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인욕바라밀

이남덕 칼럼

2009-05-03     관리자

 눈이 내린다. 이제 대한도 지났으니 봄눈(春雪)이라 하겠지만, 겨울눈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눈이 소담지게도 내린다. 그래 많이 많이 내려라. 저 중동의 야만스러운 전쟁 때문에 온 세계 사람들의 가슴은 지금 기름가마처럼 부글 부글 타오르고 있지 않느냐. 눈아, 많이 많이 내려서 이 세상 모든 불길을 다 덮어다오. 참 인간이란 이것밖에 안되는 거냐?

 아침부터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면서 차츰 내마음은 가라앉는다. 어제 성도절(成道節)날 창문 앞에 상을 놓고 나는 난생 처음으로 사경(寫経)을 시작했다. 붓글씨라고 써본 것은 아마 국민학교(그때는 보통학교)때 습자시간 이후 별로 붓을 든 기억이 없다. 이제는 때가 온 것이다. 60년만에 쓰는 붓글씨. 글씨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러나 그저 무작정 쓸 뿐이다. 조석으로 독송하고 있는 금강경(金剛經)을 맨 처음에 쓰기로 했다.

 이게 내 본 모습이다. 그동안 한평생을 무엇이 바쁜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마음의 여유를 가져볼  수도 없었다. 일이 정말 많아서 바쁜 것인지 아니면 공연히 마음만 바빴던 것인지 알수가 없다. 70고개 넘어서야 "아니지, 이게 아니지, 차근차근 착실히 걸어가야지." 혼자 중얼중얼.

 이제야 겨우 전후 좌우를 살피면서 한 가지씩 고치게 된 것이다. 참 철나기도 더딘 딱한 위인이다. 사경을 시작하게 된 것도 이런 심경의 연장이리라.

 나는 제 14분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을 쓰다가 붓을 멈추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須菩提야 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無人相無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應生瞋恨 須菩提 又念 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無人相無衆生相  (수보리야, 인욕바라밀도 여래가 인욕바리밀이 아님을 말함이라. 어찌한 까닭이랴? 수보리야, 내가 옛적에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끊김을 당하였을 적에 내가 저때에 아상이 없었으며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이 없었으며 수자상도 없었더니라. 왜냐하면 내가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를 찢기고 끊길 그 때에 만약 나에게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있었던들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으리라.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 오백세 동안 인욕선인이 되었을 때를 생각하니 저 세상에서도 아상이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대승보살의 실천덕목인 육바라밀(六波羅蜜)중에서 대사회적인 덕목은 보시(布施)와 인욕(忍辱)이다. 보시는 우리 인간의 탐심을 제거하는 행이고 인욕은 성내는 마음 진심(瞋心)을 없애는 덕목이라 생각된다.

 이 두 덕목 중에서 인욕바라밀의 실천이 더 어려운 까닭은 대립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한쪽이 평심(平心)을 가지려 해도 상대방의 행동에서 감정의 폭발을 일으키기 쉽기 때문이다. 누가 자기 비위를 거스려주지 않는다면 공연히 성낼 사람이 없을 것이며 모두 성인이 될 것이다.

 성내는 사람의 심정은 항상 "상대방 때문에" 자기가 성내게 된 것이라고 남의 탓을 하게 마련이다. 자기가 정당하고 상대방이 나쁘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더구나 상대방의 힘이 나보다 강할 때는 자기는 부당하게 핍박당하는 억울함과 원망을 갖게 된다.

 그런데 여기 부처님의 전생담은 극악 무도한 왕(가리왕)이 산중에서 인욕행을 닦는 신선에게 진짜로 부당한 학대를 가했는데도 성내지 않은 이야기다. 왕은 산중으로 사냥을 나왔다가 식후에 곤히 잠든 사이, 옆에 항상 시중들던 궁녀들이 왕이 잠든 것을 보고 무료하여 물 따라 인욕선인 있는 곳까지 이르게 된다. 잠이 깬 왕은 시녀들이 없는 것에 화를 내어 찾아나섰다가 궁녀들이 선인 옆에 둘러서서 공경하는 광경을 목도하고 분노하여 부당한 힐책을 한다.

