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中間)은 기회주의인가?

권두수상

2009-04-27     관리자

 작년에 상영된 '로메로'라는 영화가 인상깊게 남아 있다. 중남미 국가인 살바도르의 폭압적인 군정과 이에 저항하는 해방신학 사이에서 고민하고 행동하다 끝내는 암살되는 로메로 대주교의 실화(實話)를 그린 영화다.

 사회현실에 무관심하던 로메로는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대주교로 임명되면서 어쩔수 없이 현실문제에 빠져 들게 된다. 불법적인 체포와 구금, 고문,  살해, 선거조작 등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군사정권(軍事政權), 여기에 게릴라전으로 저항하는 민중과 총을 들고 민중의 선봉에 선 신부들ㅡ로메로 대주교는 그 사이에 놓이게 된다.

 정권과 반정권 사이에서 행동을 강요 당한다. 처음 그는 대통령과 정부 고위관리들을 찾아가 폭압정치를 그만 두도록 설득한다. 해방신학을 신봉하는 신부들을 간곡히 타이르기도 한다.

 한 장관이 게릴라에 납치 당하자 게릴라전에 앞장선 신부들을 찾아가 내 놓으라 요구하지만 거절 당한다.

 총을 든 신부와 나누는 다음과 같은 짧은 격론이 매우 인상적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의 힘을 믿는 신부다. 그러한 신부가 총을 들 수 있는가?"

 "예수도 투쟁의 일부다. 총을 든것은 동족을 지키기 위한 방어일 뿐이다."

 "총은 방어가 아니라 공격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과(정권) 똑같이 하나님을 잃을 것이다."

 정부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외친다.

 "불법 체포와 고문과 살해를 중지하라. 군인들은 동족을 살해하라는 부당한 명령에 복종하지 말라."

 이를테면 충돌하는 두 세력 사이에서 중간입장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두 집단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양측으로부터 모두 배척 당한다. 마침내 어느 날 새벽 미사를 집전하다 정부가 보낸 암살범의 흉탄을 맞고 비참하게 쓰러진다.

 어느 공기업의 고급간부인 A씨ㅡ그가 근무하는 회사에 대규모 노사분규가 일어났다. 새로 선임된 사장의 취임여부가 분규의 원인이자 쟁점이었다.

 노조는 새 사장의 선임과정이 비민주적이라는 주장이고 사장측은 반대로, 선임과정이 합법적일 뿐 아니라 이를 왈가왈부 하는 것은 경영권 인사권 침해라는 반론이었다.

 새 사장은 취임을 강행하려 했고 노조는 이를 몸으로 막으려 했다. 공권력이 동원되고 많은 사원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사원들은 즉각 파업에 들어갔다. 간부들은 마라톤 회의 끝에 사태해결을 위해 중간역할을 하기로 하고 A씨를 대표로 선정했다. A씨는 사후의 결과가 뻔하기 때문에 괴로웠지만 어쩔수 없이 그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양쪽을 찾아 다니며 한발씩 양보하라고 설득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설득은 실패로 돌아갔고 한 차례 검거선풍 끝에 노조의 완패로 결말이 났다.

 사태가 끝났을 때 A씨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양측으로부터 오해와 비난의 십자포화를 맞은 것이다.

 사측은 A씨가 노조에 동조한다고, 노측은 사측을 대변한다고 비난했다. 또 사와 노 사이에서 이중플레이를 하는 기회주의자라는 비난도 쏟아졌다.

 소요가 가라 앉았을 때 A씨가 설 땅은 없었다. A씨는 이 기업에서 '로메로'가 되어 있었다.

 우리사회는 유난히 '로메로'를 거부한다. 중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고 매도한다. 두 개의 대립하는 세력이 있다면 중간에서 말리는 존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말리는 사람을 허용하지 않는가?

 아무래도 그 직접적인 뿌리는 민족분단이라는 역사성에서 찾아야 할 것같다.

 해방 후 좌우대립, 그 뒤 민족이 남북으로 두 동강이가 나자 이 땅에사는 자는 누구나 한 쪽에 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6.25 전란을 겪으면서 이 이분법(二分法)은 더 구체화 되고 현실화 되었다. 내 편이 아닌자는 철저히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분법적(二分法的)사고, 흑백논리는 젊은 세대에서 더욱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교육제도 때문인지 모른다.

 수십년을 ㅇ× 문제 풀이로 길들어져 온 우리의 젊은 세대. 그들은 무수한 시험에서 맞지 않으면 틀리다고 대답해야 했고 4개의 답 중에서 한 개만의 답을 골라야 했다. 맞지 않으면 틀린다는 단순사유 체계를 체질화한 신세대는 기성사회, 기존질서를 무조건 매도하며 기성세대는 사라져야 할 대상이라고 극언한다. 점차 개선하자는 주장을 개량주의라고 몰아 세운다. 개량주의자는 적보다 더 미워한다. 개혁이냐 보수냐의 택일이지 점진주의는 허용되지 않는다. 무엇이든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인생사가 어디 그렇게 분명한 게 있으며 모든 사물이 이것 아니면 저것일 수 있는가? 백원짜리 동전은 위 아래에서 보면 모두 둥근 모습에 한면은 100이라는 수자 표시, 다른 한 면은 수염난 영감이 그려져 있다. 옆에서 보면 길고 얇은 직사각형이다. 위 아래에서만 보고 동전의 모습을 고집할 수는 없다.

 사물을 종합적으로 보는 태도가 중용(中庸)이요 중도(中道)요 원사상(圓思想)이요 상생상화(相生相和)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걸프전쟁이 터졌다. 미국을 주축으로 한 다국적군과 이라크가 필사의 싸움을 시작했다. 미국은 쿠웨이트를 강점한 이라크를 침략자라 규탄하고 응징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이라크는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비난하며 아랍민중을 수탈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절대적으로 정당하고 선량하며 이라크는 무조건 부당하고 악한가? 둘 다 옳은 주장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다.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면 전쟁은 나쁘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어느 한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 많은 신세를 졌고 지금도 이해관계를 같이 하기 때문에 미국편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전비(戰費)를 부담하고 의료진을 파견하고 있다.

 불가피한 선택이기는 하지만 그렇다해도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정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고 보면 세계나 국가나 조직이거나 간에 갈등구조에서 중간을 지키기는 불가능에 가까운지 모르겠다.

 그래도 '중간(中間)'은 지향할 만한 가치의 하나이며 필요한 역할이며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중용을 위해, 자비를 위해 상생상화(相生相和)를 위해,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