. 백장은 그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경지를 개간하였다.

백장은 청규를 제정하면서 선원의 주인 되는 사람은 도안을 갖춘 대덕이어야 한다고 수행연수에 따라 수행자의 서열을 안배하고 함께 좌선에 전념하라고 하였다. 수행자가 많게 되어 십무(十務)라는 직무자를 두어 수녕 되는 사람 밑에 통제되도록 하였다. 하루 2번 먹는 대중식사도 절약을 위주로 하고 미식이 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계하였다. 특히 보청(普請)을 역설하여 작무 즉 노동은 서열의 구별 없이 함께 종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이 점은 생활자료를 얻는데 각자가 책임지게 한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십무에는 밥을 맡은 반두(飯頭), 채소를 맡은 채두(菜頭), 산의 나무를 맡은 시두(柴頭), 차를 마시게 되어 차밭을 가꾸게 되니 다두(茶頭) 등도 있었다.

선원의 생산이 비록 경제적 이윤을 목적한 것은 아니라 하여도 노동을 낭비하는 것은 선의 정신에서도 허락되지 않았다. 대체로 작무는 행동적 좌선이라고도 할 정신이 근간이 되어 있어서 다만 먹기 위한 작무가 아니고 좌선수행으로 살기 위한 작무이며 작무를 낭비하는 것은 수행을 낭비하는 것으로 보았다.

2. 禪 노동의 참정신

백장이 독자적인 청규를 제정하여 참선수행자의 자활의 길을 든 것은 중국 선종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중국 선종사는 백장시대와 그 이전 시대로 나누어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장 이전의 선종은 대소승의 계율을 기초로 한 것이고 백장 이후의 선종은 청규에 의한 것이므로 거기에는 다른 것이 있는 것이다.

운문(雲門 864~949)의 간시궐(亁屍橛), 동산(洞山 910~990)의 마삼근(麻三斤)과 같은 문답이 공안으로 있게 된 것도 백장 이후의 작무에 유래한 것이리라.

백장 이후 작무가 급속하게 확대된 것은 백장의 제자인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이 있고 그 문하에는 수백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전기에 의하면 방아를 찧고 산에서 나무를 하는 일들이 보인다. 또 남전에게 한 승이 남전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가지고 있던 낫을 들어 말하고 그 낫을 삼십문전(三십文錢)이라 하였다. 여기서 그 낫은 남전이 삼십문전에 산 것을 알 수 있고 여기서 자연 금전을 소유한 것도 알 수 있다. 자활하면 기구가 필요한데 그것을 사자면 금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작무에 관계된 선문답에는 도끼, 괭이, 가래, 톱 같은 기구의 이름이 자주 보인다. 이것도 물론 금전이 필요했을 것이다.

백장이 청규에서, “보청의 법을 행할 때는 상하가 모두 똑 같이 힘을 낸다.” 한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느 날 백장은 작무를 하면서 젊은 수행승과 함께 솔선해서 일했다. 제자들을 스승의 노고를 생각하여 슬그머니 도구를 숨겨 두고 일을 쉬시라고 청했다. 그때에 백장은, “나는 덕이 없다. 어찌 다른 사람을 힘들이게 하랴. 도구를 찾지 못하면 먹지 않을 것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하였다 한다.

여기서 보면 만약 이 원리를 깨트리면 선원은 무너진다고 틀림없이 생각하였을 것이 자신이 굶어 죽더라도 보청의 원리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을 백장은 노동으로 생산을 도모하였지만 그 생산은 살기 위하여 물건을 얻기 위한 것이기는 하였어도 그밖에 또 하나는 선원의 독립을 위하여 스승도 제자도 선원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할 공동책임을 진다는 점이다. 백장은 이 점을 생각하여 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먹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경계하였다.

이 점에서 보면 백장이 말한 하루 짓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말은 다만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고 하는 먹고 안 먹고 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3. 禪 노동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길

선원에서 말하는 작무의 뜻은 현대사회에서는 시대에 상응하여 해석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 중에서 선원의 독립이라고 한 것을 일종일파의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본질적으로 생각할 것이 있다. 오늘날 물질적으로 자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지만 지켜져야 할 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굶어 죽는다는 백장의 정신이야말로 선원의 참된 독립을 위하여 되살려야 되지 않겠는가 돌이켜 볼 때, 선종은 사뭇 다른 선종이 되었을 것이다. 독립이라는 것은 어느 단체에서나 생활할 수 있지만 경제적 독립만으로는 독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백장은 선원의 지도자로서 힘을 합하여 일하는 일에 스스로 아사(餓死)를 걸고 있다. 이 아사를 내어 걸고 서로 협동하여 살아가는 곳에 공동체로써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