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금어 金魚 그는 환쟁이인가(上)

2009-05-08     김만근

부처님의 탱화(幀畵)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금어(金魚)라 한다. 금어에게는 불심을 기반으로 하는 신심이 있어야 하며 불심을 떠난 세속과의 경제적인 타협, 쉽게 말해서 탱화를 그려주고 사전에 얼마의 돈을 받는다는 경제적인 이득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금어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금어의 일반적인 자격(?)이라 한다면 우선 독실한 불교신자이어야 하며, 전통적인 불교의식을 아는 사람, 그리고 가난을 극복하며 오직 부처님을 형상화시키는 이 일에만 전냠할 수 있는, 인내력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1 고려불화는 일본불화인가

요즘와서 일부 스님들이나 일반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탱화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운 점이 많다.

웬만한 화첩을 들추면 고려시대의 탱화들이 대부분 일본의 유수한 사찰에 소장돼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두 차례에 걸친 왜란으로 인해 일본인들이 사찰을 습격하여 탈취한 것과 일제 36년간 일본인들에 의해 반출된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일정때, 국권은 조선 총독부에 좌우되게 돼 있었다. 일본의 승려들이 총독부에 대하여 불교 보호운동을 전개했는데, 한칠 합방 이듬해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발표했고, 이 사찰령에 의해 전국에 31개 본산이 지정되었다.

이 사찰령은 7개 조항으로 돼 있었는데, 이 조항 5조에 의하면, ‘사찰에 속하는 토지, 산림, 건물, 불상, 석물(石物), 고문서, 고서화, 기타 귀중품은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처분하지 못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일인들은 한국 불교 재산, 그 가운데의 불상 및 탱화 등도 관리하는 막강한 실력을 발휘했다.

필자가 이번 경주 불국사의 말사 순금사(舜琴寺)의 요청으로 지장보살상을 제작하면서 느낀 것은, 일반 국민은 물론 일부 스님들의 우리 탱화에 대한 인식이 잘못돼 있다는 것이었다.

그 스님들은 한결같이 필자가 제작하는 탱화에 대해 일본 것과 똑같다면서 고개를 돌린다.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왜냐하면 앞서도 이야기했듯 우리의 탱화 약 80%가 일본에 가 있기 때문에 그 탱화를 일본탱화로서 접할 기회(자료에 의해)가 많았을 것이고 자연 그 탱화와 똑 같은 기업의 것은 일본 탱화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일본에 불교를 전래한 것은 백제였다. 서기 554년 백제 27대 위덕왕(威德王) 1년에 고승 담혜 등 아홉 분의 스님이 일본에 건너갔다.

이들은 일본으로 먼저 건너가 전도하고 일단 백제승 도심을 비롯한 일곱 명의 승려와 교대했다. 그 뒤 24년이 지난 서기 577년에 백제에서는 다시 많은 승려, 수행자, 불교관계 기술공들, 그리고 학자들을 일본으로 보냈으며 또 6년 뒤에는 고승 일라(日羅)가 일본으로 건너가고 다음에 미륵성상과 불상을 보냈다.

서기 588년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일본으로 보내 불교 전파에 활력소가 되게 했다.

이렇듯 백제는 일본 불교의 종주국이라 할 정도로 일본 불교 발전에 힘썼다.

탱화의 제작과 불교미술의 극치를 이룬 것은 당나라시대라고 할 수 있다. 불상의 저작이 본격화되었고 특히 석가모니불, 미륵불, 아미타불, 노사나불 같은 부처님의 상이 점차 시대가 바뀌면서 보살상과 나한상이 많아지게 되었다.

당시 밀교(密敎)의 전래와 함께 만다라가 전해졌다. 만다라는 부처님이 증험한 것을 그림으로 나타내어 숭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서 금강계, 태장계의 구별이 있다.

인도에서는 이것을 흙담에다 그려놓았으므로 매번 새로 만들어야 했지만 중국에서는 종이나 천 같은 데 그리게 되어 관리와 보존이 수월해서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존상이라든가 손의 움직임이라든가 각종 표시나 기물 같은 데까지 유연하고 탄력 있는 선의 처리가 절묘하고 선명한 밀교 미술의 최고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불교미술을 통해 인간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탱화의 기법은 당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특히 고려는 불교국가로서 국가의 모든 행사는, 연등회, 팔관회 등 불교가 근간이었다. 또 외침을 막기 위해 불교의 힘을 빌어 팔만대장경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때에 정부기구에 화원이라는 관청을 두어 탱화제작을 하게 했다. 화원에는 금어들을 두었는데 금어들을 교육시켜 각 사찰에 보내 탱화를 제작하게 했다.

2 겨우 이어가는 金魚의 맥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신라.고려.조선의 세 왕조 가운데 불교가 가장 빛을 잃은 시기가 조선왕조이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일찍이 불교에 귀의한 불교신자였다. 그러므로 국권을 잡은 후에도 호불정책을 썼다. 더욱이 조선의 창업 동기도 불교와 유관하여 더욱 호불정책을 쓰려고 했다. 이태조는 그가 왕이 된 것이 불력의 덕이라고 생각했고, 불교를 옳게 믿어야 국태민안과 국력이 영구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태조는 여덟 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여섯 왕자는 한씨 소생이고 밑의 둘은 강씨 소생이었다. 태조는 여덟째 왕자를 세자로 책봉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다섯째 왕자 방원이 강씨 소생인 방번과 방석을 죽였다. 이태조는 이에 싫증을 느껴 왕위를 둘째 왕자인 방과에게 양위하고 함흥으로 갔다.

방원은 정종 2년에 왕에게 압력을 가해 왕위를 이어 받았다. 그가 곧 태종이다. 태종은 상왕이 불교를 옹위한 것과는 달리 탄압했다.

궁중불사를 폐지했고, 사찰소유의 토지를 몰수했다. 따라서 화원이라는 탱화요원 양성소도 없어졌다.

그래서 남아 있는 사찰에서 금어의 후계자를 길러냈을 뿐이다.

시대가 지나자 많은 사건들, 임진왜란 등의 외란으로 인해 사찰이 불타고 탱화가 손실되자 모자라는 사찰의 탱화를 보충하기 위해 소위 그림 솜씨깨나 있는 자들을 모아 각 사찰에서 요구하던 탱화를 제작하게 했다. 그래서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금어들의 계보를 알 수가 없다.

문헌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근세에 들어 와서 김 보응과 문 고산, 이 만종, 석초, 김 일섭을 꼽을 수 있으며 최근까지 생존해 있는 송 복동이 맥을 잇고 있을 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