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재하신 신력으로 살피시고 거두시는 관세음보살이시여

불사의 현장

2009-04-27     관리자

   관세음보살의 자안(慈眼)이 도처에 가득한 남해 보리암(菩提庵), 불사의 현장을 찾아 새벽 찬 공기를 헤치며 멀고도 먼 장정에 올랐다.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국도를 달려 오랜 시간 끝 눈앞에 남해의 잔잔한 모습들이 다가왔다.
   그림처럼 펼처진 남해대교와 남쪽바다의 내음은 육지에서 묻어온 피곤을 깔끔히 씻어주었고 점심시간이 훨신 지난 늦은 오후 지친 여정이었지만 설레임으로 금산(錦山)자락을 올라 가뿐히 보리암을 찾을 수 있었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상주에서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땀을 흘리며 산행을 하여야 했던 것을 보리암 뒷편에 닦아진 길불사의 덕택으로 20여분의 도보 끝에 쉽게 관세음보살님의 품속에 덤벙 안길 수가 있었다.
   앞으로는 확트인 남해바다가 보이고 뒤로는 위용을 갖춘 수많은 바위들이 고고한 소나무를 연상케하듯, 곧곧함으로 보리암을 감싸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 보리암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께서 오셨다전한다. 부처님께서는 관세음보살님께 이곳에 상주하면서 고해중생 제도를 당부하셨고 이런 인연으로 관음도량으로서 보리암이 갖춰졌다는 것이다. 또한 1900여년 전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비인 허태후(許太后)가 인도 월지국에서 가져온 관음보살상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리암에 모셔 관음보살의 위신력으로 나라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게 된 이후부터 관음도량으로 여러 세인에게 알려졌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보리암이 자리하는 금산은 남해의 성산으로 남해 사람들에게 있어 어머니 품속과 같은 곳이고 옜부터 그 자태는 이름이나 있었다.
   비단을 펼쳐놓았다라는 의미의 금산은 보광산(普光山)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제왕의 꿈을 안고 전국 산천에서 기도하다가 이 보광산에서 100일 기도 후 왕업을 성취했다는 기록이 1903년 윤정구가 세운 '금산영응 기적비'에 있듯 태조가 기도 도중 꿈 속에 관음보살이 산신으로 화해서 왕업성취 대가로 이 산을 비단으로 덮으라는 말에 이름을 비단금(錦)자를 써 금산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많은 고승대덕 선각들이 이곳 보리암에서 정진하여 성불하셨고 지금도 많은 기도객들이 관음보살님의 한량없는 신력으로 기도성취를 이루고 있다.
   이런 기도도량의 ㅂ ㅜㄹ사는 많은 대중에게 불모살님의 가피를 입게끔하는 크나큰 원력을 품고 이곳에서 5년째 주지소임을 맡고 계신 도각(道覺)스님의 발로에서 시작되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정겹고 친구 같은 이곳 산, 계곡, 바다, 바위… 모두가 소중하고 아름답고 그 위에 이에 한층 자비스런 눈으로 중생을 보살펴주시는 관음보살님의 따사로운 자비를 많은 기도객들이 느꼈으면 하는 간절함의 결과였다.
   "처음에는 엄두도 못냈습니다. 도량이 넓지 않아 많은 기도객들을 일일이 동참시킬 수도 없었고 어렵게 찾아온 신도들을 되돌려 보내는 일도 있어 가슴이 아팠습니다. 불사할 수 있는 경내 공간도 그렇고, 불사할 자재를 실어나를 길도 없었고 모든 것이 전무한 상태에서 우선 1986년 9월 길불사를 시작했습니다."
