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죽과 단풍잎

이남덕칼럼

2009-04-27     관리자


무소유와 친자연
그리고 무공해. 이것이
나의 생활신조로 자리잡게
된 데는 나의 생활 경험에서 나온
지혜랄까…. 그것은 불교의
가르침 그 근본정신과
부합되는 것이기
대문이다.

 뒷산 산책을 10월 초하루부터 다시 시작했다. 일기달력을 보니 초여름 5월중순부터 못다녔으니 넉달반만이다. 산길에 풀이 무성해서 여름동안 아다니게 되는 것도 이유이지만, 워낙 눈코 뜰새없이 주변의 잡초와 씨름하기 바빠서 산에 올라갈 여가가 없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어쨌든 '풀'이 내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던 여름은 가버렸다. 여름의 농촌생활이란 눈만 뜨면 잡초와의 대결이라는 것도 알게 된 셈이다.
   지난해에서는 '잡초 무성한 호박밭에서'울상을 지었었지만, 금년 호박농사는 공들여 잡초를 다스린 덕으로 찾아온 손님들에게 애호박 선물을 제법 할 수 있었고 그러고도 누런 익은 호박 열덩이는 딸 수 있었다. 여름내 호박나물·호박전·호박밀정병·호박된장찌개를 실컷 먹은 것은 물론이고, 요즘은 심심하면 호박죽을 끓이는데 내손으로 가꾼 콩과 팥 그리고 고구마까지 넣으니 맛이 구수한 것은 둘째치고 마음이 우선 흐뭇하다. 이게 바로 농사짓는 재미라는 것도 배우게 된다.

 호박죽을 먹으면서 6·25전쟁 때 호박시래기 죽으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 생각이 절로 난다. 모심기만 끝내놓고 난리가 터졌으니, 반도강산이 온통 전쟁터로 변했는데 누가 논밭을 가꿀수나 있으며, 언제 끝날 전쟁인지도 모르는 나날에 식량부족에 대한 걱정은 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참 그해 여름은 길고도 지겨운 하루하루였다. 내가 살던 정능리는 아직 서울시에 편입이 안된 고양군 숭인면 소속의 개울 물맑은 마을이었다. 그때도 나는 염소와 닭을 키우고 배밭 과수원 둘레에 호박을 가꾸었었다. 서울 사는 친지들이 우리집 호박을 양식으로 나누어 갔던 생각도 난다.

