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甕器) 어머니같은 푸근함

우리얼 우리문화

2009-05-07     관리자

▲ <사진 1> 어느 집 뒷뜰의 장독대
 옛부터 우리의 어머니들이 생활 속에서 가장 가까이 했고 소중히 다루었던 생활용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옹기였을 것이다.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쉽게 버려지고 잊혀지는 물건은 무엇일까?

 그것도 역시 옹기일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긴 겨울을 나기 위해서 가을부터 저장식품을 마련해야 했고, 그 식품을 저장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그릇들이 필요하였으며 이러한 요구에 의해 옹기는 우리의 생활 곁에 언제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주위환경이 급속도로 바뀌면서 아파트식 생활을 하게 되자 그 전에는 그렇게도 많이 소용되었던 옹기들은 이삿짐에 끼지도 못한 채 천덕꾸러기가 되어 주인 떠난 빈집에 쓸쓸히 버려지게 되었다. 세계의 생활용기 중에서 옹기처럼 다양하고 옹기처럼 큰 그릇은 찾을 수 없건만 이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모습을 볼 때 이것도 인연의 법칙인가 하여 마음 속에서 울적한 파도가 인다.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함께 부르는 명칭이다. 질그릇은 진흙만으로 초벌구이하여 구운 것으로 잿물유약을 입히지 않아 윤택이 없고 매우 약한데 떡시루나 밥솥 등이 대개 여기에 속한다. 오지그릇은 진흙으로 모양을 만든 다음 햇볕에 말린 후에 잿물유약을 입혀 구운 것으로 윤택이 나며 단단한 도기를 말한다. 오지라는 말은 오자기(烏磁器)의 준말로 원래는 그 표면의 색이 매우 검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른이었으나 조선조 말기에 그 색깔이 불그스름하게 변화하였어도 그 오지라는 명칭은 그대로 사용되었다.

 곧 석기시대의 토기가 발달하여 질그릇이 되었으며 질그릇이 더욱 발달하여 오지그릇이 되었다. 그러나 오지그릇이 생긴 후에도 질그릇은 공기소통이 잘 되는 특성 때문에 꾸준히 생산되어 왔다. 물론 이 오지그릇을 만들기까지의 모든 과정과 기술이 축적되어 그 뒤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만드는 밑바탕이 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청자나 백자를 생활용기로 흔하게 쓸 수는 없었으므로 사대부의 밥상 위에 놓였던 작은 옹기그릇들은 그 지위를 잃었다고 하더라도 대다수 서민들의 밥상과 생활용기로는 그 가치가 퇴색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저장용 용기로서는 어느 집안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옹기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장독대와 부엌에 놓여 있는 옹기들은 그 용도가 다양한 만큼 그 이름도 가지가지였다.

 큰 독 · 항아리 · 중두리 · 소래기 · 자배기 · 옹배기 · 푼주 · 식소라 · 귀때동이 · 동방구리 ·뱃두리  · 단지 · 소줏고리 · 바탱이 · 귀대야 · 양념단지 ·숫갈통 · 뚝배기 · 떡살 · 장군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이러한 살림용 용기만이 아니다. 필통 · 연적 · 벼루 · 문진 · 등잔 · 촛대 · 재털이 · 담배통 등의 실내용 물건들과 토수 · 잡상 · 굴뚝 · 태항아리 ·고드렛돌 ·저울추 · 향로 촛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전통적인 살림집 안팍은 모두 옹기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무리한 말은 아닌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식품을 저장하는 용기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는데 어느 집안에서나 장독대는 가장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고 앉아 거기에 저장된 된장 · 간장 · 고추장 등의 식품을 잘 발효시키어 맛을 제대로 내게 하는 신성스러운 곳이었다. 음식맛은 그 집안에서 빚은 장맛이 좌우하는 것이므로 된장이나 고추장을 담은 오기그릇이 단순한 그릇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신성한 그릇이었으며 또한 그 그릇에 신성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어떠한 무늬를 새겨 넣었다. 조선시대의 옹기에도 대개 이러한 무늬가 들어가 있는데 이제 그 무늬를 고찰해 보자.