   길불사를 시작할 무렵에는 서울에 사는 기독교 신자 어떤 분이 그의 어머니께서 3일 동안 계속해서 꿈 속에 나타난 남해 보리암 길 닦는데 가서 200만원을 시주하라는 간절한 말씀에 물어 물어 이곳을 찾아 보시금을 내고 갔다는 아이러니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불사를 하여야겠다는 마음과는 달리 처음 길불사는 주위 환경이 바위도 많아 험난하고 천연기념물로 보호받는 지역이고 또 국립공원이고 쉽게 불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기독교인들의 진정으로 감사원의 감사가 있어 법적으로 상당히 고전을 하기도 했으며 상주사람들이 그들의 상권을 잃는다는 이유로 반대가 극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관음보살님의 커다란 보살핌에서인지 무리없이 해결이되어 가람 뒷편으로 뚫리는 길불사가 무사히 이루어졌단다. 법당, 요사채, 산신각 등 50여평이 되는 가람의 풍채에 많은 기도객들을 수용할 능력이 되지 못한 실정이었는데 극락전과 요사채의 불사는 관음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보리암의 또 다른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극락전과 요사채 불사는 1987년 10월에 착공을 하였습니다. 극락전은 금년 5월에 준공을 하였고 요사채 일부도 준공이 되었습니다. 나머니 요사채 불사가 계속 진행 중에 있고 아마 무리없이 끝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웅장한 5층 건물에 철야정진할 대중방과 실내에 화장실, 목욕탕까지 갖춘 시설로 내년 6월에 완공을 할 요사채 불사는 아직까지도 진행중에 있다. 한꺼번에 모인 불사금이 아니어서 모여지는 대로 불사하고 또 불사하니 6개월 동안 작업을 중단시키는 가슴 아픈 일들도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120여평 정도의 규모로 시작하려했으나 지대도 험하고, 불사를 계속 할 만한 공간도 없고, 좀더 욕심을 내서 380여평 건평으로 수십억의 공사비가 소요되는 대불사가 되었다.
   법당 뒷편의 길불사로 인해 공사가 조금은 수월했지만 불사하는 경내까지 자재가 쉽게 오지 못하고 거리의 삼분의 일 정도는 차로 올라오고 200여 미터는 사람의 힘으로 옮겨야 하는 작업이라 보통 평지보다도 두배반 가량의 공사비와 시간이 소요되고 있어 안타깝기까지 하였다.
   요사채가 완공되고, 소형차만이 통과 가능했던 길을 대형 버스가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도로의 폭을 확장하는 보리암 길불사가 마무리 되면 또 한번 남해 관음보살의 자애를 펼치려하는 불사가 있다는 스님의 말씀이 뒤따랐다. 그것은 다름아닌 남해읍에 불교유치원을 설립하는 것이라고.
   "남해는 불교신자가 80%나 됩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는 이런 미약한 환경에서도 볓개의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는 것에 비해 우리의 불교유치원은 없다고 하니 남해에 살고 있는 불자들에게 부끄러운 마음 그지 없습니다."
   300여평의 부지에 100여평의 건물로 강당, 놀이마당, 교실 등을 시설하여 우선 이 지역 어린이 80~100여명의 학생을 소집하여 불법을 펼칠 계획이란다. 무리없이 진행되도록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드리고 또한 항상하시는 관음보살님의 ㅂ ㅗ살핌이 있으리라 생각되기에 즐거운 마음 그지 없으시다고 스님은 덧붙여 말씀하신다.
   또한 이곳 보리암은 세계 인류의 안식처가 될 수 있고 복전의 도량이라는 어떤 큰스님의 말씀이 있듯이 좋은 기도도량으로 기도·성불하시고 소원을 이루도록 하는 도량이 될 것임을 다시 강조하셨다.
   보리암은 탐심을 버리고 나마니 복을 받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 중생 모두가 복을 받고, 성불할 수 있도록 발원하고 기도정진하시는 분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때그때 그 가피를 나투어 보내시는 관음보살님이 언제나 계신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끊이없이 불사에 전념하여 많은 중생, 많은 기도객들에게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게하려는 주지 스님의 따스한 배려는 이곳 불사의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던 넓고 크신 부처님의 자비원력을 몸소 행하시는 훈훈한 정경이었다. 佛光