  그때의 호박죽은 지금처럼 달게 익은 호박도 아닌 푸른 호박이었고 알호박보다 호박잎새를 더 많이 넣은 '호박시래기죽'이었다. 게다가 함께 넣은 쌀은 혹간 눈에 뜨일 정도의 멀건 죽이었으니 사실은 '호박시래기 국'에 희끗희끗 밥풀이 보이는 그런 것이었다. 지금의 호박죽은 마치 별식처럼 달고 향기롭다. 부페음식점에서 또는 백화점 별식코너에서 별식으로 내놓고 있다.
   호박죽 하나를 앞에 놓고 이렇게 감회가 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때는 전쟁 때였고 지금은 밥굶는 사람은 없다는 호시절이라고 한다. 흔히 하는 소리로 GNP 몇10불에서 지금은 몇천불되는, 잘사는 우리살림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 때'에 생각이 머물러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아직 학교에 나갈 때 명륜동 우리집 이웃에 한 할머리가 아들식구와 세들어 살고 있었다. 그는 늘 골목안을 황황한 걸음으로 부지런히 드나드는데 내가 인사를 하면 어떤 때는 아는 체를 하고 어떤 때는 모르는 체를 하고, 항상 허둥대는 기색의 노인이었다. 며느리의 설명으로는 전쟁통에 집을 불태우고 조금 실성을 해서, 방안에는 보퉁이 보퉁이 꾸러미를 열개도 스무개도 만들어 놓고 여차직하면 밖으로 도망갈 준비태세로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을 겪은 세대와 겪지 않은 세대와는 확실히 생활경험의 차이때문에 세상살이에 대한 감각·생각·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으로 이해된다. 나도 위의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할머리와 마찬가리의 그런 생활감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모른다. 나는 아니라고 의식면에서는 부인해도 의식의 깊은 심층에는 그런 '비상식'에 대한 불안감각이 완전히 없다고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을 나는 긍정하면서 그것이 병적인 상태로까지 발전되지 않는 한계안에서 내생활을 세워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전쟁을 겪은 경험뿐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몸에 밴 유교적 도덕관·물질관은 내 정신형성에 토대가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여생이 비록 길지 않은 동안이라 하더라도 내가 불자로서의 생활관과 지금까지의 모든 내 경험을 토대로한 생활관과 사이에 어떤 조화를 기도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지금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첫째로 물질생활을 검서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생활일과를 단순하게 하는 것이다. 무소유(無所有)와 친자연(親自然) 그리고 무공해(無公害). 이것이 내 생활신조로 자리잡게 된 데는 내 일생의 생활경험에서 나온 지혜랄까 윤리관과, 불교의 가르침의 근본정신과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돈·내 능력 가지고 내가 잘사는데 누가 무어라 할 것인가 하는 세태에 대해서 나는 심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산업사회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물건들, 그것을 함부로 마구 써제끼는 낭비가 얼마나 우리들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는지, 이대로 나가면 지구는 몸살을 앓다못해 우리가 살 수 없는 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건을 만들기 위해 써야하는 열량(에너지)과 그 때문에 생기는 공기오염과 이상기온현상, 거기서 파생되는 천재지면. 쓰고난 열폐기물읠 처리문제, 쓰레기의 처리문제. 우리가 쓰고 버리는 쓰레기는 마땅히 땅으로 다시 되돌려 주어서 그것이 썩음으로 해서 땅은 기름지게 되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는 땅을 오염시키는 유독성 쓰레기가 더 많게 되었다. 썩어서 땅에 도움이 되는 쓰레기와 그렇지 않고 땅을 독으로 오염시키는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정성조차 없는 한심한 상태다.

  원천적으로 유독성 쓰레기를 그토록 많이 써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 많은 화려한 광고 선전과 포장지의 남용. 순전히 외양을 꾸며서 그럴듯 하게 보이려는 효과와 편리위주의 발상이외의 무슨 실속이 있는 것인가? 파 한 단·과일 한 개 한 개 독소종이 비닐봉지에 싸야만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화학비료로 흙은 나날이 산성화 되는데 거기다가 재배하는 식물조차 농약·제초제 속에서 건져내니 이제는 우리의 먹거리 그 자체가 유독성 식물이 되어가고 있다.

 먹는 음식, 마시는 물과 공기 모두가 오염일로를 치닫고 있는 속에서 무슨 인간의 이상이며 행복의 추구가 의미가 있겠는가 싶다. 우리를 살리고 있는 땅이 황폐하면 그속에 살고 있는 생물들의 삶이 황폐해 질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살아남을 길은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땅의 힘(地氣)을 되살리도록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질의 낭비를 그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겉치레와 편하기 위주의 생각을 버리고 삶의 내용면에 공을 드려서 거기서 기쁨을 찾는 생활관으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산길을 걸어가며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하는 것이 내게는 가장 지복한 시간이다. 한 번 염송에 여섯 발자국씩 아주 리드미컬하다. 내가 좋아하는 코─스를 한 바퀴 도는데 거의 2천송을 하게되니 일만보는 족히 넘는 걸음이다. 도중에 내 나이와 동갑되는 잣나무 숲이 있어 거기서 한 번 쉬고, 또 한 군데 밤나무와 참나무 숲이 있는 계곡에서 눈을 감고 쉬면서 나무들의 숨결을 느낀다. 나날이 단풍물이 들더니 후루룩 낙엽이 한창이다. 단풍잎은 호박죽빛을 닮아서 노랗고 붉으스름한가 보다. 나는 일년중 가장 활홀한 조락(凋落)의 계절에 서있다. 망연자실(茫然自失)이란 이런 때의 느낌일까.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