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삼처럼 살지로다

나의 믿음 나의 다짐

2009-04-27     관리자

   저는 어느 법회에서 동국대학에 계신 정병조 교수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주제는 인삼과 산삼에 관한 법문이었습니다. 삼은 똑같은 삼인데 산삼은 손가락같이 아주 작은 것도 부르는 것이 값인데 인삼은 굵고 잘 생긴 것도 작은 산삼과는 비교도 안되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산삼은 추운 겨울, 뜨거운 여름, 목이 타는 가뭄, 무서운 폭풍, 지루한 장마 이 모든 고난을 혼자 참고 견디었기에 강하고 인삼은 겨울엔 덮어주고 여름엔 햇볕을 가려주고 가뭄엔 물을 주고 메마란 땅엔 거름을 주고 이렇게 사람의 보호와 정성으로 자랐기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삼과 같이 모든 시련을 겪고 살아 온 사람은 배가 고파 보았으니 음식의 소중함과 배고픈 사람의 고통도 알 것이고 추위에 떨어 보았으니 추위에 떠는 어려운 이웃의 사정도 알 것이고 의복의 소중함과 고마움도 알 것이며 혼자 외롭게 살았으니 부모님의 소중함도 알 것이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줄거움도 알 것입니다.
   하지만 호화스러너 주택에서 취위와 더위의 고통을 모르고 온실의 화초처럼 키운 자식은 큰 인물이 못됩니다. 자식은 산삼처럼 억세게 키워야 합니다. 애처롭고 안스러워도 먼 장래를 바라보며 속으로 사랑하며 억세게 키워야 합니다. 스스로 참고 견디는 인내심을 길러 주는 것이 산교육이요, 큰 인물을 키워내는 지름길입니다.
   이것이 정병조 교수님의 법문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법문을 듣고 무언가 가슴을 탁 때리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울었습니다. 자식을 낳아 키워 짝을 지우고 오십고개를 넘어서도 여지껏 깨닫지 못한 것이 생각할수록 한없이 부끄어웠습니다.
   깊이 생각할수록 차곡차곡 쌓였던 제 가슴의 한을 눈물로 씻어내듯 한없이 울었습니다. 왜냐구요? 저의 시모님은 어찌나 성품이 냉정 하신지 눈물 마를 새 없이 시집살이를 했습니다. 언젠가는 남편이 어찌나 술을 즐겨하는지 월급봉투를 술값으로 다 제하고 시모님께 갚을 돈도 모자라게 가지고 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은 인정사정 없이 남의 돈을 봉투째 몽땅 가지고 가셨습니다. 아드님 모르게 쌀 한 말 값이라도 주고 가실 줄 알았는데, 그 땐 나이도 어렸고 부끄러워 꿀 줄도 모르고 외상도 할 줄 모르고 며칠을 굶었습니다.
   어미가 굶으니 어린 것이 젖이 안나온다 보채고… 그 때의 서러움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남편의 잘못은 생각 않고 어머님의 모질은 성품이 너무도 야속해서 악착같이 살아서 꼭 복수하리라고 다짐하고 다짐했었습니다. 제가 복이 없어서인지 술을 즐기던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린애들하고 사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인데 큰댁이 잘 살면서 도와주기는 커녕 냉대는 더욱 심했습니다.
   없는 자식이 더 불쌍하다는데 안스러운 것은 고사하고 며느리 차별 손주들까지 차별하시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서러움이었습니다.
   저는 서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가슴에 칼날을 세웠습니다. 서러움이 한이 되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칼날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큰댁에 궁한 꼴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내 아이들 큰댁 아이들 못지 않게 키우려고 노력했습니다.
   항상 두고보자는 마음을 다지며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정 교수님의 법문을 듣고 제 가슴에 쌓였던 한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를갈며 세웠던 칼날도 끊이었습니다. 시모님의 매몰찼던 것은 저를 이 어려운 세상에 바르게 살 수 있도록 밀어 주신 채찍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혼자되어 옆눈 살필겨를도 없이 오직 한을 품고 오기로 버티고 살았으니까요.
   '관세음보살 우리 시모님은 나의 관세음보살이셨어' 남편 잘못만나 고생하는 것 안스럽다, 혼자 사는 것 애처롭다고 도와 주시고 어루만져 주셨으면 내가 그렇게까지 이를갈며 악착같이 살았을가. 생각하니 제가 칼날을 세우며 울고 있을 때 어머님도 함께 우셨으리라.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아마 제 마음보다 더욱 아팠는지 모릅니다.
   지금 이렇게 부끄럼없이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제가 잘나고 똑똑 해서가 아니고 어머님의 채찍이 밀어주는 덕임을 깨달았습니다. 쌓이고 쌓인 울분을 끊고, 참회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또 부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며칠 뒤 큰댁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시모님께서 위중하시다는 전화였습니다. 살기 바쁘다고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을 뉘우치며 급히 달려갔습니다.
   85세라도 건강하신 편이셨는데 저는 시모님을 뵙고 너무도 큰 허망함을 느꼈습니다. 그렇게도 깔끔하시던 분이 그렇게 당당하시던 분이, 옛 모습은 하나도 없고 무감한 육신은 아랫도리를 다 벗겨도 모르고 계셨습니다. 저는 저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허무함에 빠졌습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어머님을 편하게 정성껏 모시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부처님 법은 정말 묘하고도 자비한 것입니다. 한을 품고 있어 돌아가셔도 눈물 한방울 안나올 것 같던 어머님을 내가 이렇게 정성껏 진심으로 모실 수 있다니, 저는 다시 부처님게 감사했습니다.
   여지껏 제가 한을 품고 있었으면 끝까지 불효를 했을텐데 이렇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마지막 효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하며 식구들이 잠자는 조용한 밤이 되면 『금강경』도 읽어드리고 『아미타경』도 읽어 드리고 무거운 업을 다 벗고 가벼히 가시라고 멸업장진언도 열심히 했습니다.
   큰댁은 교회를 다니가 때문에 조용한 틈을 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전혀 무감각한 상태해서 대소변만 보시던 분이 거의 한 달이 되어가던 어느 날 눈을 뜨셨습니다. 방안을 둘러 보시더니 한숨을 쉬고 제 손을 꼭 잡으며 불쌍한 것, 불쌍한 것 하시며 등을 쓸어 주셨습니다. 저는 삼십년 만에 처음 어머니 정을 느끼며 가슴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사실 지 열심히 모시리라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시누이가 제 손을 잡고 "언니 고마워요. 남편도 없는 시어머니인데 바쁘다고 안와도 그만이지 이렇게 병이 나도록 열심히 엄마를 간호할 줄은 몰랐어요."하며 제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형님과 시누이들은 교회에 다니고 작은 동서는 천주교에 저는 법당을…, 이렇게 모두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저는 어머니 씻기고 빨래 하는 궂은 일을 누가 하기 전에 말없이 부지런히 했습니다. 며칠 뒤 어머님은 제 손을 잡고 운명하셨습니다.
   사십구일 동안 열심히 『지장경』을 읽고 저 혼자 불광사에서 우리 형제들대신 우리 법등가족과 함께 사십구제를 모셨습니다. 어머님은 꼭 극락왕생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