 "너는 어찌하여 함부로 나의 여색을 보는가?"
 "나는 실로 모든 여색을 탐치 않노라."
 "어찌하여 여색에 탐심이 없는가?"
 "나는 계를 가지노라."
 "계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인욕을 닦는 것이니 이것이 계를 가짐이로다."
 이 때에 왕은 칼로 선인의 몸을 베며 "아픈가?" 묻고 "아프지 않다."하니 곧 선인의 몸을 마디마디 자르고 "이래도 진한(瞋恨)이 없겠는가?" 묻는다.

 선인은 그래도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부처님 말씀이다. "내가 오히려 없거니 진한이 어디 있겠는가?"(신소천<金剛経講義>p.145)

 부처님은 곧 이어서 이 선인이 능히 인욕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과거 오백세 동안 사상(四相)이 없이 인욕행을 계속해서 닦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렇다. 우리가 무엇을 참는다는데도 두 가지로 갈라 보아야 한다. "참을 수 없다. 억울하다."는 생각을 속에 품고 억지로 참는 것은 참된 의미의 인욕행이 아니다. 참다가 참다가 곪아 터지는 경우, 그동안에 쌓였던 스트레스의 폭발로 몇 배의 파계가 되는 것을 종종본다.

 참다운 인욕행은 아무 생각없이 저절로 참아지는 그것이다. 말하자면 전생에서부터 인욕행을 쌓아 '타고난 참을성' 이래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없다.

 그런데 타고난 참을성은 그 가운데 가지고 있는 것이 있으니 지혜 즉 반야바라밀이다. 육바라밀의 '바라밀' 이란 '완성'을 의미하며, 보통의 보시(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의 행을 완성시켜 '보시바라밀'이 되려면 반드시 '반야바라밀'이 보시에 첨가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들었다.

 어떤 참을 수 없는 사태를 당했을 때라도 그 사태의 원인과 결과 등 전모를 대번 한눈에 환히 깨닫는 지혜가 없으면 인욕바라밀은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우리 불자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만일 부시와 후세인 두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라도 불교의 인욕바라밀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은 인류역사상 수없이 되풀이 되어 일어났다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마음, 삼독심(탐  ·  진  ·  치)에서 일으킨 것이지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적대감 · 증오심보다 집단적인 그것은 맹목적인 증폭작용을 일으킨다. 전쟁을 결정한 국가지도자들은 그것을 정의의 이름으로 또는 민족주의 · 애국심 등의 이름으로 최대한 증폭시켜 전쟁결정은 피할 수 없었다고 자기 정당화를 일삼으나 실로는 어떤 전쟁이라도 정당한 전쟁이란 한 건도 없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응징'의 명목으로, 그리고 또 한쪽에서는 '알라신(神)의 성전(聖戰)'이라 내세우나 그 마음 밑바닥에는 강자의 오만과 약자의 원한이 쌓이고 쌓인 숙적(宿敵) 감정의 폭발인 것이다. 그들이 신봉하는 절대유일신이 진정 진리의 신이라면 전쟁을 정당하다고 인정하겠는가.

 유전(油田)과 원자로(原子爐)와 무서운 화력을 가진 최신무기들이 불타고 뿜어대는 검은 연기와 독소로하여 지금 지구는 환경파괴로 최대의 위기를 치루고 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이 막대한 피해는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만이 받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 전체에 파급되는 것인데 누가 그들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생살여탈(生殺與奪)의 권리를 주었다는 말인가?

 아, 이런 참담한 날을 염려하여 성인들은 이 땅에 출현하여 예수는"네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네 왼편 뺨도 내놓아라. 원수를 사랑해라."했고, 부처님은 "네 몸이 베임을 당하여 마디마디 잘리더라도 진한심을 품지 말고 인욕행을 닦아라." 가르치셨던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어라."라는 말이 있다. 지금 전쟁에서 소모되는 몇백억불의 비용의 일이라도 원한을 가진 자들에게 베풀어 주었더라면 증오심과 원한은 봄눈 녹듯이 스러졌을 것을!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지혜와 자비심이지 너와 나의 정당성만을 고집하는 분별심은 아니다. 인욕바라밀은 지혜와 자비의 근본 없이는 성취되지 않는 것이다.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