 인류의 조상들이 불의 사용방법을 알게 되고 그 불로 음식물을 끓여 먹게 되자 부패한 음식을 먹으며 겪었던 고통은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불과 함께 음식물을 끓일 수 있는 솥도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고대국가에서 세 발 달린 솥(鼎)은 지배자의 지위와 국가의 위신을 상징하고 있었고 또한 지배자만이 이 솥을 사용하여 희생물을 삶아 하늘에 제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는 뒤에 가마솥을 매우 신성시하는 믿음으로 발전되엇고 여러 가지 부적에도 가마무늬가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 <사진 2> 연가라고 부르는 굴뚝의 뚜껑

 가마무늬는 소용돌이무늬라고도 하는데 물이 끓을 때 일어나는 소용돌이에서 그 무늬를 따서 옛사람들은 이를 O 로 표시하고 이를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합한 이상적인 조화의 상징으로 생각하엿다. 이 가마무늬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는 삼원동심원(三圓同心圓)으로 정형화되었는데 무늬로 표시하면 바로 O 이다.

 <사진 1>은 어느 집 뒷뜰의 장독대이다. 맨 뒷줄에 서 있는 세 개의 큰 독을 자세히 살펴 보면 윗부분에 3개의 둥근 선이 돋을 무늬로 나타나 잇다. 바로 가마무늬가 변한 삼원동심원을 나타낸 것이다. 중간 줄에 있는 장독에 흰 종이를 여자의 버선모양으로 오려 꺼꾸로 붙여 놓은 것은 상서로움의 상징이며 소나무와 고추를 새끼줄에 꿰어 매달아 놓은것도 또한 삿된 기운을 막고자 하는 금줄이다.

 이 장독대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 나이가 오래된 독들은 대개 그 독의 안 쪽에 작은 삼원동심원의 무늬를 촘촘히 넣어 놓았는데 요즈음에 만든 독에는 이러한 무늬가 없어서 옛 것과 새 것을 분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허기야 요즈음의 독들은 광명단과 망간을 섞어서 쓰기 때문에 그 색깔이 매우 검고 번쩍번쩍한다. 광명단에는 납 성분이 있어서 그것이 건강에 유해하다고 하여 한동안 시끄럽기도 하였는데 옹기장이들이 광명단을 쓰는 것은 낮은 온도에서 잿물을 녹여 연료비를 줄이기 위해서이고 망간을 넣는 것은 검은 색을 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이 새로 만든 옹기들이 옛날 옹기처럼 숨을 쉬지 못한다고 하여 골동품 가게에서 비싼 값을 주고 다른 사람이 쓰던 잿물 옹기를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면 공해가 심해진 세상에서는 자연적인 제조방법에 의해 만들어진 옹기가 건강에는 더 좋으리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사진 2>는 연가(煙家)라고 부르는 굴뚝의 뚜껑이다. 대개 전라도 지역에서 쓰여지던 이 연가는 옹기로 된 굴뚝 몸체의 맨 위에 얹혀지는 것인데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 빗물이 굴뚝을 통해서 구들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또 심하게 바람이 불때도 연기가 아궁이로 되나오는 것을 막고자 고안된 것이다.

 윗쪽은 삼단으로 턱을 지게 하면서 원추형으로 만들었고 아랫쪽에는 3면에 사과모양으로 세 개의 구멍을 널직하게 뚫어 놓아 통풍이 잘 되게 하였다. 이 연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해지는 석양 무렵 초가마을에 퍼지는 아스름한 연기 냄새를 금방이라도 맡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 <사진 3> 물동이

 <사진 3>은 우리가 어렸을 때 시골의 우물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었던 물동이이다. 이 물동이의 안쪽에도 역시 삼원동심원이 빽빽하게 찍혀 있는데 이는 물이 깨끗하지 못하면 만병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그를 방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정면에는 난ㅇ초인지 대나무인지 가늠할 수 없는 식물이 옹기장이의 거칠 것 없는 손가락으로 그려졌는데 그것은 민화에서 보여주었던 솜씨, 바로 그 마음이다.

 어느 집에나 아직도 물려받은 옛날 옹기가 몇 점씩은 있을 것이다. 차근히 살펴보며 웃어른들의 정성과 아낌을 망각 속에서 되찾아 보자.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