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소년 여초(如初) 선생님

수희찬탄

2007-03-28     관리자

팽이를 돌리고 있는 소년의 손등은 터서 갈라지고 볼은 바아갛게 얼었건만, 해 지는 것도 배 고픈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돌리고 있다.
어두워졌는데, 멈출 줄 모르는 빙판의 소년. 보는 이가 눈물겨워지는 그 열중! 여초(如初) 선생님의 그림이다.
『금강경』 열두 폭 병풍을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쉬지 않고 쓰시고나서(書風 筆意의 미세한 흐름의 차이 탓으로 나눠서 쓰지 못하시고) 허리병으로 고생하시고, 몇 년 전부터는 오른손, 팔이 아프셔서 힘들어 하시던 일. 이런 일 저런 일 쌓이며 건강이 악화된 것을 보고만 있었던 것 같아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프다.
백담사(百潭寺) 계곡, 이끼가 물에 젖어 미끌미끌한 바위를 건너 뛰며 센 물살에 발을 적셔야만 갈 수 있는 영시암(永矢庵)은 선생님이 복원하신 절이다. 말년에는 그 곳에 가시겠다고도 하셨는데….
월간 불광의 제자(題字)를 선생님이 쓰신 탓인지 10여 년 전 내가 불광에 ‘불국토순례기 베트남편’을 연재할 때 아주 흥미로워하시면서 빠짐없이 달마다 읽어주시고 평(評)도 해 주셨다. 그 무렵 선생님은 동방예술대학 설립 문제 등 어려운 일들이 가로놓여 있어 정신적으로 몹시 힘든 때였다. 일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을 위로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억양을 넣어 읊으시면서, 마치 그 여덟 자가 어느 문이든 열어주는 만능열쇠인 양 조용히 웃으셨다.
서(書)의 세계와 선(禪)의 세계의 종극의 일치를 강조하시기에 선록(禪錄)을 닥치는 대로 읽다보니, 어렴풋이나마 알듯 말듯 된 것도 캐보면 다 선생님 덕이다.
선생님은 굳이 불연(佛緣)을 말씀하시지는 않으셨고, 또 신심(信心)의 깊고 얕음 따위를 떠나 그저 일상 속에 언제나 불교의 향기가 용해되어 있는 분이셨다.
그러나 서예에 관한 한 머리가락 굵기만한 어긋난 차이도 ‘하늘과 땅의 차’로 지적하시는 모습은 마치 ‘심포니’의 대규모 악기의 연주 속에서 불협화음을 찾아내는 ‘모짜르트’를 방불케 하였다.
그리고 성품도 서예 외의 일엔 철없는 어린애 같고 서툴기가 이를 데 없어 제자들간에 늘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고 계셨다.
비범(非凡)과 범(凡)의 거리(距離). 그 거리가 예사로 큰 것이 아니었기에 늘 고독했고, 선생님을 대하는 사람도 좁혀지지 않는 그 간격에 종내는 고독해지고마는 이상한 분위기. 어쩌면 선생님도 당(唐) 시인(詩人) 이백(李白)처럼 적선인(謫仙人)이어서 원래 천상의 선인(仙人)이었는데, 뭔가 죄가 있어 이 지상에 오셨다가 하늘이 정한 기한이 되어 도로 가신 것이 아닐까.
피부 밑 모세혈관에 등불이 켜진 듯 늘 상기(上氣)된 얼굴에 속아 선생님이 조만간 건강회복하시리라 믿은 어리석음, 이제 와서 말한들 후회만 남으니….
멈출 줄 모르고 열중하던 소년 같은 우리 선생님, 모두의 기억에 그 모습으로 머물러 주십시오. 병 따위 때문에 가신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이젠 오라고 하여 가신다고, 제가 대변하겠습니다. 오는 3월 21일 선생님 49재를 충정사 도윤(道允) 스님께서 올리시겠다니, 그때 가서 뵙겠습니다. 참 선생님이 동방예술대학 과목에 사경과(寫經科)를 꼭 넣겠다고 계획하신 것, 스님 제자(弟子)들 아시는지요. 혹 모르시면 지난 일이지만 알려드립니다. 사경과 창설이 제일 큰 계획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